도쿄 화류계의 색마
이등박문의 애첩이며 수양딸인 요화 배정자
요화 배정자
(妖花 裵貞子. 1870∼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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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이 감돌던 구한말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라는 3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국운은 바야흐로 풍전 등화처럼 흔들리고 있을때 하늘을 찌르는 기세와 입김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기고만장한 나래를 펼치던 이등박문의 애첩이며 수양딸인 요염한 자태의 요화배정자
그녀는 경상남도 김해 출생으로 본명은 배분남(裵粉男)이다
그녀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한국근대사에서 일제 앞잡이 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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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부사 정병하(鄭秉夏)의 후실로 있던 배정자는
밀양부사 주선으로 1885년 무역상 마츠오(松尾)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안경수의 도움을 받아 김옥균과 이토를 만나게 되는데
미모가 빼어난 배정자는 이토 이등박문의 눈에 들어 1887년 수양딸이 되어서 변신을 하게 된다
사다코(貞子)로 개명하고 철저한 정보원 교육을 받은 뒤 1894년 신분을 숨기고 귀국한다.
그리고 고종에게 접근하여 총애를 받으며 정치 정보를 빼내는 등 고급 밀정으로서 일제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무릅쓰고 정보를 얻어내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실력을 보여 주었던 요화 배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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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후 이토 이등박문이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고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그의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 동생은 경무 감독관으로 승진되어
그야말로 생애 최대 배정자의 전성기를 맞이 하게 된다
이토라는 막강한 보호막을 뒷배경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밀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특히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었으며
1909년 이토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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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한일합방 소식을 들고는 병석에서 소리 높여 일황 만세를 불렀다고 하는데
배정자는 1920년 만주에서 조직 되었던 친일단체인 보민회 활동을 마치고
1922년 국내에 들어와서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항일 독립투사를 잡아 들이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게 된다.
총독부는 이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약 600여 평이나 되는 토지를 그녀에게 주기도 했다.
배정자는1924년 57세로 일선에서 물러 났지만
총독부는 그 뒤에도 촉탁이라는 이름으로 넉넉한 생활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배정자는 70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남양군도에 가서
자신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 하며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군인 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는등 일생은 오로지 일본을 위해서 였다.
30세 연하의 일본순사 및 마적단 두목과 동거할 정도로 화려한 남성 편력
배정자는 첫 남편이 병사한 후 현영운과 재혼을 하였다. 그러나 현영운과 1년 정도
살다가 딸 하나를 두고 이혼했다.
그 후에 현영운의 친구이자 친일파로 일본 육사 15기 출신인 박영철과 결혼했다.
박영철과 살림하다 이혼한 후 배정자는 연하의 부잣집 아들들과 살림을 했다.
51세 때 시베리아에서 일본군 첩자로 활동 중 마적단 두목과 동거하면서 정보까지
빼낼 정도로 대담했다. 55세 나이에도 30년 아래인 25세 일본순사와 동거할 정도로
그녀는 농염했다.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윤리나 규범은 전혀 없었고 오직 일본제국을 위해 스파이를 하고
그 대가로 대접을 받고 돈도 벌어 연하의 남자들과 섹스를 하며 인생을 즐기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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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 부터 광복 될 때
배정자는 지난날의 반민족적인 밀정 행위에 대한 응징이 두려워 집에서 숨어 지냈다가
1949년 2월초 반민특위 조사관 일행이 성북동 언덕길 한 양옥집에서
백발의 79세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운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네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제일 먼저 그녀가 국민 심판대에 오르게 되지만 6.25가 터지면서 반민특위의 해산되자
감옥에서 나온 배정자는 돌봐 주는 사람없이 어렵게 생활하다가 1952년 82세로 사망한다.
지난날 화려했던 영화를 간직한 채 쓸쓸하게 말로를 맞이 하는데
한일합방 당시 막후의 밀정으로 활약 했지만 정식 직책이 없던 인물이기에 역사(正史) 기록에는
없는 인물이다.
6.25 때문에 법의 심판을 받지 못했지만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1 순위로 들어 있다.
밀양부사 정병하는 민비시해 사건에 연류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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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자기 나라와 자기 ㅂ지를 팔아 호화 호식하고 늙어서는 추한 잡년이된 한평생
영화 요화 배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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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머물다간 사건이기에 1966년과 1973년 두번 영화로 만들어젔으며 특히 라디오 드라마 영화등
대중 매체에서는 두번의 영화에서는 김지미와 윤정희가 각각 주연인 배정자 역으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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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 1966 년
출연 ; 김지미(배정자).김진규(박법진).김승호(고종).조미령(엄비).허장강(김홍집)
최남현(이등박문).주선태(이완용). 양훈(러시아공사).이용(현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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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줄거리
사교계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이등박문의 양녀이며 애첩인 배정자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을 일본에 팔아 넘기는 한일합방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김해에서 아전 노릇 하던 부친이 대원군 실각 후 졸당卒黨으로 몰려 사형을 받자
부친의 친구인 정병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관기 신세가 되는데 이 무렵 박범진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후 세월이 흘러서 배정자가 일본 밀정으로 이등 박문의 애첩이란 사실을 안 박범진은
배정자를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잡히게 된다.
그러나 배정자는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며 옛 정을 생각하여 그를 탈출 시켜 준다.
이등박문은 배정자를 일본 공사관에 있는 현영운(玄暎運)과 혼인을 시킨다.
그후 박범진은 의병대장으로 활동을 하며 외침에 항거를 하는데
배정자가 고종에게 현금 가방을 건내자 외교권 박탈 댓가로 주는 것을 안 고종이 받지 않는다
배후에 박법진이 있다는 사실을 안 이등박문은 현영운에게 한국군으로 체포 할 것을 지시한다
박범진과 현영운은 수학을 같이한 친구로써 한사람은 의병대장이고 또 한사람은 일본 앞잡이로
배정자의 남편이 되어 있었다.
현영운은 박범진을 체포하지 못하고 돌아와서 이등박문 앞에서 일본이 준 훈장을
군복에서 모두 뜯어 내며 앞잡이가 되지 않겠노라 선언한다.
결국 박법진은 일본 군인에 의해서 체포되어 죽음의 사지에 몰리게 되자
배정자는 이등박문에게 그를 살려줄 것을 간청한다
처음엔 거절하지만 배정자가 일본에 많은 일을 했는데 아버지로서 청을 거절한다면
더이상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이등박문은 그를 석방해서 만주로 추방시킨다
배정자의 자기 집에 있던 식모와 함께 박법진을 떠나 보내며
후회와 사랑에 눈물을 흘리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박법진을 만주로 떠나 보내는 배정자 -> 영화의 마지막 장면
요화 배정자 - 노래 최숙자('1966년 발표)
세상을 재멋대로 희롱도 하고 청춘을 마음대로 불태웠지만 요염한 눈동자에 슬픔은 있어
기구한 운명속에 몸부림을 치면서 그사람을 보내 놓고 슬피우는 배정자
장미빛 그 입술에 가시가 있고 부풀은 그가슴에 먹구름 있다
제한몸 위하여서 핏줄도 파는 될대로 되여버린 운명이라 하지만
사랑에는 참된 눈물 흘려 보는 배정자
요화 배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