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한국은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207개국 중 6번째로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으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장식했다.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자 통산 여덟 번째 세계 무대에 나서게 된 한국. 그 역사의 과정을 다시 되짚어 보자. 1954년 월드컵 본선 무대를 처음 밟은 이후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는 울분과 희망으로 점철된 한편의 드라마였다.
1954 스위스월드컵
6·25전쟁 직후 열린 스위스월드컵 지역예선 두 경기는 모두 도쿄에서 치러졌다. “일본인에게 한국 땅을 결코 밟게 할 수 없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침 때문이었다. 당시 이유형 감독은 출국 전 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만약 일본에 승리하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 대한해협에 빠져 죽겠다”고 비장한 약속을 했다.
1954년 3월, 눈비가 섞여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1차전에서 한국은 최정민의 두 골을 시작으로 성낙운, 정남식, 최광석 등의 연속골에 힘입어 5-1 대승을 거둔 뒤 2차전에서도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1승1무로 본선 출전권을 얻어냈다.
하지만 본선 티켓을 따고도 한국의 첫 월드컵 진출은 수월하지 않았다. 서울역을 출발해 부산까지 기차로 이동해 배를 갈아타 일본을 거쳐 스위스로 갈 수 있었다. 그것도 주전 선수 11명이 프랑스항공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11명은 미군의 협조를 얻어 군용기를 타고 2박3일을 날아간 끝에 가까스로 본선 무대를 밟았다.
역사적인 본선 첫 경기였던 헝가리 전에는 경기 중 구토를 하는 졸전 끝에 0-9로 패했다. 2차전 역시 터키에 0-7로 무릎을 꿇었다. 상대의 대포알 같은 슈팅에 온몸을 던져 막아냈던 당시 대표팀의 골키퍼 홍덕영은 경기를 마친 뒤 가슴에 피멍이 들 정도였다.
1986 멕시코월드컵
1954 스위스월드컵에서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한 한국은 이후 32년 동안 다시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58 스웨덴월드컵 아시아 예선 때는 대한축구협회 직원이 신청서류를 분실하는 바람에 참가하지 못했고 1966 잉글랜드월드컵에는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일찌감치 대회 불참을 결정하기도 했다.
1985년 두 장의 본선 진출권을 놓고 치러진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은 A조에 속해 네팔 말레이시아와 1차 예선을 치렀다. 네팔을 2-0으로 손쉽게 잡았지만 말레이시아 원정에서 0-1로 패했고 대한축구협회는 문정식 감독을 해임하고 김정남 코치를 사령탑에 선임했다. 이후 홈에서 네팔에 4-0으로 승리한 한국은 말레이시아를 2-0으로 꺾으며 B조 1위 인도네시아와 만나 2-0, 4-1로 승리하며 최종예선에 올랐다.
하지만 다음 상대는 영원한 라이벌 일본이었다. 1985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1차전에서 정용환의 시원한 슈팅으로 선제골을 넣은 뒤 최순호의 도움을 받은 이태호가 일본 수비수를 따돌리고 골을 터뜨리며 2-1로 승리해 월드컵 본선에 한 걸음 다가섰다. 1985년 12월, 서울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는 허정무의 결승골로 한국이 1-0 승리를 거뒀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짓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세계무대를 오랜 만에 밟은 한국은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함께 ‘죽음의 조’에 편성됐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 박창선이 한국 축구 사상 첫 본선 1호 골을 쏘아 올리는 등 선전을 펼쳤고 불가리아와의 2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첫 승점을 획득했다. 한국은 이탈리아와의 3차전에서도 접전 끝에 2-3으로 패했지만 세계에 ‘아시아 호랑이’의 존재를 알리기에 충분했다.
1990 이탈리아월드컵
6개조로 나뉘어 1차 예선을 거쳐 각 조 1위가 한 지역에 모여 풀리그로 최종예선을 갖는 방식으로 치러진 1990 이탈리아월드컵 아시아 예선. 중동팀과 일전을 피할 수 없어 한국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기우였다. 한국은 네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한 조에 속해 6전 전승(25득점 무실점)을 거두며 진출한 최종 예선에서도 일취월장한 기량을 뽐냈다. 한국은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중국, 카타르와 198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최종 예선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카타르와의 1차전에서 0-0으로 비기며 불안하게 출발한 한국은 이후 내리 3연승을 거두며 남은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이탈리아행 티켓을 확보했다. 아시아지역 최종예선까지 11전 무패(9승2무)를 거듭하며 2회 연속 본선진출에 성공하며 ‘아시아의 맹주’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한국은 11경기를 치르는 동안 29골을 몰아쳤고 실점은 단 1골 뿐이었다.
하지만 본선 개막 전부터 8강 진출 이상을 기대했던 한국은 스페인, 우루과이, 벨기에에 내리 패하며 3패로 본선을 마감,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1994 미국월드컵
1차 예선에서 레바논, 바레인, 인도, 홍콩을 상대로 7승1무를 거두며 무난히 최종예선에 진출한 한국은 최종예선에서 북한, 사우디, 일본, 이라크, 이란과 맞붙었다. 한국으로서는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진 풀리그에서 격돌해야 하는 중동팀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일본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은 첫 상대 이란을 3-0으로 잡고 두 장뿐인 본선 진출권을 향해 산뜻하게 출발했다. 하지만 이후 이라크와 사우디에 내리 2-2, 1-1 무승부를 기록한 한국은 일본과의 4차전에서 미우라 가즈요시에게 결승골을 얻어 맞으며 0-1로 패하고 말았다.
마지막 한 경기를 남기고 일본이 2승1무1패(승점 5점 골득실 +3), 사우디가 1승3무(5점, +1), 한국이 1승2무1패(4점, +2)였다. 자력 진출은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한국은 마지막 경기인 북한전을 두 골 차 이상으로 이기고 일본과 사우디 중 한 팀이 비기거나 패하기를 기도해야만 했다.
마지막 경기는 승부 담합을 막기 위해 동시에 치러졌다. 사우디가 이란은 4-3으로 격파하며 본선 진출을 확정한 가운데 한국도 북한을 3-0으로 제압했지만 분위기는 침울했다. 일본이 이라크에 2-1로 앞선 상태에서 경기 종료가 눈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도하의 기적’이 일어났다. 일본-이라크전에서 경기 종료 30초 전 이라크의 움란 자파르가 헤딩으로 동점골을 넣으며 2-2 무승부로 경기가 끝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반도는 환호성으로 들썩였고 일본 열도는 눈물바다가 됐다.
기적적으로 본선에 오른 한국은 조별예선 1차전에서 강호 스페인과 2-2 무승부를 일궈내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볼리비아와 0-0, 이어진 독일전에서 2-3으로 패해 본선 1승 사냥을 또 다시 4년 후로 미뤄야만 했다.
1998 프랑스월드컵
본선 참가국이 32개국으로 확대되고 아시아에 배정되는 출전권도 3.5장으로 늘어나면서 한국의 1998 프랑스월드컵 본선 진출 가능성도 커졌다. 한 지역에서 풀리그로 최종 예선을 치르는 방식에서 홈 앤드 어웨이로 최종 예선 방식이 변경된 것도 한국으로서는 호재였다.
홍콩 태국 등과 함께 치른 1차예선을 3승1무로 가볍게 통과한 한국은 일본, 우즈베키스탄, UAE, 카자흐스탄과 최종예선 B조에 속했다. 카자흐스탄과의 1차전에서 3-0, 2차전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2연승을 거둔 한국은 3차전에서 숙적 일본을 만났다.
도쿄에서 벌어진 일본전에서 선제골을 뺏겨 어려움을 겪던 한국은 후반 38분과 후반 41분 서정원-이민성의 릴레이 골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도쿄 대첩’을 일궈냈다. 분위기를 탄 한국은 6차전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 5-1로 승리하고 두 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조 1위로 4회 연속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하지만 한국은 본선 무대에서 ‘마르세유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 등 강팀과 한 조에 속한 한국은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1-3으로 역전패하더니 2차전 네덜란드전에서는 0-5로 대패하며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태에서 치른 벨기에와의 최종전에 보여준 ‘붕대 투혼’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한국은 2002 한일월드컵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 자동 출전권을 얻었다. 5회 연속 본선 무대를 밟은 한국은 거스 히딩크 감독을 사령탑으로 영입해 1년 반 동안 담금질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과 한 조에 속한 한국은 폴란드와의 1차전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월드컵 사상 본선 첫 승의 감격을 맛봤다. 2차전 미국전을 1-1로 비긴 히딩크호는 이어 벌어진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도 1-0 승리를 거두고 사상 첫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승승장구한 한국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연거푸 꺾고 월드컵 4강의 꿈을 이뤘다.
2006 독일월드컵
2002 한일월드컵 4강 이후 한국 축구는 침체기에 빠졌다. 2003년 2월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한국은 2002년 4강 신화에 취해 아시안안컵 예선에서 베트남(0-1), 오만(1-3)에 패하며 ‘쇼크’를 받았다. 이후 몰디브 원정에서도 0-0 무승부를 기록한 코엘류 감독은 14개월 만에 중도 하차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이후 박성화 감독대행을 이어 후임 사령탑으로 조 본프레레 감독을 선임한 한국은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최종 예선 A조에 편성됐다. 한국은 5차전 쿠웨이트 원정경기를 4-0으로 이기며 최종전에 상관없이 최소 조2위를 확정해 본선행을 확정했다.
하지만 결과상 큰 위기 없이 무난하게 6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됐음에도 대표팀을 향한 비난은 끊이질 않았다. 무미건조한 전술과 경기 완성도, 2002 한일월드컵 4강으로 높아진 팬과 언론의 눈은 결국 본프레레 감독을 경질하고 UAE 감독직을 수행하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사령탑으로 앉히는 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사우디와의 최종 예선 두 경기를 모두 패한 것도 본프레레 감독 경질의 원인이 됐다.
본선 준비 시간이 촉박했던 아드보카트 감독은 독일 월드컵 본선 첫 경기에서 토고를 상대로 2-1로 역전승하며 월드컵 원정 첫 승의 소중한 열매를 맺었고 이어 유럽 강호 프랑스를 상대로 앙리에게 선취골을 내줬지만 박지성이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려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하지만 한국은 16강 진출을 놓고 벌인 최종전에서 스위스에 0-2로 패하며 조 3위로 탈락하고 말았다.
2010 남아공월드컵
2007년 7월 사임한 핌 베어벡 감독의 후임으로 외국인 지도자를 물색하던 대한축구협회는 2007년 12월 외국인 지도자 영입 작업이 난항을 겪자 허정무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에 임명했다. 일부에서는 허정무 감독의 선임을 두고 협회의 행정력과 마인드에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3차 예선을 무패(3승 3무)로 통과한 한국은 최종예선 B조 1차전에서 북한과 1-1로 비긴 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벌어진 UAE와의 최종예선 2차전에서 이근호의 두 골에 힘입어 4-1 대승을 거두고 남아공을 향해 힘찬 항해를 시작했다.
이후 한국은 ‘죽음의 중동 원정 3연전’에서 사우디에 2-0 승리를 거두며 ‘사우디 징크스’를 깨는 등 2승 1무의 성적을 올렸고 UAE를 적지에서 2-0으로 꺾고 두 경기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일찌감치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본선에 쉽게 진출했다고 해서 만족할 수는 없다. 한국은 그 동안 사례에서 보듯 아시아 예선에서 선전했음에도 본선 무대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찌감치 남아공행을 확정지은 한국은 이번 월드컵을 더욱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다른 나라보다 예선을 일찍 끝낸 게 아니라 본선을 빨리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7회 연속 월드컵에 나설 정도의 축구 강국이 또 ‘쪽팔리게’ 경우의 수나 따지다 일찌감치 짐을 싸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