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2,42-47; 1베드 1,3-9; 요한 20,19-31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지난주 부활 대축일 교중 미사 후에 ‘형제들과 함께하는 기쁜 부활 축제’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행사를 준비해 주시고 행사를 위해 봉사해 주신 모든 분들과 경품과 빨랑카를 봉헌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묘사되는데요,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가 하루 종일 행복했던 부활절이었습니다.
제1독서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이 말씀은 오늘날 수도 공동체에서 실현되고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말씀인데요, 소중한 물품을 찬조해 주시고 또 그것을 기쁘고 소중하게 받아 가시는 모습 안에서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무척 흐뭇한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재산과 재물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하느님 백성이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는 분들이 계신데요, 지난 2년간 사목평의회 위원으로 봉사해 주신 분들의 임기가 오늘 종료되고, 새로운 위원들께서 2년간 봉사해 주시겠습니다. 헌신적으로 봉사해 주신 11기 위원님들께 감사드리고, 또 새로이 봉사해 주실 12기 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한편, 이란과 미국의 종전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데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어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갈등도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 폭탄을 투하하는 자들의 편에 결코 서지 않습니다. 군사 행동은 자유나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평화는 오직 사람들 사이의 공존과 대화를 인내로이 도모할 때만 찾아옵니다.” 교황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도 세계 평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실천해야겠습니다.
부활 제2주일 복음에는 언제나 토마스 사도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토마스는 이 자리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의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는 모든 사람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입학한 지 7년 만에 예비자 교리를 받기 시작하셨는데요, 교리를 받으시면서 한번은 제게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는 말이 제일 믿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예비자 교리를 마치신 후, ‘아무래도 한 번 더 들어봐야겠다’시며 두 번 교리를 받으신 끝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올해 제가, 아버지가 세례받으시던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자신의 신념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면서 아버지 말씀이 더 잘 이해가 됩니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신봉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돌아가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믿는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도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구분을 해야 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실’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뉴스를 접합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언론에 따라 다르게 보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성향에 맞는 뉴스는 믿고, 그렇지 않은 뉴스는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에 대한 믿음이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차원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을 넘어선 ‘진실’과 관련된 믿음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믿고, 아내는 남편을 믿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믿고, 부모는 자녀를 믿습니다. 이 믿음은 상대방의 인격을 신뢰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교리적인 믿음에 앞서 하느님의 진실하심을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신뢰는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종종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을 믿으라’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만,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을 믿기 때문에 사랑할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믿을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에서, ‘예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믿음’인 신뢰가 흘러나오고, 그 신뢰로부터 교리에 대한 믿음도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사랑 없이, 신뢰 없이, 교리적인 믿음만 가지려 할 때 우리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들을 모아 놓은 교리적인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계신 하느님과 만난 이들이 남긴 체험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구약 성경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신약 성경을 통해, 그들이 주님의 진실하심을 어떻게 믿고 고백하고 있는지를 성령의 감도로 읽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내 영혼에 씨앗으로 심겨 점점 자라납니다. 이 씨앗이 자라나면서 우리의 믿음과 사랑도 자라납니다. 어떤 분들은 ‘믿음이 잘 안 생긴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믿음이 자라나도록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되돌아보아야겠습니다. 믿음은 두 가지 양식을 먹고 자라납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입니다.
이번 주부터 거룩한 독서 제 3년차 과정이 시작되는데요, 성경은 무작정 어렵다는 편견을 깨시고, 많은 분들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혼자 읽으면 어려울 수 있지만, 함께 읽고 묵상하며 또 그 묵상을 나누는 가운데 믿음과 사랑이 점점 자라납니다. 거룩한 독서에 함께 하시기 어렵다면, 구역반 모임, 레지오 마리애, 그 외 여러 단체 활동과 개인적인 만남 안에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가져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혼자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드레 뒤, 이번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공동체 안에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옆에, 앞뒤에 앉아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계신 분들을 바라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내 주위에 있는 분들이 나에게 부활의 증인이고 나는 이분들께 부활의 증인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희 아버지는 제가 봉성체를 해 드렸을 때, 눈물을 흘리시며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분의 음성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분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죽은 사람의 부활이 가장 믿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성체 앞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신 분의 목소리를 들으셨고 이제 그분 품 안에 계십니다.
잠시 후 우리는 성체를 영하게 됩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분의 몸을 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신 분의 몸을 영합니다. 성체를 내 안에 모시며 토마스 사도의 고백을 우리도 드립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두치오, 시에나 성당 제단화 중에서, 1308년
출처: The-Maesta-Altarpiece-The-Incredulity-of-Saint-Thomas-1461 Duccio - Doubting Thomas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