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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20) 십사만 사천(묵시 7,1-8)
하느님 백성이 진정 가득하고 완전하다는 뜻
요한묵시록 6장까지 여섯 개의 봉인이 연거푸 열리다가 7장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일곱 번째 봉인은 8장부터 다시 이어진다. 7장은 6장의 마지막, 그러니까 어린양의 진노를 견뎌 낼 수 있는 이를 찾아 나서는 질문에 이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린양을 진노의 주체로 읽어내었고 이 세상은 그러므로 산과 바위 뒤에 숨어야만 하는 절망의 자리가 된 듯하여 허망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요한묵시록 7장은 세상 사람들의 절망적 읽기에 또 다른 대답은 내놓는다.
7장은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후기 유다이즘은 천사들이 종말론적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이해한다.(에녹 60,11; 희년서 2,2) 요한묵시록 역시 천사가 불의 권한을 지녔거나(묵시 14,18) 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소개한다.(묵시 16,5) 7장의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5절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장면은 징벌의 시간 바로 전, 하나의 ‘멈춤’, 혹은 ‘쉼’을 상정한다.
왜 멈추는가. 후기 유다이즘의 사상, 예컨대 노아의 홍수를 재해석하는 에녹서의 생각에서 얼마간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징벌을 준비하는 천사들이 있었다. 홍수를 쏟아부을 수 있는 천사들이었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에 주님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도록 천사들을 잠시 멈추게 한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찰지라도 주님은 구원에 대한 얼마간의 시간과 방도를 마련하신다는 이야기다.(에녹 6)
다시 요한묵시록으로 돌아오자면 7장에 등장한 천사들은 분명 징벌을 준비하고 있는 천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바람을 붙들고 멈춤과 쉼을 이끌어내는 천사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얼마간 간직하게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추는 곳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야기는 구원을 향해 급하게 전환된다. 2절에 다른 한 천사가 ‘해 돋는 쪽’에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올라온다. ‘해 돋는 쪽’은 구원을 상징한다. 에덴동산이 동쪽이었고(창세 2,8),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키루스 임금이 동쪽에서 왔고(이사 41,2) 하느님의 영광이 해 뜨는 동쪽에서부터 나타났다고 구약은 말한다.(에제 43,2)
하느님의 인장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인장은 징벌의 시간에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혀야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춘 시간,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을 보살피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종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어 종말을 맞닥뜨린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로 소개되는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곤 한다. 열두 부족에서 시작한 십사만 사천이라 유다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신원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때,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은 요한묵시록에 자주 등장한다.(1,1; 2,20; 6,11; 19,2.5; 22,3) 말하자면 ‘땅의 자리’에서 속량되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의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이다.(묵시 14,3)
하느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장은 또 무엇일까. 에제키엘서 9장 4절은 예루살렘에 징벌을 내리기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도록 주님께서 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제키엘서 9장 4절에서 ’표’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타우’(תָּו)를 두고 십자가의 예형으로 인식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해석이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묵시록 7장에서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라고 읽어내는 해석과 맞닿아 있다. ‘인장’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그 말마디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결하기도 한다. ‘인장’이라는 그리스말은 ‘스프라기스’(σφραγίς)로 세례와 같은 의미로 초대교회는 이해했기 때문이다.(2코린 1,21 이하) 어떤 해석이든 인장을 받았다는 것은 징벌의 순간에도 하느님의 보호는 분명히 살아 있다는 명징한 은유가 된다.
하느님의 종들의 숫자는 십사만 사천이다.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씩 나와서 총합이 십사만 사천이다. ‘12’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1000’은 풍성함, 충만함, 완벽함을 가리킨다. 하여 ‘1만2000’은 하느님 백성이 가득하고 완전하다는 뜻을 품는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해야 십사만 사천이 된다. 같은 수를 다시 곱하는 것은 묵시문학적으로 ‘마땅하고, 당연하여, 절대적으로 그러하다’는 의미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 진정으로 가득하고 완전하고 풍성하다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요한묵시록 7장 9절은 그리하여 십사만 사천의 무리를 ‘셀 수 없는 무리’라 규정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실은 무한대의 사람이다. 요한묵시록이 숫자에 민감하여 여러 숫자들을 소개하고 제시하는데 대략적으로 보면 하느님과 어린양 쪽의 서술에서는 무한적이고 보편적인 숫자를, 악과 그의 부속 형상들, 예컨대 용과 두 짐승과 대탕녀 쪽의 서술에서는 한계지워지고 제한적인 숫자를 배치시킨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무한하나 악의 자리와 그 힘은 제한적이어서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다.
요한묵시록 7장은 잠시 쉬어가는 대목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우리는 ‘구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원은 십사만 사천, 그러니까 무한하고 보편적인 자리다. 구원은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혹은 부합하고자 애쓰는 이의 특별한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러니까 무한하신 하느님을 닮았다. 우리가 넓어질수록 구원은 뚜렷해진다. 우리가 좁고 좁아서 다른 이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수록 구원은 그만큼 좁아지고 어려운 것이 된다. 구원은… 그러니까 주어진 선물이지 갖고 싶은 선물이 아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72)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마술사 시몬
980년대 중반 이스라엘의 마술사 유리 겔라는 우리나라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방송에서 염력이나 텔레파시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TV 앞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앉아 숟가락을 들고 함께 구부리려 그의 말에 집중하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유리 겔라는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뿐 만 아니라, 고장 난 시계 고치거나 손가락으로 사람을 들어올리는 등의 시연도 선보였다.
외국에서 마술사라는 말에는 ‘아티스트’란 의미가 있다. 마술사란 기묘한 현상처럼 보이는 속임수나 환상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연출해 관객을 즐겁게 하는 일종의 공연 예술가란 의미다. 대부분의 마술은 마술사의 행동에 주의를 끌게 해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켜 눈속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마술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는데 마술사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술사들이 악마를 위한 의식을 행하는 자로 여겨져 탄압을 받기도 했다.
신약성경에도 사마리아 지역의 마술사 시몬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마술사가 미래를 예언하고 병을 낫게 하거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사마리아 지역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아 다른 이방 지역처럼 주술적 믿음이나 마술 등 이교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잡신들의 기운이 강해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미래의 운세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경에도 예언자들은 이방인의 마술 행위를 끊임없이 고발한다. 마술 행위는 결국 유다인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 내려온 필립보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기적을 행하자 많은 이가 세례를 받게 됐다. 마술사 시몬도 필립보를 찾아가 그의 말과 기적 행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필립보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필립보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필립보처럼 기적을 행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여러모로 부족함이 있었다.
얼마 후 사마리아 지방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다. 사도들이 오순절 날의 체험처럼 , 불길처럼 성령을 내려보내자 치유와 예언 등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시몬은 갑자기 돈을 챙겨 사도 베드로에게 가서 사도들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느님의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에게 베드로는 따끔하게 충고한다.
신앙을 갖는 동기는 여러 가지이다. 한 선배 사제는 공소에 오시는 신부님이 김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마음이 동해 신학교에 왔다고 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뉘우친다면 진정한 신앙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주님의 기도에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옛 성전에도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늘 성전의 모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고대 근동인들이 비슷하게 공유한 신관으로서, 히브리서에서도 확인됩니다: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8,5). 이에 따르면 모세는 광야에서 주님의 성막을 봉헌할 때,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모형대로 지은 셈입니다(탈출 25,9). 이후 솔로몬이 봉헌한 예루살렘 성전 역시 하늘 성전(묵시 11,19)의 모상처럼 지어집니다. 이는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한 말에도 잘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손으로 쓰인 기록에 들어 있다. 그분께서는 나에게 이(성전) 모형의 온갖 세부 사항을 분명히 알려 주셨다”(1역대 28,19).
고대인들이 하늘 성전의 모상처럼 봉헌한 지상의 성전은 창조주께서 안식을 취하시던 곳입니다(시편 132,8.13). 주님의 안식은 창세 2,4에도 언급되는데, 이는 피로회복의 개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느님의 안식은 ‘세상이 평화롭다.’는 방증입니다. 삼라만상의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으므로, 하느님께서 일하실 필요 없이 평화롭게 쉬실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다 창조 질서에 해가 되는 일이 발생하면, 하느님께서는 안식에서 깨셔야 합니다. 시편에는 이스라엘이 위기를 겪을 때 바쳤을 법한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무십니까? 잠을 깨소서, 저희를 영영 버리지 마소서!”(44,24) 이사야서에도 비슷한 호소가 등장합니다: “힘을 입으소서, ··· 오래전 그 시절처럼 깨어나소서”(51,9). 두 구절 모두 세상의 질서가 훼손되었으니 주님께서 얼른 안식을 중지하시고 질서를 회복해 주셔야 한다고 청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바로 이런 의미가 깃들어 있기에, 고대인들은 세상의 평화를 상징하고 보장받는 의미로 하늘 성전의 모습을 본떠 지상 성전을 지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도둑들의 소굴처럼 타락하자 그 파괴를 예고하십니다(마태 23,37-39). 그리고 그 예고대로 열혈당원을 진압하던 로마 장군 티투스가 기원후 70년 성전을 무너뜨린 뒤 더 이상 재건되지 않았으므로, ‘당신 성전을 백성 사이에 영원히 두겠다.’ 하신 예제 37,26의 약속도 깨진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구약성경을 연결하여 이해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활동으로 성전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며(요한 2,19-22),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되기 때문입니다(1코린 3,16; 2코린 6,16). 그렇다면 성전 건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나 예수님과 우리가 모두 성전이기에, 예부터 믿어온 세상의 질서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이는 오늘 제2독서에서 말하듯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의 시대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19)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다(묵시 6,12-17)
하늘과 땅의 재앙,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 의미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묵시문학의 전형적 장면들이 등장한다. 큰 지진과 천체의 혼돈이 그러하다. 대개 이단들은 이러한 혼돈을 신의 심판이나 징벌로 이해하곤 한다. 더욱이 어느 나라의 지진이나 해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현실의 사건들을 묵시록의 혼돈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세상 종말의 문학적 수사를 실제 사건과 엮어내어 해석하는 일은 끔찍하다. 누군가의 희생을 빌미 삼아 묵시문학적 표현에 대한 설익은 해석을 내놓는 일은 폭력 그 자체다.
땅의 지진과 같은 묵시문학적 표현들은 구약성경 안에서도 발견된다.(아모 8,8; 9,5; 요엘 2,10) 후기 유다이즘, 그러니까 기원후 1~2세기의 묵시문학 작품들 안에서도 지진에 대한 서술은 흔하다.(2바룩 70,8)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도 묵시문학의 전형적 은유다.(이사 50,3; 요엘 3,4) 당시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이나 자연재해를 종말의 상징으로 해석했고, 그 재해가 두려울수록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외침은 뚜렷했다. 이를테면, 묵시문학의 재앙적 서술은 암울한 현실 안에 위엄하신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신앙을 내포한다. 공포스러운 장면은 실은 하느님을 향한 한 줄기 희망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 또한 제자리를 잃어버리는 장면 역시 묵시문학적 표현이다.(느헤 1,5; 예레 4,24) 묵시문학이 서술하는 천체의 혼돈이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하늘이 사라지고 땅 위의 것들이 제자리를 잃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국한된 관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나, 하느님의 개입이 인간 세상이 원하는 행복, 기쁨, 성공 등의 장면들로 묘사되길 원하는 이들에겐 천체의 혼돈은 불편하다.
만약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라면,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장면에선 설레야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세상은 온통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창세기 1장 6절에 하느님은 물을 갈라놓아 우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창공을 만드시는데, 창공이라고 번역된 ‘라키아’(רָקִיעַ)는 ‘펼쳐진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다.
두루마리 펼치듯 생겨난 것이 창공, 곧 하늘이다. 프랑스 리옹의 성서신학자 프랑수아 마르탱은,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두루마리 펼치듯 창공을 만드시기 이전, 그러니까 창조 이전의 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묵시문학의 재앙적 은유들은 이 세상을 접고 새로운 세상을 펼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재창조를 암시한다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주류의 해석이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 종말을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하는 묵시문학 작품들의 의도에는 부합하는 듯하다. 끔찍한 사건 앞에 주눅 들어 죄의식과 자책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미래를 설계하고 기꺼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섬세하게 다듬기를 바라는 의도 말이다. 요한묵시록의 서사 흐름이 천체의 혼돈 이후 7장에서 십사만사천의 구원받은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천체의 혼돈은 하느님 안에 구원을 누리는 이들의 등장을 위한 사전 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세상은 재창조를 원하지 않는다. 요한묵시록 6장 15절에 일곱 개로 분화된 사회 계층이 등장한다. 당시의 인간 사회를 총망라하는 계층 분화의 관습적 예를 보여준다. 땅의 임금, 고관, 장수, 부자, 권력가, 종, 그리고 자유인…. 힘과 재능, 그리고 노력과 우연이 뒤섞여 우리 사회는 다양한 계층으로 형성된다. 이른바 기득권은 그 계층 구조 덕에 누리는 이익이 있어 세상의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경쟁에 뒤처져 기득권으로부터 멀어진 부류는 세상의 계층을 차별과 소외로 인식하며 변화를 갈망한다. 15절과 16절은 신분과 권력,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형성되는 계층 분화의 세상을 한꺼번에 없앤다. 모든 계층은 산과 바위를 향해 숨겨달라고 아우성이다.
호세아서 10장 8절의 영향을 받은 이 아우성은 하느님께 불충한 이들이 겪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징벌을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 다만 숨기를 바라는 나약함의 아우성이다. 창세기 3장 8절의 아담과 하와도 그랬다. 하느님이 찾는대도 아담과 하와는 숨었다. 하느님처럼 되고자 열매 하나를 나눠 먹은 결과는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인간의 처지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그리하여 하느님을 제대로 반기지 못하는 인간의 현실은 무언가 답답하고 서글프다. 본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는 ‘관계적’ 존재로 지어졌는데, 인간은 숨어있다. 인간은 그러므로 인간답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인간에게 하느님은 ‘진노’(嗔怒)의 주체일 뿐이다.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주님의 진노의 날’은 마지막 때에 등장하시는 하느님의 위엄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예언의 말마디다.(요엘 2,11; 말라 3,2) 요한묵시록은 진노의 자리에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언급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세상 모든 사람을 속량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했다.
세상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분과의 인연을 다시 엮어 놓아 이른바 구원이란 걸 이루신 예수님을 ‘진노’의 주체로 해석하는 인간들의 아우성은 그리 달갑지 않다. ‘주님의 진노의 날’이 마지막 시대를 가리키는 시간적 은유라면, 그 마지막 시간에 우리는 주님을 어떤 모습으로 형용하고 은유할 것인가. 그 누구도 견디어 낼 수 없는 진노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당당히 반길 기쁨의 주체로 주님을 만나길 다만 바랄 뿐이다. 인간들의 아우성 이후에 요한묵시록 7장은 구원을 노래하는 십사만사천을 등장시킨다. 참 다행이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71)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원한 악녀 헤로디아
중국사에는 3대 악녀(惡女)가 있다. 바로 한나라의 여태후(呂太后)와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이다. 이들은 높은 권력을 쥐락펴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고 나라의 근간을 크게 흔들었다.
한나라의 초대 황제,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는 유방의 소실,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인 유여의와 갈등이 심했다. 자신의 아들, 혜제가 왕위에 오르자 유여의를 독살하였고 척부인은 산 채로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약을 먹여서 귀머거리로 만든 다음에 돼지우리에 던져버렸다. 중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는 자신이 황후 자리에 오르는 데 반대한 공신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과 딸마저 죽였다고 하니 악녀가 맞다. 청나라의 서태후는 3명의 황제가 집권하는 동안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아들들이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했는데 아들이 성인이 되어 갈등이 생기자 황제들을 죽였다. 당시 국제 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는 중에도 서태후의 생각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였다. 악녀들의 행동은 일종의 사이코패스 성형을 보인다. 다른 이의 고통에 전혀 공감을 못 하며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약성경 속에서 헤로디아는 그의 딸과 함께 대표적인 악녀이다. 그는 필립보 임금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시숙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여러 차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왕으로서 법도에 맞지 않다”고 계속 진정했다. 헤로데는 군중들의 여론이 두려워 일단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비판을 받은 헤로디아의 마음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마침 헤로데의 생일 축하를 위한 연회에서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솜씨를 뽐냈다. 헤로데는 기뻐서 살로메에게 “소원을 말해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헤로디아는 지체 없이 살로메에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귀띔했다.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병사를 보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경비병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돌아왔다. 사람들은 피가 흐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살로메는 쟁반에 담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받아서 헤로디아에게 주었다.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면서 너무 기뻐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와 같은 인물은 정말 비정하고 무섭다. 자신을 비난한다고 해서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비정함이 끔찍하다. 인간의 악행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감정이다. 중요한 것은 정말 실행에 옮기는가이다. 인간은 분노와 화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파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