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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힘들고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황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인간이 정말 이 세상에서 제대로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전혀 인간다운 세상이 아닌 것을 보여줄 때도 꽤 많습니다. 어떤 일들을 보면서 정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 일들이 정의로운 것인지, 합당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세상살이 가운데에도 정말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이 천국인지, 천국이 아닌 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모든 죄와 모든 악을 멸하셨다면 분명 천국인데 아직도 여전히 이 세상은 죄와 악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천국의 도래”와 “천국의 완성”입니다. 천국은 이미 왔지만 천국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 ‘이미(already) 그러나 아직(yet)’을 가르쳐 주십니다. 천국이 이미 도달했고, 천국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모순이 가득한 세상이며 악이 다스리고 있는 듯한 세상입니다. 악이 판을 치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들의 마음 한 가운데 실망감이 가득하며 ‘이 세상은 과연 바르게 정의롭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제 언제라도 이 세상이 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 속 두 가지 비유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이고, 또 하나는 누룩의 비유인데, 이 두 비유를 통해 우리는 동일한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보이게 되는 것,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서 현실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임할 지를 깨닫고 천국을 기대하며 현실 속에서 천국 소망의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첫째 느끼지 못하다 어느 순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 31, 32절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유하시며 “하나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 한 알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겨자씨 한 알이 얼마나 작은 지 우리의 육안으로 분별해 내기 어려운 씨앗 중 하나로 겨자씨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전혀 있는 지 없는 지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비유할 때 겨자씨를 예로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작은 것’에 대해 표현할 때 “겨자씨만 한”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은 것’을 표현할 때 뭐라고 하나요? “콩알만 한 게” “쥐방울만 한 게” “도토리만 한 게” 등으로 쓰지 않습니까? 사실 사실 ‘콩알’, ‘쥐방울’, ‘도토리’보다도 더 적은 열매나 씨앗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콩알, 쥐방울, 도토리로 “작음”을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은 “겨자씨만 한”이라고 말하면 가장 작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작은 것이 있지만 그냥 그렇게 표현하면 “진짜 작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겨자씨’를 예로 들며 천국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로 비유한 것은 현실 속에서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해서 보통 사람들은 “천국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겨자씨, 겨자 나무에 비유될 만큼 보잘 것 없이 취급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정도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기에 이 비유는 정말 적절한 비유일 것입니다. 이 비유에는 또 하나의 정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 느껴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어느 순간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에게 임했고 우리가 깨닫고 믿게 되는 순간 이 나무는 믿음직하고 튼튼한 나무, 안전한 나무가 됩니다.
욥기 8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 세상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지만 이 나라는 창대한 나라, 위대한 나라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엄청나게 큰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보여줍니다. 땅에 심긴 겨자씨 한 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의 눈으로 찾을 수 없고 세상의 모든 감각으로 존재를 깨달을 수 없지만 믿음의 눈과 믿음의 귀를 가진 영적 감각을 소유한 하나님 백성은 어느 순간 너무나 크게 다가온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나라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던 유대 세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모습은 겨자씨처럼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이렇게 초라해 보이는 겨자씨가 자란 겨자나무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겨자나무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겨자나무의 근본적 상징 대상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겨자나무는 조그마한 참새가 앉을 수 있는 곳입니다. 능력이 뛰어나고 세상 가운데 군림하는 독수리 같은 새는 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과 같이 “세상에서 모든 권력과 재력과 명성을 누리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너무나 비대해진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겨자나무에 앉아 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쉬기에 겨자나무는 너무 초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겨자나무는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모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앉아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얇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비운 사람들입니다. 자기는 낮추고 자기를 포기한 자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완전히 낮아져서 비천함에 내려온 사람만이 겨자나무에 깃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겨자나무에 앉아 안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을 수 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영원한 안식처를 소유할 수 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감격하며 자신은 부인하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백성의 모습입니다. 또한 겨자씨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겸손과 낮아짐, 비움을 통해 참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되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를 통해 깨달은 참된 헌신, 참된 낮아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둘째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마태복음 13장 33절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누룩’으로 비유하십니다. 천국이 왜 누룩같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보이지 않는 중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누룩’이라고 쓰여진 것의 정체는 우리가 흔히 ‘효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밀가루 반죽에 섞여 있으면 밀가루가 부풀어 오르면서 빵을 만들 수 있게 만듭니다. 술을 만들 때도 곡식과 같이 넣어두면 당을 분해해서 탄산가스나 알코올을 생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이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룩’이 곡식에 들어가면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성경에서는 ‘누룩’이라는 단어가 쓰일 때는 교만이나 죄의 욕망,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대적하는 자들의 가르침속에서 부패하고 썩게 하는 요소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성경 속 ‘누룩’은 거의 부정적인 표현에 사용됩니다. 눅은쓰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부패와 타락’, ‘죄의 유혹’, ‘탐욕’등을 뜻할 때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천국을 ‘누룩’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음식물을 발효시키며 본질을 변화시키는 특징을 가진 ‘누룩’의 모습이 천국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누룩이 곡식에 들어가면 곡식 본연의 모습은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성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적은 양의 누룩이 곡식 가루 서 말을 완전히 정복하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놓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이 찾아온 인생은 삶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는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이며 변화의 능력을 가진 종교입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과격하고 관용이 부족한 사람 요한은 한 때는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을 불로 멸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인정사정없는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후에는 ‘사랑의 사도’로 불릴 만큼 사랑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돌로 쳐 죽이고 신앙인을 완전히 멸절시키기 위해 잔혹한 학대를 저질렀던 사울이라는 인물은 나중에 ‘바울’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방의 빛’, 이방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선교사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교회사에 등장하는 성 어거스틴, 성 프란시스같은 인물들은 방탕과 방황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마치 누룩의 발효처럼 인간의 삶을 놀랍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종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오시면 우리는 본질적인 의식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세상을 크게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밀가루 반죽에 누룩이 들어갔는 지 들어가지 않았는 지 처음에는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누룩이 들어간 밀가루는 엄청나게 큰 반죽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해 풍성한 빵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누룩이 들어간 빵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은 근본적으로 다른 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의 변화성, 누룩의 성장을 비유하시며 누룩의 장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겨자씨의 비유가 외적 성장을 가져오는 것으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누룩의 비유가 뜻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개인과 사회를 놀랍게 변화, 성장시키는 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 성화될 수 없고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야 우리가 변화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룩은 보이지 않는 듯 해도 내면에 들어가서 그 성질을 변화시키며 이전과는 다른 성질로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외면적으로는 보이시지 않지만 항상 활동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숙을 위해 누룩처럼 확실하게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국의 대문장가인 셰익스피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때마침 친구는 집에 없고 집안일을 책임지는 하인이 대신해서 그를 맞이해주었습니다. 하인은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이 돌아올 거라며 그를 거실로 안내하면서 따뜻한 홍차와 간단히 읽을 책을 내주었습니다. 작은 배려에 감동한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그 후 하던 일을 끝마치려는지 하인은 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참동안 주인이 돌아오지 않자 셰익스피어는 남의 집 거실에 혼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에 머쓱해졌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차를 한 잔 더 얻어 마시려고 주방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주방문을 연 순간 셰익스피어는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혼자 양탄자 밑을 청소하고 있는 하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양탄자 아래는 누가 일부러 들춰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더러운지 깨끗한 지를 알 수 없는 곳인데 그 양탄자 아래를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인은 누가 뒤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억지로 시킨 것 같지도 않은데 혼자 콧노래를 불러가며 양탄자 밑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부터 셰익스피어는 젊은 사람들로부터 “인생의 성공 비결이 무어냐?”, 혹은 “누구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항상 “혼자 있을 때에도 누가 지켜볼 때와 다름없이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슨 일에서나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변화 받은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우리의 삶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정말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면서 우리 주변의 사람에게도 변화되는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된 누룩의 역사로 온전한 변화를 경험하고 주변의 사람에게도 변화의 영향력을 끼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 셋째, 부름받은 택함받은 사람만 깨닫게 됩니다. 정해진 사람만 보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수많은 말씀을 모여있는 백성들에게 알려주시고 말씀을 통하셔서 하나님 나라와 구원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반 사람들이 잘 알아듣을 수 없는 “비유로 말씀을 주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국어과목을 공부하며 교과서 속의 작품분석을 베울 때 골치아픈 것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은유법’, ‘대유법’, ‘풍유법’이라고 불리는 “비유적 표현이 가리키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품의 작가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작가가 풀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작품을 연구했던 수 많은 제 3자가 그 내용을 연구하면서 시대적 상황, 개인적 환경, 여러 문맥등을 말하며 정확한 의미가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분명한 것은 연구가가 그렇게 말해도 작품에서 비유적 표현의 정확한 뜻은 작가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국어책에 나오는 작품들은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지면 그리고 좀 더 깊이 연구를 하면 비유에 등장한 단어들의 내면적 의미를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성경 속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하나님께서 풀어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비유로 말씀을 선포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백성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 지식은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도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려고 해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고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참 구원의 경험을 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고 제대로 알려주셔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석해 주실 때에만 비유로 말씀하신 그 의미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을 일깨워주시고 깨닫게 하셔야 우리가 완전히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두 앉히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세족식을 하시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발을 씻기는 일은 노예중에서도 가장 낮은 비천한 종이 주인 발을 씻겼습니다. 그러니, 어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완강히 반대하며 거절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세족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고 더불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께서 의미를 설명하시니 이젠 뭔가 깨달았을 것 같은데 세족의 귀한 의미를 여전히 완전하게 깨닫지 못한 베드로는 “그럼 머리도 감겨주시고 손도 씻겨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족식을 하시며 섬김의 의미를 보여주시는 지, 세족식의 보여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입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겨주시는 영적 의미를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 체험을 한 다음에야 세족식의 의미를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시골 노인들을 찾아가 “영생하는 약이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한 어르신이 “그게 사실이오?”라고 묻자 그 전도사님은 ‘그렇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어르신은 “그럼 빨리 그것을 내게 주시오. 나도 영생 좀 하게.”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전도사님은 성경 한 권을 가방에서 꺼내어 그 어르신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데 구약과 신약을 잡수시면 반드시 영생할 것입니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구약과 신약을 다 읽고도 영생하지 못하시면 제가 반드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약을 먹는 방법입니다. 보약처럼 푹 끓여서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어서 먹는 약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르신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훗날 그 어르신은 전도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며 신앙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머리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지식과 우리 지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읽어도 제대로 그 말씀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지식을 가지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제대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12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지식의 말씀을 알게 되는 것도 믿음이 생기고 병고치는 은사가 생기는 것도, 능력을 행하고 예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영을 분별하며 방언을 말하는 것도, 방언을 통역하는 것도, 모두 성령이 임하셔야 가능하고 우리 모든 삶 속의 신앙적인 부분들, 영적인 일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삶이 이뤄질 것인지 아는 것 또한 우리는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온전한 역사가 나타나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거울로 보는 것도 정말 또렷하게 볼 수 있는데 무슨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 하냐라고 하겠지만 초대교회 당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세상에서 쓰는 거울은 청동거울입니다. 금속을 닦아서 금속에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지금같이 제련이 잘된 금속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금속거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희미하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주님의 나라가 임하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에게 일어난 수많은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확연하게 알게 되겠습니까? 우리 지식으로는 제대로 깨달을 수 없고 오로지 주님 은혜와 주님 역사로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지식적 능력이나 부단한 지식탐구 노력보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임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우리가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말씀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임해서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세상속에서 영향력을 넓혀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어느 순간 갑자기 커버린 나무를 보듯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실 것이고 보이지 않던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앞에서 수 없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 재림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는 핍박과 환란을 이겨내고 모든 세상의 어려움을 견뎌낸 수 많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천국을 소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 백성은 성경 속에서 구원의 길을 깨닫고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만 믿고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겨자씨, 누룩같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에 영향을 받고 저와 여러분도 겨자씨같이, 누룩같이 믿음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우리 속에 넘쳐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성령님의 역사로 항상 말씀이 이해되고 말씀 속에서 큰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