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향기가 감미로울 수 밖에.
올레길을 걷다가 들길에서는 아카시아 꽃향기 내음을 맡고,
산길에서는 찔래꽃 향기로 몸이 상쾌해진다.
말씀묵상은 꽃향기를 몸으로 마시는 일과 같다.
박완서 소설가가 주일의 말씀을 묵상하고 쓴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을 다시 읽는다.
박완서는 이 책에서 요한복음 20:19-31을 가지고
<에미 마음, 여자 마음>이란 제목의 묵상글인데
한 여인이 예수님을 위해 부어드리는 향유의 마음을 생각한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식을 앞세운 에미는 밤에 편히 잠들지 못한다.
추운 날은 내 자식이 얼어붙은 딱딱한 땅속에서 추위에 떨 것 같아
따스운 잠자리가 오히려 가시방석처럼 고통스러워 잠 못 이룬다(내가 저자의 다른 책에서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것도 여인들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뵌 것도 여인이었다.
그랬을까.
성별에 따라 누굴 더 두둔하거나 충하하실 분이 아니다.
여인들이 먼저 갔으니까 기쁜 소식도 먼저 들은 건 당연하다.
왜 먼저 갔을까?
별로 좋은 데도 아닌 무덤에를 겁도 없이.
제자들도 무서워 문 닫고 모여 있는데.
밤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나 걱정이 되어
도저히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갔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것은 산 사람 사이에나 하는 일이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슬퍼만 하면 됐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걱정이 되어 도저히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그만인,
목석과 다름없는 시신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향유로 씻어드리고 싶어 갔을 것이다.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린 일은 여인이
예수님의 생전에도 행한 최고의 공경이요, 사랑의 표현이었다.
살아 계실 때와 똑같이 해드림으로써
살아 계실 때와 다름없이 기뻐하시리라 여인들은 믿었으리라.
아무리 막강한 죽음의 세력도 진리요 정의이자 사랑이신 주님을
아주 죽게 할 수는 없으리라는 여인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살아 계심을 가장 먼저 보고 듣고 느끼고 증언할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묵상: “베드로가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한복음 21:15).
*적용: 여인들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십자가의 길과 무덤에도 찾아갔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무엇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