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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개 이야기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1. 5. 0:15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개 이야기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진안군 백운면소재지 원촌에서 어린 시절 몇 년을 보낸 나에게 원촌은 갈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임실 17킬로미터라고 적힌 이정표가 섬광처럼 눈에 띄었고 그 순간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던 한 시절이, 대운이재를 넘어 임실로 걸어갔던 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고개다운 고개인 대운이재를 맨 처음 제대로 넘었던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였을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때 제일 부러웠던 것은 친구들이 입은 중학교 교복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그 아이들은 활기에 넘쳐 보였고 반대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은 까만 중학생 교복만 보고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곤 하였다.
그 무렵 우리 집안의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 말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쳐 한 번도 성공이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실패의 연속이었던 아버지를 오래전부터 믿지 못한 어머니는 옷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하였다. 임실 성수면과 관촌면 그리고 진안 성수면 일대를 돌아다니며 옷가지를 팔고 그 대신 쌀, 콩, 보리, 서숙이라 부르는 조 등을 받은 어머니는 백운에서 임실까지 그것들을 예닐곱 말씩 이고 걸어가서는 팔고는 하였다. 그런 이유로 나도 어머니의 길동무 또는 짐꾼이 되어 원촌에서 임실읍까지 17킬로미터를 몇 번이고 오갔던 것이다. 물론 버스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나이에 그것도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는데 나는 곡식 네댓 말을 무겁게 등에 지고 40리가 넘는 길을 걸어갔다. 어쩔 도리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때 어머니와 절충했던 것이 이른 새벽에 떠나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일찍 깨워달라고 하고는 잠이 들었지만 정작 아침 일찍 일어나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나야 한다는 중압감에 잠이 제대로 오기나 하는가. 이리저리 몸을 뒤채는 동안 새벽은 어김없이 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어서 일어나야지. 벌써 새벽닭이 울었단다.” 그래, 무심한 새벽닭은 ‘어서 일어나라’고 꼬리를 물며 울어대고, 그래도 못들은 척 누워 있으면 다시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가만히 문을 열고 나서면 하늘에 반짝이는 별무리들이 보였다.
주섬주섬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몇 수저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네 말쯤 되는 곡식을 멜빵을 해서 메면 어깨가 무지근하였다. 상상해보라, 유난히 작았던 열서너 살짜리 소년이 네댓 말의 곡식을 등에 지고 허리를 구부린 채 길을 걷는 모습을 말이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옛 시절 창고가 있었던 동창리(東倉里)를 지나 섬진강 최상류에 놓인 백운교를 건너 처음 만나는 오정마을에서 잠시 쉬었다. 샘이 다섯 개 있어 오정(五井)이라 부르는 그 마을에서 잠시 쉰 여력으로 길은 다시 이어진다.
이제 오르막이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대운마을 사이에 자리한 대운이재는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이고, 나보다 두세 말은 더 머리에 이고 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자꾸 가쁘게 들렸다. 나도 힘든지라 뭐라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언제쯤이면 이렇게 짐을 지고 이 고개를 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도무지 그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고갯마루를 넘어서 한참을 내려가면 대운마을에 닿았다.
지리산 회남재
『한국지명총람』에 “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 함”이라고 기록된 대운마을에 들어서자 인기척을 듣고 개들이 짖어댄다. 대운마을 아랫자락에 있는 매마우마을을 지나 수철리에 이른다. 어머니는 거기쯤에서 보리개떡을 내놓는다. 배가 고프면 짐을 지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새참으로 싸온 것이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시집살이 얘기를 늘어놓고 나는 그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만 지금 이 현실을 잊기 위해 어젯밤에 읽다 만 소설 속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바로 그 아랫마을이 수철리(水鐵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태조 이성계가 지리산에서 상이암으로 들어설 적에 만난 사람에게 “수천 리를 걸어왔다”고 해서 이름 붙은 마을을 지나 성수리에 이르면 날이 희붐하게 밝아왔다.
그곳에서도 임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때쯤이면 또래 친구들은 교복을 입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데, 이방인처럼 나는 어깨가 빠지게 짐을 메고 어머니의 뒤를 따라 장에 가고 있으니······. 그곳에서 임실읍 갈마리로 넘어가는 서낭댕이고개를 넘어서 갈마리를 거쳐 임실장에 닿으면 해는 중천에 뜨고 40리가 넘는 길을 등짐을 지고 걸어온 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어머니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고, 돌아갈 시간을 기다릴 때 눈부시게 떠 있는 햇살은 얼마나 나를 주눅 들게 하였던가.
그 몇 개월 뒤 진학을 못한 채 뒹굴뒹굴 놀고 있던 마을 친구 네 명과 함께 먼 대처로 나가 성공하겠다고 첫 번째 가출을 시도해서 걷고 또 걸어 맨 처음 넘었던 고개가 바로 대운이재였다. 왜냐하면 버스비도 아까웠고 그 고개를 넘어가면 임실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쓰라린 기억을 나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때 걸었던 그 기억에 힘입어선지 나의 여정은 지금도 그침이 없고, 그래서 가끔 보따리를 싸서 떠나고 또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일컬어 한 굽이 한 굽이 돌아가는 고개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돌아가다 보면 고갯마루에 닿게 되고 “후” 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뒤돌아 아스라이 펼쳐진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본 뒤 다시 내려가는 고갯길. 그 고개를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부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 「진도아리랑」에도 나오는 ‘고개’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嶺)’, ‘현(峴)’, ‘치(峙)’, ‘점(岾)’, ‘항(項)’ 등의 한자 이름과 함께 ‘고개’, ‘재’, ‘목’, ‘티’ 등 순우리말 이름이 있다. 영이란 지형상 산줄기가 낮아져 안부(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우묵한 부분)를 이루는 곳으로, 이런 곳에다 길을 내어 영의 이쪽과 저쪽이 통하는 것이다. 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산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영은 조령(鳥嶺), 차령(車嶺), 마천령(摩天領), 대관령(大關嶺) 등을 들 수 있다. 치는 고개, 재 등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관북 지방과 영남 지방에 이러한 이름이 많이 분포한다. 영남 지방에선 울치(蔚峙) 또는 율치(栗峙) 등 하나의 접미어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관북 지방에선 후치령(厚峙嶺), 주치령(走峙嶺) 등 고개를 의미하는 용어가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전라도에도 웅치, 판치 등의 고개가 있으며, 점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는데 문경새재(조령)를 그 지방 사람들은 억새풀고개, 즉 초점(草岾)이라고 불렀다. 고개는 일반적으로 분수계(分水界)를 이루는데, 고개의 양편에는 골짜기가 길게 발달하므로 예로부터 이러한 골짜기를 끼고 길이 발달하였다.
문경새재
고개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중 ‘점(岾)’은 전라도에서도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는데 문경새재(조령)를 그 지방 사람들은 억새풀고개, 즉 초점(草岾)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의 적유령이나 죽령처럼 유럽 알프스 산맥의 몽스니(Mont Cenis), 생베르나르(St. Bernard), 장크트고트하르트(St. Gothard), 심플론(Simplon), 브렌네르(Brenner) 등은 유럽 대륙의 북부와 남부를 연결해주는 이름난 고개들이다. 한편 인도 북부의 카이버 고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반도 사이의 주요 통로로, 고대로부터 민족의 이동과 문화 전파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적유령은 평안북도 희천시 종창면과 강계시 화경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이는 963미터다. 이 고개는 적유령산맥으로 분리된 청천강 유역과 자강고원을 연결하는 교통로인데, 강계는 목재와 산삼의 집산지이고 희천은 이름 높은 명주의 집산지다. 적유령 부근에 구현령(815미터), 온전령(963미터) 등 높은 고개가 있다. 한반도는 높은 산지의 대부분이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동쪽에 자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마고원과 장백정간 그리고 백두대간에 위치한 고개들은 대부분 높고 험하며, 서남부 지방의 고개들은 대부분 낮다.
개마고원은 평안도 동북부 지방에서 두만강 상류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고원인데, 동개마고원과 서개마고원으로 나눈다. 이름까지도 높은 고개임을 짐작게 하는 아득령(1479미터), 검산령(1127미터) 등이 있어 두 지역을 이어준다. 강계와 자성을 이어주던 신원령(1011미터), 강계와 희천을 잇던 사일령(467미터) 등의 고개도 있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나간 장백정간에는 부전령(1445미터),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황초령(1290미터), 후치령(1335미터), 함관령(1837미터) 등이 있다.
후치령은 함경도 북청군 이곡면과 풍산군 안산면 경계에 있는 고개인데, 예로부터 이 고개는 북청과 풍산, 중평장 및 혜산을 연결하여 관북의 중부 해안 지방과 개마고원의 내륙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경계에는 길주와 혜산 간 철도가 연결되는 남설령(2150미터)과 마천령(873미터), 허항령 등 높은 고개가 있다. 관서 지방에는 멸악산 부근에 자비령이 있는데 높지 않은 이 고개가 예로부터 알려진 것은 서울과 의주 간을 잇는 간선도로상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자비령에는 관방(關防)을 설치해 외적의 침입을 막았는데, 고려 후기 무신정권 때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경 군사를 이끌고 내려오다가 자비령의 절령관(岊嶺關)에서 관군에 패함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는 이곳 자비령 부근이 마치 『택리지』의 기록처럼 자세하게 나온다.
곡산 수안 방면에서 뻗어내려오는 큰 산령(山嶺)이 서흥 봉산을 지나서 황주 극성진(棘城鎭)에 이르러 끝나는데 서흥 쪽의 북방로는 절령(자비령)을 지나고 봉산 방면의 길은 동선령(洞仙嶺)으로 향하여 있었다. (······) 절령은 봉우리가 높고 험하며 골짜기가 깊어서 병마가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였으니 그야말로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막적(萬夫莫敵)의 고장이었다.
백두대간은 강원도 평강군 고삼면과 안변군 신고산면 경계에 자리한 추가령(752미터) 또는 죽가령을 지나 철령(685미터)에 이른다. 철령은 대관령과 함께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고개는 서울, 철원, 회양, 안변, 함흥으로 이어지던 북로(北路)의 중요한 길목이었으나 경원선 개통 이후 추가령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교통량이 감소하였다.
철령이라 산은 높아 칼끝과 같고
동해를 바라보니 정히 아득해
가을바람 두 귀밑에 불어오는데
말 몰고 오늘 아침 북방에 왔네
조선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정도전이 노래한 그 철령을 고려 후기의 문인이며 정치가인 가정(稼亭) 이곡은 『동유기(東遊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24일에 회양부(淮陽府)에 이르러 하루를 묵고, 26일에 철령관을 넘어 복령현(福靈縣)에서 잤다. 철령은 우리나라 동쪽의 요새로, 이른바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사람도 열 수 없다’는 곳이다. 그러므로 철령 동쪽 강릉의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 이르는 것이다.
대관령 성황사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에는 강원기념물로 지정된 성황사와 산신각이 있다. 대관령 성황사는 국사성황당이라고도 하며 범일국사를 모시고 있다.
백두대간은 도납령(661미터)과 기대령(824미터)을 지나고 강원도 회양군 안풍면 화천리와 통천군 벽양면 사이에 있는 추지령(645미터)을 지난다. 추지령은 북쪽의 자패령과 서쪽의 철령처럼 영서 지방과 영동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인데, 추지령 서쪽은 회양군으로 북한강 상류가 산지를 깊이 파고 동쪽은 백적산ㆍ고윤산 등의 험준한 산이 솟아 있다. 그곳에서 이어진 산 능선이 단발령(824미터)과 내무재령을 지나 옛 시절 진부원이 있던 진부령(529미터)에 이른다. 그 아랫자락에 미시령이 있는데, 고성군 토성면에 자리한 미시령은 미시파령으로도 불리며 속초에서 인제로 가는 고갯길이다. 이 고개는 고려 때 개척되었는데 너무 험준해 폐하여졌다가 조선 성종 24년에 다시 개척되었다. 미시령을 지난 백두대간은 한계령에 이른다.
대관령 옛길
백두대간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고 중요한 고개였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급증하였으나 후에 터널이 생기면서 한시름 놓게 되었다.
선자령 (1)
설악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선자령(1157미터)을 거쳐 대관령에 이르고 임계령, 죽치, 울치 그리고 성법령, 추령 등지로 이어지며 동서 교통로로 이용된다.
설악산국립공원 개원과 함께 교통량이 붐비기 시작한 한계령은 영서 지방 북부의 인제와 영동 지방 북부의 양양을 잇는 고개로 대관령(832미터) 다음으로 통행이 빈번한 고갯길이 되었다. 한계령은 높이 1004미터이며, 인제와 양양 간 국도가 통하는 곳이다,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하며, 영동ㆍ영서 지역의 분수령을 이루는 이 고갯길을 옛날에는 소동라령이라고 하였는데, 동해안 지역과 내륙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 한계령 부근에는 산적이 들끓어 해가 지면 고개를 넘지 말라는 뜻으로 한계령의 들머리인 양양군 서면 오가리의 길옆 바위에 ‘금표(禁標)’라는 글씨를 새겨두었다. 1971년 12월에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넓은 포장도로가 고개 위로 뚫려 내설악 및 외설악의 관광자원 개발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설악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선자령(1157미터)을 거쳐 대관령에 이르고 임계령, 죽치, 울치 그리고 성법령, 추령 등지로 이어지며 동서 교통로로 이용된다. 대관령 일대 백두대간의 서쪽 지방을 영서(嶺西)라 부르고 동쪽 지방을 영동(嶺東)이라 부르는 것은 대관령을 기준으로 삼아 붙여진 것이다.
선자령 (2)
대관령 북쪽에 솟아 있는 선자령은 백두대간의 주 능선에 자리한다. 산 이름에 ‘영(嶺)’ 자를 쓴 유래는 알 수 없다. 산이 평탄하여 겨울철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높다.
진안군 백운면 원촌은 동쪽으로 성수산, 서쪽으로 내동산, 남쪽으로 팔공산 등을 경계로 하는 곳이다. 동부는 소백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서부에는 섬진강의 최상류가 남북으로 흘러서 그 주변으로 넓은 충적지가 전개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개 이야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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