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파인 눈, 두터운 쌍커풀 라인, 맑고 큰 눈동자, 짙고 굵은 눈썹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띤 입술, 나를 본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온다. 그녀의 이름은 한강
한강 - 소년이 온다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린 그와의 만남. 하얗게 분칠을 하고 입술을 핑크빛으로 칠하고 길게 뻗은 속눈썹을 올린다. 보라색 꽃무늬가 새겨진 미니 원피스를 입고 한 손에는 안개꽃으로 가득 찬 꽃다발을 든다. 작은 가죽 가방을 옆으로 맨 채 조심스럽게 운동화를 신고 문을 나선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잔뜩 화려해진 그녀 자신을 보며 신나한다. 대학교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시민들의 함성과 총성이 울린다. 어, 뭐지? 당황한 그녀는 목을 길게 빼 기웃거린다. 어, 안되는데, 걔랑 만나야 하는데. 혹여나 그가 거기 있을까봐, 며칠 밤새워 기다린 그의 얼굴이 저 멀리서 울부짖고 있을까봐, 서둘러 뛰어간다. 발을 딛었던 그 광경은 참혹했다. 빨간 액체가 흘러나오고 익숙한 얼굴들이 울부짖던 가운데 저 멀리 그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허연 연기 속으로 뛰어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뒤가 숭숭하다. 어지럽다. 내 꽃다발이 공중에서 흩어지더니 땅에 떨어져 바스라진다. 마지막으로 보였던 건 뛰어가던 그의 모습
눈을 떠보니 난 공중에 떠있다. 내 손을 휘저어 봐도, 발을 굴러봐도 내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 위에 있던 까만 점도 보이지 않는다. 아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만 보일 뿐. 아직도 이곳은 처참하다. 길을 나가기만 하면 쉽고 흔하게 볼 수 있는것은 나무가 아닌 사람들의 시체며 문을 열면 나던 싱그러운 바람 냄새 대신 퀴퀴한 피 냄새 맑고 깨끗한 여름 하늘 대신에는 오랫동안 썩은 듯한 거무퀴퀴한 하늘이 전부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나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 이미 난 죽은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떠올릴수 있는 잔상은 흩날리던 꽃다발 그리고 그 위로 흩어지는 빨간 물 주변에서 들려오던 비명이 전부이다 하늘에서는 그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몸은 괜찮을지. 외국 개가 웃는 모습을 닮은 그의 미소는 여전한지 그렇게 생각한지 하루 이틀 저 멀리서 그가 온다, 아니 저것은 내가 알던 그가 아니다 소년이다. 소년은 점차 가까워지며 나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깊고 슬프며, 그 안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담겨 있다. 예전에 그 남자의 따뜻하고 밝았던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세상 모든 아픔을 짊어진 듯한 표정만 남아 있다. 그가 나를 향해 다가올 때, 나는 그가 더 이상 내가 기다리던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소년이 되어 온 비극의 상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