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남 3녀 중 장녀입니다. 부모님은 경제적 기반이 없어 사는 게 어려웠고 자주 다투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컸습니다. 그게 참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 상대자는 돈이나 권력이 없어도 그저 나를 편안하게 해 줄 사람, 나를 웃게 해 줄 사람이면 되었고, 그렇게 남편을 만났습니다. 친정에서는 문제만 생기면 제게 연락했습니다. 전화벨 소리도 듣기 싫었고 핸드폰에 '엄마'라는 단어만 떠도 숨이 막혔습니다. 또 무슨 일인가 불안했고, 전화받기가 두려웠습니다. 어린 자식이 있었지만 죽고 싶다는 마음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TV에서 정토회를 접하고, 2010년 9월 천일결사 백일기도에 입재했습니다. 이어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고, 경전대학에 진학할 무렵 경기도 광주 지역 도반이 함께 법회를 꾸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경기도 광주로 가서 활동했습니다. ‘내 업을 자식까지 물려주지 말고 내 대에서 끝내자.’라는 굳은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녁부 책임자를 맡으면서 퇴근을 집이 아닌 법당으로 했습니다. 일주일에 사나흘을 늦게 귀가하니 시아버님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저를 보셨고, 그로 인해 남편과 갈등이 커졌습니다. 그때 저는 수행자로 잘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정일사 정진 때 ‘겉으로 싸우지 않는다고 싸우지 않는 게 아니다. 마음속으로 싸우는 것도 싸우는 것이다.'라는 점검을 받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부모님처럼 살지 않겠다.’라며 수행을 했는데, 알고 보니 저 또한 부모님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매번 싸우는 부모님을 보면서 '아직도 저러고 사나?'라는 비난의 마음 밑에 나는 이렇게 잘하고 있다는 자만심이 있었습니다.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내 눈에 대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고 뭐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남편에게 고개가 숙여지고 겸손해졌습니다. 또한, 부모님을 좀 더 이해하는 마음을 낼 수 있었습니다.
아침기도 중에 저보다 어린 20대 부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 살면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어린 자식들을 잘 키워야 하는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 기도 방석이 다 젖었습니다. ‘부모님도 항상 불안하고 무서웠구나.’ 엄마, 아버지를 부모님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난치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대화는커녕 그림자처럼 대했던 아버지의 손을 처음 잡고 병원에 갔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원을 함께 다닌 8개월이 제겐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침기도의 돌이킴이 없었으면 영원히 아버지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처음 정토회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오프라인 시절로 일주일에 서너 번 법당에 갔습니다. 불교대학 수업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집에 들어가면 밤 11시가 다 되었습니다. 가족 중 남편의 반대가 가장 심했습니다. 남편은 법당에 불을 지르겠다고 화를 내기도 했고, 현관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일부러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어머니는 “왜 이렇게 늦게 다니니?”라며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절에 다닌다고 하니 집안을 위해 기도하러 다니는 줄 알고 저를 늘 지원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엄마는 저 사람한테 속고 있어요. 저 사람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해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시어머님은 “그 속에 우리도 있잖니?”라며 제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활동하다 보니 남편이 언제부터 ‘이 사람은 정토회 아니면 답이 없나 보다’ 싶었는지 마음을 조금씩 열었습니다. 제 앞에서는 "예전이랑 똑같다."라고 말하지만, 친구들에게는 “내 마누라지만 나는 마누라 존경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는 결혼 후 25년 동안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고, 두 분 장례까지 제가 다 마무리했습니다. 그 고마움 때문인지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동안은 정토회 활동을 마음껏 못했는데, 이제는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봐." 그런 남편이 고맙습니다. 지금은 남편의 지지에 힘입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마음의 잡초를 뽑고 가볍고 행복하게 살고자 오늘도 꾸준히 정진을 이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