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25/0827]LS네트웍스의 사외보 ‘보보담步步譚’
임실任實, 읍邑소재지라고 깔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깔끔한 카페가 있어 들렀다. 대개 재래시장 옆에 오래된 투박한 간판과 함께 다방茶房이 한두 곳 있지 않던가. 그런데 이름도 ‘마로니에 카페’로 신선했다. 아마도 인근 군부대(35사단) 장병들이 데이트할 때 애용할 듯싶었다. 그곳에서 놀라운 인쇄물을 발견했다.
금시초문 ‘보보담步步譚’이라는 이름의 계간잡지. 2011년 창간, 통권 37호에 이른다. LS네트웍스의 사외보이다. LS네트웍스는 2003년 LG에서 LS로 계열분리되었다고 한다. ‘활자중독에 걸린 나로선 역시 ‘눈이 보배’임을 거듭 느끼는 순간이다. CEO 구자열 회장이 편집회의를 주관하고 머리말격인 편집노트도 직접 쓴다는데 또 한번 놀랐다. 어디서든 누구나 책 안읽는 지금 세상에 돈만 무지막지하게 들어가고 돈 안되는 잡지를 2만부나 찍어 무료로 배포한다니 믿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잡지는 인문·교양서이자 종합지리백과서로도 손색이 없는,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한 생각 깊은 재벌회장의 의지가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할 일. LG가의 기업인들이 새로 보였다. 사회공헌치고 너무 훌륭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이를 말하는 것일 듯. 더구나 기업이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 만들겠다는 포부라지 않는가. 한 권 펴내는데 족히 1억은 들어가리라.
저 엄혹한 70년대 불세출의 언론인인 한창기님이 만든 ‘뿌리깊은 나무’의 재현같아서 너무 반가웠다. 그 좋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잡지를 전두환군부가 80년말 ‘씨알의 소리’와 함께 폐간시켰다. 말도 안되는 무지막지한 만행 그 자체였다. 우리것에 대한 사랑과 민족문화에 대한 싹이 그제서야 조금 틀 만했는데, 군홧발로 짓밟아버려 그때 얼마나 분개했던가. 몇 년 후 그래도 숨은 쉬어야겠기에 펴낸 게 ‘샘이 깊은 물’이라는 여성잡지였었다. 비록 ‘걸으면서 함께 나누는 편안한 이야기’라는 국적불명의 조어造語인 것같지만 ‘보보담步步譚’은 확실히 ‘뿌리깊은 나무’의 맥脈을 잇는 듯 보였다.
A4 크기의 240여쪽 곳곳에 실린 시원시원한 사진들, 하나같이 ‘작품’이었다. 투박한 듯한 편집디자인도 제법 트렌드에 맞추고, 이지누씨 등 필자들의 필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아, 이런 고마운 잡지가 있었구나. 기특하고 신통하고 고마웠다. 지나간 잡지들을 모두 살 수만 있다면? 비매품이라는데? 멤버십 회원들에게만 배송한다는데, 어떻게어떻게 구독신청을 했는데 과연 보내줄까? 구독을 원하는 이유를 적어야 했다. “경의로워서 절합니다. 고맙습니다. 구독을 간절히 원합니다”라고 적었다. 이 정도로 아부하면 보내주시겠지? 한눈에 홀딱 반한 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 권을 정독, 사장에게 졸라 5권을 빌렸다. 신분 확실한 사람이니 반납은 걱정말라며. 돌아오는 길, 이 잡지 읽을 생각에 행복했다.
카페에는 ‘보보담’ 과월호가 14권 있었다. 5일장 때마다 찾아 아메리카노도 한잔 하면서 모두 빌려 읽으리라. 집에 돌아와 검색을 했다. www.lsnetworks.com ‘사이보홍보실’ 코너에서 지나간 잡지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마치 부자富者가 된 듯했다. 2004년경 구독을 신청하며 마니아가 된 월간잡지 ‘전라도닷컴’이후 최대의 ‘수확’이었다. ‘전라도닷컴’은 오직 전라도의 자연·문화·사람만을 다루지만, 여기에서 ‘전라도’는 ‘팔도’로 대체해도 문제가 없다. 나의 과문의 소치를 탓했다. 내가 꼭 만들어보고 싶은 잡지가 바로 이런 잡지였었거늘. CEO가 되려면 최소 이 정도는 되어야 하거늘. 세상은 어찌 그리 무식한 졸부와 사욕으로만 가득찬 재벌들이 많은지, 모를 일이다. 한 권 한 권 읽기는 사실 벅차지만,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 새벽에도 나는 보보담을 읽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폐간이 되면 안되는 잡지가 하나쯤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이 살맛난다는 게 아닐까. 강추!
첫댓글 글쟁이 친구는 로또에 당첨된것 마냥
순간의 행복을 가졌겠네.
제눈에 안경이라는 말을 여기에 붙여도 될까?
우리같은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쳤을텐데
친구는 그냥 지나치지못하고 기어이 보물을
찾았구만.
친구의 허허 미소짓는 모습을 떠올리며 태풍이 지나는 아침을 보냅니다
좋은 잡지책이 밀려나는 시대가 아쉬운게지.
그래도 뜻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라.
우연히 발견한 보석이 주는 뿌듯함을 알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