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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탈린그라드:최후의 전투 ]
이 영화는 독일 거장 요셉 빌스마이어의 독일 패전 50주년 추모작입니다. 영웅주의의 불합리성 속에 생존과 자기 보호를 위해 몸부림치는 전쟁의 부조리를 다룬 작품으로 독일의 시각에서 2차 대전을 조명한 영화입니다.
<특전U보트>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만드는 독일군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많은 우려가 있었으나 작품 자체는 엄청난 완성도와 깊이를 자랑하는 반전주의 영화였다는 평이었습니다.
1993년 통일독일이 당시로써는 대단한 제작비(한화 120억원)을 들여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참혹한 전투였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이전 미국영화에서 묘사되던 악하고 맨날 얻어 터지던 이미지의 독일 병사들이 아닌 생존을 위해 싸우고, 전쟁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보통병사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최후의 전투>는 독일인 특유의 극사실적 음울함과 반전 메시지가 영화 속에 내재되고 있습니다. 전투장면에서도 영웅적 행동보다 병사의 삶에 대한 애착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 독일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업보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한가한 휴가시간을 보내고 있던 한스 육군 공병소위가 어느 한 소대의 소대장을 맡고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파견되면서 겪는 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눈 덮인 스탈린그라드에서 이들이 겪는 처절한 전투의 참상들을 통해 전쟁의 끔찍함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포위당한 독일군이 피폐해 끝장나는 전투였던 만큼 영화의 결말조차 꿈도 희망도 없는 새드 엔딩입니다.적국이었던 소련의 후예인 러시아에서 열린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도 나치 독일군 미화가 아닌 전쟁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끔찍한 모습이 꽤 통했던 듯. 독일에선 500만이 넘는 관객이 보며 흥행도 성공했습니다.
* 꿀맛같은 휴가가 끝나고 스탈린그라드로...
실제로는 독일군 참전자들로부터 역사 왜곡을 저질렀다고 비판도 받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수송기를 고급장교들이 계급을 앞세워 자기들만 타고 튄 걸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미리 선별된 유능한 장교들을 태우기 위해 보낸 것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부상병 한 명이라도 더 태울려고 노력했었다는데 영화에선 이를 왜곡했다는 겁니다. 그 외에도 헌병들이 기관단총을 쏘아대면서 간신히 군기를 유지하는 막장상황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영화처럼 비행장에 그렇게 몰러와 서로 비행기에 오르려고 총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일 자체가 없었다고...
게다가, 악질 헌병대위가 식량을 창고에 쌓아두고서 혼자 독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장 장군들도 식량이 없어서 쫄쫄 굶는 판에 이런 짓을 하면 바로 사형이라는 거죠. 이래서 한편으론 그냥 독일군을 까기 위해 만든 영화란 비아냥을 듣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악에 복받힌 비츨란트 소위가 소대원들에게 '너흰 탈영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도 논란이 되었는데, 이는 정상적인 장교가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게 당시 참전군인들의 이야기 입니다. 영화 자체는 수작이라 불리지만 실제론 많이 현실과 다르다는 점을 유의하면서 관람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 간략한 줄거리 ]
1942년 늦은 여름, 제2차 세계대전이 네 번째 해를 맞이했을 때, 히틀러의 군대는 유럽 대부분과 북아프리카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 번째 러시아 공격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목표는 카스피 해와 코카서스 유전. 북아프리카에서 큰 공을 세운 제6군은 이탈리아에서 짧은 휴가를 마치고 파울루스 장군의 지휘 아래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합니다.
그해 늦은 가을, 러시아의 스탈린그라드 전장으로 배치되어 가는 화물 열차 안에서 두 독일군이 내기를 합니다. 한 사람은 명예를 존중하는 귀족 출신 장교 비츨란드(토마스 크르츠만 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일급 철십자 훈장을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거칠고 무모한 성격의 롤로입니다.
이들은 ''누가 살아 돌아올 것인가''의 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선에 도달하자마자 한스와 롤로 그리고 제게(세바스찬 루돌프 분), 프릿츠(도미니끄 호로비츠 분) 등의 특수부대원들은 격렬한 포화로 인해 시야조차 보이지 않는 전투라는 살육장으로 투입됩니다.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전투 중 한스 일행은 부상병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헌병대에 체포돼 항명이라는 죄목으로 러시아 포로와 함께 지뢰 제거반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성탄절 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온통 굶주려 있었으며 살을 여미는 듯한 러시아의 혹한으로 인해 죽은 병사들의 시체는 뻣뻣한 목재처럼 길가에 쌓여있는 지옥과 같았습니다.
지뢰 제거반에서 풀려난 특공대원들에게 헌병대장 할러(디터 오크라스 분)는 다시 그들에게 러시아 시민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다시 진지로 돌아온 그들은 자신들을 지뢰 제거반으로 보냈던 헌병대장 할러가 식량으로 가득찬 벙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사살해 버립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겁한 모습에 회의를 느낀 제게는 결국 자살을 하고 한스와 롤로는 그들의 위안부였던 러시아 여군 포로 이리나(다나 보로프 분)에 의해 탈출을 향한 장도에 오릅니다. 롤로는 한스와 헤어지면서 표정없는 넋두리를 뇌까립니다.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내기였어." 결국은 모두 스탈린그라드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의 도시’라는 뜻으로, 모스크바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900킬로 떨어진 볼가강변을 따라 형성된 긴 띠 모양의 도시입니다. 현재는 볼고그라드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어 아무 것도 주목을 끌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소도시지만 1940년대 초반 당시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는 한마디로 사회주의 혁명이 가져온 빛나는 업적의 표본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1917년 공산혁명 당시까지만 해도 이곳은 17세기경에 세워진 군사요새의 이름을 따서 ‘차리친’이라 불리운 작은 촌락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은 이곳에서 공산당 적군을 지휘하여 백군의 코사크 기병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운바 있습니다.
* 오른편 볼가강가의 스탈린그라드
그 후 권좌에 오른 스탈린은 이 작은 시골마을을 완전히 새로운 계획도시로 건설하려는 작업에 착수하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도시에다 자신의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청춘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가 마침내 남부러시아 최대의 격전장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1942년 8월 하순
러시아의 대초원은 한여름의 태양 아래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파울루스 대장이 지휘하는 독일 제6군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평화로운 기분으로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25만명으로 구성된 제6군의 대병력은 그다지 서두르는 기색조차 없이 전진을 계속했고 이들을 괴롭히는 유일한 적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선도전차들이 하늘 가득히 피워올린 흙먼지 뿐이었습니다.
주인을 잃고 저절로 익어가는 수박밭을 발견한 병사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남부독일 농촌 출신의 병사들 중에는 전쟁이 끝나면 이 기름진 땅에 그대로 정착하여 농사를 짓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피력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이미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폭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공군의 슈투카 폭격기들이 승리의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스쳐 지나갔고, 그때마다 병사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환호를 울리며 손을 흔들어 댔습니다.
<강철처럼 단련된 젊은 도시>
피할 수 없는 일대 격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스탈린그라드 지구 사령관 예레멘코 중장은 튼튼한 체격을 가진 다부진 사나이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극동지역에서 만주 국경수비대를 지휘하고 있던 그는 1939년에 있었던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동무의 상처는 이제 다 나은 것으로 하세"라는 스탈린의 한마디에 이 스탈린그라드로 날아온 것입니다.
예레멘코 장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레멘코와 호흡을 밎추게 된 정치위원이 바로 그 유명한 니키타 흐르쇼프였습니다.
* 예레멘코
흐르쇼프는 훗날 소련 수상이 되어 자신을 그토록 좋아했던 스탈린을 비판하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주도했고, 불처럼 격정적인 성격과 함께 소련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흐르쇼프는 그 당시에도 소련군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위원 중의 한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마디로 아주 죽이 잘 마는 컴비였습니다.
* 슈투카 폭격기
독일군의 공격은 폭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불길의 세례는 며칠 동안 계속되면서 스탈린그라드 도시 잔해는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해갔습니다. 견디다 못한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들이 모두 볼가강에 뛰어들어 동쪽 기슭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헤엄쳐가는 광경을 본 어느 소련군 병사는 자신의 일기 속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제 스탈린그라드는 짐승조차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버티어 낼 것이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그야말로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도도한 강물처럼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몰려드는 독일군의 최선봉대는 제16 기갑사단으로, 그 지휘관은 1차대전에서 한 쪽 팔을 잃은 명장 중의 명장이며, 부하들로부터 "한스와 함께라면 지옥도 두렵지 않다."고 할 만큼 신뢰를 얻고 있던 한스 후베 소장이었습니다. 전차부대는 도시의 최북단에 자리잡은 트랙터 공장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최선두 전차가 공장으로부터 1킬로 남짓한 거리까지 육박했을 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소련군의 포격은 가히 필사적이었습니다. 쌍안경으로 적정을 살피던 후베장군은 더욱 놀라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내리쬐는 태양빛에 강철판의 번뜩이는 금속광택이 그대로인 신품 T34 전차들이 속속 소련군의 방어선으로 집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가공할 폭격 속에서도 트랙터 공장의 컨베이어 라인은 계속해서 신품 전차를 토해내고 있었고, 그 공장의 노동자들이 미처 페인트칠조차 하지 못한 신품 전차를 몰고 전장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8월 25일 후베의 제16기갑사단은 소련 전차와 마구 뒤섞이면서 포화를 교환하기를 사흘, 도리어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후베는 포위망을 뚫고 본대와 합류하려고 했으나 이 때 날아온 히틀러의 전문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현 진지를 사수하라" 주력부대를 너무 앞질러 나간 것이 실수였고 이로써 독일의 선봉 전차부대는 섬멸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후베의 제16기갑사단이 이렇게 난관에 봉착해 있던 사흘 동안 제6군의 주력부대는 아직도 스탈린그라드에서 80킬로나 떨어진 초원지대에서 꾸물대고 있었습니다. 제6군을 지휘하고 있는 파울루스 대장은 스탈린그라드의 공략을 개시하는 필요한 가장 적절한 타이밍과 또 그 경우에 텅 비어버리게 되는 도시 북익에 대한 대책을 연구한답시고 끙끙거리며 황금같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 버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줄곧 참모직책에만 종사해 온 사람다운 치밀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요컨대 그는 야전지휘관의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과감함과 결단력이 결여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 추이코프의 등장 >
바로 이 무렵, 소련군에는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지휘관이 등장합니다. 9월 12일, 예레멘코 장군은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공포와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것을 완곡하게 건의해 온 제62군단장 로마틴 중장을 해임하고 새로운 지휘관을 불러들이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이었습니다.
* 추이코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그 출신성분에 딱 어울리는 용모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구김살 투성이의 너절한 군복을 걸치고 다니는 소탈한 성격으로 인해 종종 말단 졸병으로 오해받기도 하는 인물이었지만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가슴 속에 불을 간직한 사나이였던 것입니다.
< 시가전의 시작 >
추이코프가 새로운 지휘관으로 착임한 바로 그 이튿날, 치열한 포병의 지원사격을 업고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 제6군의 주력이 마침내 스탈린그라드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추이코프는 이때부터 아주 맹랑하고 독창적인 전투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시가전이야말로 그의 전문분야였고 그는 자신의 휘하부대를 모두 10명 안쪽의 소부대로 잘게 분산시켰습니다.
돌격대라 불리운 이 소부대들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기 위해 군화 위에 두터운 헝겊을 감싸고 기관단총과 수류탄, 그리고 폐허를 파헤치기도 하고 육탄전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는 소형 곡괭이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 스탈린그라드
소련군 돌격대 병사들은 스탈린그라드 시내 지리에 익숙하다는 잇점을 충분히 살려 주로 야음을 틈타 이동했고 특히 골목길과 지하 하수도, 건물과 지붕과 다락방을 이용하여 시가지의 이 불럭에서 저 블록으로 이동하는 기술이 뛰어났습니다.
물론 이처럼 잘게 찢어 시내 요소요소에 흩뿌려버린 이들 돌격대를 조직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수단은 전혀 없습니다. 불과 10명 내외의 돌격대는 순전히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적개심과 스스로의 상황판단에 따라 흡사 패싸움과도 같은 비슷한 전투를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추이코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가전에서는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스스로 지휘관이 되어야 한다.”
독일군이 지금까지 자신들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묘한 전투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루 온종일 걸려서 하나의 골목길을 청소하고 나면 이튿날 아침에는 어제 지나온 바로 그 위치에서 기관총탄이 날아왔다. 그 수수께끼의 해답은 간단했다. 밤새 이반(소련 병사들을 일컬음)들이 야음을 틈타 지하 하수도와 건물의 대들보나 지붕을 타고 반대편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파괴된 건물의 다락방, 무너진 벽돌더미는 모두 이반들의 은신처로 변했다.”
전투가 이처럼 게릴라전과 같은 양상을 띠어가면서 독일군의 빛나는 장기인 집중공격과 팀웍의 우세는 자연히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폐허를 짓밟고 간신히 접근한 독일전차가 소련군의 거점에다 포탄을 쏟아 넣어 분쇄하고 나면 어김없이 그 다음 블럭에서는 폐허 속에 교묘하게 매복하여 전차의 출현 예상지점에다 조준을 맞춰놓고 있던 소련군 대전차포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독일군 병사들은 “이반 놈들이 교활하고 더러운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지만, 원래 전쟁은 반칙이란 게 없는 게임입니다. 독일군은 이런 스탈린그라드의 시가전을 ‘쥐떼들의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은 소수의 병사들이 폐허 속을 넘나들며 기습을 가하고 사라지는 이런 전투의 양상을 한마디로 잘 압축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이런 분전에도 불구하고 워낙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향해 한발 한발 접근해 왔고 특히 고대 타타르인들의 공동묘지이며 시내전체를 한눈에 관측할 수 있는 마마예프 언덕은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투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추이코프는 독일 전차가 자신의 지휘소에서 불과 700미터 남짓까지 다가와 주포를 쏘아대는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마치 외줄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서커스단의 광대처럼 몇가지 곡예를 동시에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19대의 전차를 동원하여 볼가강을 향해 전진하는 독일 전차대를 저지하는 한편, 볼가강 서쪽 언덕의 선착장까지 굳세게 틀어쥐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미 독일군이 시내까지 진출했으므로 스탈린그라드의 운명은 순전히 볼가강 건너편 언덕에 대기하고 있는 증원 병력의 성공적인 도하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볼가강 건너편으로부터 소연방 영웅칭호를 가지고 있는 맹장 로딤체프 소장이 이끄는 소련군 친위대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한 추이코프를 구하려고 필사적인 도하에 성공했습니다.
9월 16일, 로딤체프가 이끄는 친위사단이 마마예프 언덕을 탈환하고 그곳에다 참호를 파고 장기전에 대비했습니다(그 후에도 이 언덕은 몇 번인가 주인이 바뀝니다). 스탈린그라드 시내 중심부는 어느 쪽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혼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골목길 하나를 두고 실탄이 떨어진 양군 병사들은 서로 벽돌조각을 집어던지는 웃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고, 시가 전체가 완전히 벽돌더미로 변하는 바람에 기동이 어려워진 전차보다는 보병들의 야전삽과 곡괭이, 대검이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로딤체프가 이끄는 친위사단의 분전에 힘입어 파국 직전까지 내몰렸던 전황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0월 초순이 되었음에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피해도 이제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시내 중심지와 마마예프 고지, 그리고 붉은 10월 제강공장, 바리케이트 공장 등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 북부에서는 이미 주인이 수십 차례나 뒤바뀌는 혈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점차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파울루스와는 달리 추이코프 장군은 점점 더 느긋한 기색이었습니다. 이대로 더 기온이 내려가면 마침내 볼가강이 얼어붙을 것이고 그러면 그 얼음 위를 통해 스탈린그라드를 구원해줄 증원부대와 보급품을 훨씬 더 수월하게 조달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스탈린그라드가 러시아 남부에 위치하고 있어 그 시일이 늦어진다는 점이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이 압도적인 독일군에 맞서서 5개월 동안이나 분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그 지형적 요인에 힘입은 바 큽니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연안을 따라 건설된 도시이고, 이처럼 강을 등지고 있다는 것은 병법에서 말하는 배수의 진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수비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 밖에 없는 형세인 동시에 공격군으로서는 완벽한 4면 포위망을 형성할 수 없다는 약점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열려있는 한쪽 방향, 즉 폭 1마일의 볼가강을 통해 소련군은 새로운 병력과 물자를 계속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속되는 독일군의 공습 때문에 투입되는 병력이나 보급물자는 40%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볼가강의 건너편 언덕에서 승선을 기다리고 있던 한 소련군 병사는 그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라보면 스탈린그라드 시가는 온통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는 거대한 폐허의 더미일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독일 파시스트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수많은 전우들이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내가 과연 그들만큼 용감하게 싸울 수 있을까?”
* 영화에서...
그러나 이 병사도 간신히 볼가강을 건너 전투에 돌입하게 되면 그 불지옥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본능적으로 익혔고 사흘만 지나면 시가전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는 유능한 전사로 탈바꿈 되어 갔습니다. "스탈린그라드와 같은 격전 속에서의 일주일은 평소 1년간의 특수훈련과 맞먹는다.“ 추이코프 중장의 이런 말은 조금도 과장이 없는 진실이었습니다.
이렇게 스탈린그라드가 다급한 비명을 올리고 있던 그 시간, 스탈린은 깊고 음침한 크레믈린 궁의 한 구석에서 이 수세를 반전시키는 막판 뒤집기의 묘수를 짜내는데 골몰했습니다. 그가 전폭적으로 신임하고 있던 주코프와 바실리예프스키 두 장군이 다듬어낸 작전계획의 전모는 단순히 스탈린그라드르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다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 영화에서...
우선 극비리에 최대한의 병력을 집결시켜 볼가강과 돈강 사이에 있는 주축군(독일, 항가리, 루마니아, 이탈리아군의 혼합군)의 북익과 남익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현재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고자 혈안이 되고 있는 독일 제6군을 역포위해서 궤멸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탈린은 크게 만족해서 이 작전에다 전쟁의 신을 뜻하는 천왕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즉시 작전개시를 명령했습니다.
* 영화에서...
11월 19일 새벽
스탈린그라드의 폐허 속의 양군 병사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은은한 포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언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병사들이 들은 포성은 바로 이 천왕성 작전의 개시를 알리는 제1탄이었고, 이 포격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은 제6군의 북익을 담당하고 있던 루마니아군이었습니다.
원체 조직이 엉성한데다 장비조차 빈약하고 게다가 이 멀고먼 러시아 땅까지 와서 독일을 위해 죽어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던 루마니아군은 단숨에 콩 튀듯 흩어졌습니다. 3,500문에 달하는 대포의 일제포격에 이어 이른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소련군 보병부대가 함성을 지르며 돌격을 개시했습니다.
순식간에 루마니아군의 전면에 80킬로에 달하는 돌파구가 뚫렸고, 소련군의 T34 전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그 속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11월 22일, 남하를 계속하던 소련군은 맞은편에서 휘날리는 눈보라를 뚫고 달려오는 전차의 대열을 발견했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오던 제51군의 선도 전차대였습니다. 양쪽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 나가 얼싸안았습니다. 독일 제6군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거대한 포위망의 양쪽 이빨이 꽉 맞물린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스탈린그라드에 갇힌 독일 제6군을 어떻게 요리하느냐만 남은 것입니다.
* 영화에서...
파울루스 역시 이 소련군의 역공세가 단단히 올가미가 되어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최악의 사태를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소련군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스탈린그라드에서 발을 빼어 뒤로 후퇴할 것을 검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아버린 것은 히틀러의 전문 한 장이었습니다.
* 파울루스, 그는 투항 후 소련군의 대독일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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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군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현 위치를 고수하라. 한발도 물러나면 안된다.” 파울루스는 감히 히틀러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제6군과 파울루스의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파울루스는 다시한번 더 철수 요청을 하였으나 히틀러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요청을 기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현 전선을 사수하라. 필요한 보급품은 충분할 만큼 공수해 줄 것이다.”
* 영화에서...
공수? 공수라니? 고위 지휘관들은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25만명의 병력을 먹여 살리자면 최소한 600톤의 물자가 필요합니다. 러시아 전선에 배치된 항공기를 모두 긁어 모은다 하더라도 하루 60톤의 물자를 실어 나르기에는 태부족이고 더군다나 비행장도 몇 개 안되었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이때 ‘제국 원수’라는 직함을 갖고 거들먹거리던 공군 사령관 괴링이 나섰습니다. “ 총통 각하, 걱정 마십시오. 저희 공군이 그 일을 책임지겠습니다. 히틀러는 대만족이었다. ” 자, 봐라! 제국원수의 약속이다!“ 히틀러의 독선과 괴링의 허풍 앞에서는 아무도 이견을 달 수가 없었습니다.
* 영화에서...
12월 9일부터 1일 평균 공수량이 필요량의 20%에도 못 미치는 70톤으로 떨어졌습니다. 괴링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음이 분명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던 제6군에서는 최초의 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처참한 종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절대절명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나선 사람이 흑해 연안의 세바스토폴을 함락시켰던 영웅-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였습니다. 꽉 조이고 있는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제6군을 구출해내라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현지로 떠나는 만슈타인 원수에게 히틀러의 명령은 더욱 걸작이었습니다.
* 만슈타인
“그리고 소련군의 반격을 분쇄하고 나면 이전에 점령했던 지역까지 탈환할 것...어쩌구 저쩌구” 기가 막힌 만슈타인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 글쎄...내 이 두손으로 제6군을 땅속에 묻어주고 돌아올 수나 있었으면 좋겠군...”
천신만고 끝에 파파라는 애정어린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는 호트 대장의 전차부대가 눈보라와 소련군 전차대의 저항을 무릅쓰고 파울루스의 제6군의 탈출로를 개척하고 있을 즈음 정작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의 탈출 준비를 전혀 꿈도 꾸지 않고 있었습니다.
만슈타인은 자신의 정보참모 아이스만 소령을 파울루스의 포위망 안으로 들여보내기로 했습니다. 간신히 날아오른 정찰기가 대공포화를 뚫고 파울루스의 지휘소에 도착했고 아이스만 소령은 파울루스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즉시 탈출을 개시하지 않으면 저희가 애써 개척해 놓은 돌파구는 곧 다시 봉쇄되고 맙니다.” 하지만 파울루스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한발도 움직이지 말라는 총통의 명령이 있었다네. 보급품만 제대로 보내준다면 우리는 봄이 올때까지 여기서 버티어 보겠네.”
이렇게 해서 만슈타인의 구출작전도 실패로 돌아갔고 히틀러의 독선과 파울루스의 우유부단함에 희생된 독일 제6군의 병사들은 파국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1942년의 크리스마스가 찾아왔지만 이 축복받은 밤에도 1,280명의 병사들이 굶어죽었습니다. 영하의 혹한 속에서도 이상하게 발진티프스가 창궐했고, 이 때문에 수천명의 병사들이 또 죽었습니다. 또 동상으로 손가락, 발가락을 잃은 장병은 절반에 달했고, 낙하산으로 드문드문 투하된 보급품마저 끊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1월 30일, 파울루스 원수를 육군 원수로 진급시킨다는 전문이 스탈린그라드로 날아왔습니다. 히틀러의 의도는 뻔했습니다. 독일 육군사 전체를 통털어 자결한 원수는 있어도 항복한 원수는 그 전례가 없었습니다. 그는 파울루스가 자결함으로써 독일 육군의 명예를 지켜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오후, 제6군 사령부로부터 날아온 최후의 보고 전문이 베를린에 도착했습니다.
"소련군이 문 밖까지 다가왔다. 이 교신이 끝나면 무전기를 파괴할 것임. 이것이 최후의 보고임."
* 항복하는 파울루스
그리고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기대를 배신했습니다. 이미 쇠약해지고 병까지 들어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그는 자결하지 않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대독일 육군의 명예를 더럽힌 배신자를 성토하며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그로부터 48시간 이내에 굶주리고 지친 91,000명의 독일 장병들이 속속 투항했습니다. 그것이 25만을 헤아리고 있던 제6군의 생존자 전부였고 그나마 부상과 동상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히틀러의 무지막지한 독선, 괴링의 허풍, 그리고 파울루스의 우유부단으로 독일군의 완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정확한 인적 피해는 대략 독일군이 30만, 루마니아군 20만, 이탈리아군 13만, 항가리군 12만명이 죽거나 불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소련군도 약 70만명의 병력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한 도시를 둘러싸고 150만 명이라는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야말로 독소전쟁이 개전된 이래 처음으로 거둔 소련군의 대승리이며, 앞으로도 2년 반 동안이나 더 계속될 이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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