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타 도브의 ‘어머니는 일하러 가신다네’
나는 어머니에게 옷과 관련한 수많은 기술을 배우며 자랐다. 다림질하는 방법, 내 옷을 직접 수선하고 바느질하는 방법 같은 것------. 어머니는 우선 손수건, 그 다음으로 베겟잇 다림질부터 가르쳤다. 내가 열에 강한 평평한 침대보 다림질을 터득하자 어머니는 주름치마와 합성섬유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내가 정복한 최정상은 바로 소매였다. 그 다음은 관련된 기술이었다. 떨어진 단추 달기, 옷단에 표시하기, 곧 만들 옷(서클 서커트, 스프링코트, 피프소매 불라우스의 피나포드레스)에 알맞은 직물 고르기, 그 다음은 지하실에 있는 탁구대(아버지가 만든 규격 사이즈)에다 옷본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뒤이어 재단하고 핀으로 고정하기, 그리고(드디어!) 간정히 기다리던 싱어 재봉틀의 신비를 경험하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나의 형제 자매들의 옷차림이 언제나 훌륭했던 것은 어머니의 기적 같은 작업 성과였다. 어머니는 낡은 코트 안감으로 부활절 드레스를 만드는 요술을 부리는가 하면, 코트를 자그마한 블레이져의 조끼로 나누어서 재탄생시켰다. 나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단순한 스타일에다 내 나름으로 마음껏 변화를 줄 수 있었다.(핫펜츠와 네루 스타일 칼라를 단 조끼까지) 이렇게 만든 옷들에 대해서 엄청 뿌둣함을 느꼈다. 친구들은 내가 그 옷을 어딘가에서, 디트로이트처럼 이국적인 곳에서 산 줄 알았다.
나의 어머니 엘비라 엘리자베스 도브는 1924년 오하이오 주 에그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노동자였다. 빈곤한 남부 시골 지역에 살던 살던 사람들이 북부로 와서 오대호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었다. 나의 외조부님들도 바로 그런 꿈을 꾸고 북부로 온 노동자였다. 그들은 식탁에 음식물을 올리고, 몸에는 무엇이라도 걸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큰 꿈이었다. 열심히 일만 하면서 후손들이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이, 그러나 자녀들을 잘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 하지도 않았다. 그냥 현실일 뿐이었다. 그들 나름으로는 괜찮은 삶을 산 것이었다.
사 남매 중의 맏이인 어머니는 공교육을 받았다. 두 번 월반한 후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열여섯 나이에 하워드 대학교에 전액 장학금으로 진학을 허가받았다. 자신의 능력을 놀라우리만치 일찍 꽃 피웠지만, 어머니의 재능은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 범죄가 만연하고 있는 수도의 길 한 복판에서 열여섯 소녀가 혼자서 제 갈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다른 면에서는 다정하고 마음이 넓었지만 맏딸에게 험한 일이 생길까 두려워 하였다. 어머니는 너무 어렸고, 게다가 여자였다. 엘비라는 장학금을 포기해야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고 2학년 이었다. 어머니의 모험이 좌절되었던 바로 그 나이였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조부모님은 어머니가 그토록 특별한 기회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최소한 어머니는 인종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인물이 될 수 있었을텐데! 나의 독선적인 십대의 머리로는 어머닉라 경제적 생존을 위해 의지할 수밖에 없던, 집에서 배운 기술(실업학교의 학비 때문에 재봉사 일을 했는데 실업학교 역시 다음 단계로 오르는 대 팔요한 비서 업무 능력을 얻고자 거친 과정이엇다.)조차 왠지 더럽혀진 음성으로 내가 뭔가를 상기시켜 주는 어머니의 보조개를 보고 있으려니 어머니는 내가 당황할 정도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애크린을 떠나 워신턴 DC로 갔더라면 이 까무잡잡한 어여쁜 소녀는 나의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지성미에 마음을 홀딱 뻬앗긴 데다 탁구로도 코가 납작해졌을 그 남자를------.
나는 70년 대 초반에 싹을 틔우기 시작한 페미니스트로서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나는 어머니가 잃어버린 기회가 낳은 산물이었다. 나와 같은 인종이 겪는 고군분투의 나의 조부모가 처했던 하층민의 삶과 성별의 속박을 넘어서는 끊임없는 도전의 여정에서 사다리의 다음 칸을 오르는 것은 이제 내가 할 차례였다. ------. 나는 작가가 되어서 이 도전을 망칠 수는 없었겠지. 그렇지? 그렇지?
* 리타 로브는 1987년에 시 부분에서 플리처 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주는 국가예술훈장을 받았다. 버지니아 대학교의 영어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