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추어탕
손 원
가을은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 철이다. 살이 오르고 뼈까지 부드러운 전어는 가을의 별미다. 유명세 때문인지 요즘 모임에 가면 전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도 예년 이맘때쯤이면 전어를 맛보긴 했으나, 올해 들어 아직도 제대로 된 전어 맛을 보지 못했다.
가을은 전어 철이기도 하지만 추어탕의 계절이기도 하다. 양식한 미꾸라지가 연중 나오기에 추어탕은 언제든지 쉽게 먹을 수가 있어 계절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가을 추어탕이 제맛이다. 가을 미꾸라지는 겨울을 나기 위해 살이 오르고 기름도 끼어 윤기가 짜르르 나고 빛깔부터 맛깔스럽다. 등이 노르스름 익어 추어탕용으로 제격이다. 가을이면 채소도 흔하다. 솎아낸 무·배추가 풍부하기에 푸짐하게 넣을 수가 있다.
벼가 익어갈 무렵 논 가장자리에 물 빠짐 도랑을 낸다. 삽으로 논바닥 진흙을 퍼 올리면 그 속에 미꾸라지가 몇 마리씩 튀어나온다. "도랑치고 가재 잡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도랑 치면 가재보다 오히려 미꾸라지가 더 잘 잡힌다. 내 어릴 때 벼가 익어갈 즈음 도랑을 치면 아버님은 미꾸라지 몇 마리를 양동이에 담아 오시곤 하셨다. 며칠만 모으면 추어탕 끓일 만큼 양이 찼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추밭에서 배추를 솎고, 홍고추도 따고, 마늘, 제피 등 재료를 준비하셨다. 미꾸라지에 소금을 뿌리면 최후의 발악을 하고 늘어진다. 어머니는 물로 몇 번을 헹구어 삶은 다음 통째로 으깬어 채로 걸러내면 몽글한 미꾸라지살만 남는다. 마당에 걸린 커다란 솥에다 준비한 재료와 함깨 미꾸라지 살을 넣으면 한 솥 그득하다. 장작불로 끓이면 구수한 냄새가 이웃에 퍼진다. 이웃사촌이라고 그날 저녁은 삼 이웃 식구 모두를 불러 추어탕 식사를 했다. 수제비까지 넣어 끓인 추어탕은 너무나 맛있어 모두가 두 그릇을 비우기도 했다. 배가 터질 듯 해도 속도 편이고 소화도 잘되었다.
그때 추억이 각인되어 추어탕 애호가가 된 듯하다. 요즘은 추어탕 끓이기가 쉽지 않다. 주방 가스레인지로 끓일 수는 있지만 가마솥 장작불만큼이나 멋과 맛이 날까 의심스럽다. 그래서 직접 끓이기보다는 조금씩 사서 먹는다. 시내 곳곳의 전통시장에는 국을 끓여 파는 집이 있다. 추어탕, 선짓국, 육개장 등 서너가지 국을 큰 솥에 끓여놓고 비닐봉지에 포장해서 준다. 몇 곳을 누비다 보니 추어탕 맛집을 알아냈다. 집까지 거리도 있고 해서 가끔 아내의 심부름을 한다. 두 봉지를 사서 아버님께도 갖다 드린다. 과거에 추어탕은 시골집 마당에서 직접 끓였다. 갖은 채소와 양념을 넣어 끓이는 재미도 있고 맛도 좋았다. 사다 먹고 보니 그때 누렸던 일들이 그립기도 하다.
미꾸라지는 전국에 거쳐 서식하기에 추어탕도 김치만큼이나 토속적이고 흔한 먹거리다. 어머니 표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삶아 으개어 그름 망으로 뼈를 걸러내면 몽글몽글한 살점이 남는다. 거기에 채소와 갖은양념을 하면 담백한 경상도 추어탕이 된다. 직장생활 할 당시 인근에 남원추어탕이란 간판을 내다 건 집이 있었다. 팀원 모두가 추어 탕을 좋아하기에 자주 갔던 곳이다. 전라도식 추어탕으로 다소 걸쭉했다. 식탁에 올린 추어탕 뚝배기에 고추, 다진 마늘, 들깻가루를 몇 스푼 더 넣으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추어탕이 된다.
내가 먹어 본 추어탕은 경상도식과 전라도식 추어탕이다. 경상도식은 미꾸라지를 망에다 으깨면서 뼈나 머리는 걸러내고 몽실한 살점만 끓인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더 맑고 시원한 추어탕이 된다. 전라도식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망에 으깨거나 갈아서 거기에 야채와 함께 넣어 걸쭉하게 하여 된장을 풀고 들깻가루를 넣어 죽처럼 먹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보편화된 추어탕이라고 한다. 서울식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통째로 사용하여 사골을 삶은 국물에 두부나 버섯 등 부재료를 넣고 고춧가루를 넣고 끓인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먹어 온 어머니 표 추어탕을 좋아한다. 결혼 후 추어탕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본 장모님은 가끔 끓여 주셨다. 벼가 익어 갈 즈음 미꾸라지가 많이 서식하는 무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사위 오기를 기다리셨다. 추석 때 가면 고무대야에 넣어 둔 미꾸라지를 손질하여 정성스레 추어탕을 끓이셨다. 그 정성을 봐서 억지로라도 먹어야 할 판인데 나는 구미가 당겨 평소 먹는 양보다 두 배를 먹기도 했다. 입이 짧고 까다롭기에 누구든 내 입맛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추어탕만큼은 예외다. 좋아하는 음식은 과식해도 무리가 없다. 특히 추어탕은 소화도 잘되기에 내게는 몸보신이 된다. 음식이 맛있다고 하면 주부는 기뻐한다. 집 떠나 외지에 혼자 있을 때였다. 지인 집 저녁 식사 초대가 있어서 갔더니 추어탕이었다. 뭐랄 것도 없이 두 그릇을 후딱 비웠다. 지인 사모님은 내가 소식할 줄 알았는데 추어탕을 그렇게 맛있게 많이 먹는 것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잘 먹었다고 하니 흡족해했다. 이후 사모님은 수시로 추어탕을 끓여 나를 불렀다. 외지에 홀로 있으면서 간혹 추어탕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기에 활력이 돋는 것 같았다.
나는 비교적 입이 짧고 소식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추어탕을 먹는다면 대식가로 보일 정도다. 가끔은 추어탕 폭식을 하지만 평소에는 두 컵 정도로 해서 국밥으로 먹기도 한다. 입맛 잃었을 때면 추어탕이 제일인 것 같다. 가을이면 시장에서 누렇게 변한 자연산 미꾸라지를 파는 곳이 눈에 띈다. 나에게는 최상의 식재료이지만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도 든다. 미꾸라지의 부드러운 피부에 인간은 소금을 뿌려 죽이고, 펄펄 끓는 물에 산채로 집어넣기도 하고, 끓는 기름에 넣어 미꾸라지 튀김을 한다. 그런 음식을 즐겨 먹는 나도 미꾸라지 입장에서 보면 잔인한 인간일 뿐이다. 요즘 동물복지 논의가 활발하다. 식용으로는 어쩔 수 없더라도 보다 안락하게 살고 고통 없는 죽음만큼은 보장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미꾸라지 복지를 생각한다면 당장 추어탕을 먹지 말아야 하겠지만 양보가 어려울 것 같다.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면서 먹기만 하기에 조리하는 자들에게 무조건 감사해야겠지만 조심스럽게 동물복지가 소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모두가 이기적이다. 천부적으로 그런 것 같다. 동물복지를 등한시하고 동물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들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박애주의자가 아닐 바에야 최소한의 동물복지만 생각하고 그들을 죽여 배를 채워야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만 올가을에도 추어탕을 실컷 먹어 보고 싶어진다. (2022.10.19.)
첫댓글 저는 도시에서 자라서 추어탕을 만드는 과정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만
엄마표 추어탕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네요.
저는 장모님이 끓여준 추어탕을 3박4일 휴가 내내 맛있게 먹고 상경한 적이 있습니다. ㅎ ㅎ
잘 하는데 있으면 언제 추어탕 한 그릇 하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