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새벌이 낳은 청백리 이상주
내가 부산교대 2회를 졸업한 1964년 봄에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이태원국민학교에 첫 발령이 났다. 서울용암국민학교, 서울영동국민학교, 용산중학교, 서울 여자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를 거쳐 198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이지호 은사님과 •이 찬 지도교수님의 추천과 배려로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에 교수채용 서류를 제출하였다.
그 때 마침 전두환 대통령의 교육문화 담당 수석 비서관으로 청와대에 근무하시고 계셨던 이상주 부산 사범 9회 선배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졸업, 미국 핏츠버그대 철학박사)께서 강원대학교 총장으로 발령이 나 춘천으로 내려오셨다. 교수임용 인사위원회위원장 이신 이상주 총장께서 내 인사기록을 살펴보시다가 부산교육대학을 졸업하였는데 초등학교 교사 경력이 전연 없는 것을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지리교육과 학과장을 불러 경위를 자상하게 물어오셨다.
사립대학에 오래 근무한 경력이 있던 지리교육과 학과장(서울대 사대 지리교육과 출신)선배 교수가 교수 임용 서류를 제출하기 전에 나에게 하신 말씀이 “교수임용 인사위원회에서 교육경력을 자상하게 보게 되는데,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근무한 경력이 교수 채용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근무 경력만 적어 넣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라고 말씀을 하여 초•중학교 교육경력을 인사기록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전후 사정을 다 들은 총장께서 채용을 결정하고 난 뒤, 인사기록을 다시 쓰게 하면서 초•중학교 교육경력 모두를 다시 써넣게 하라고 학과장에게 연락을 해 왔다는 것이다. 없는 경력을 만들어 줄 수는 없지만 자랑스러운 있는 경력을 왜 빼느냐고 반 야단을 치셨다는 것이다. 18년의 죽은 경력이 고스란히 살아날 수 있게 해준 자상한 총장님이 너무나 고마웠고 감사했다. 부산사범의 선배라는 연이 없었으면 그대로 도장만 찍었으면 그만 이었던 일이었다. 고난의 지난 내 인생이 죽었다가 의미 있는 세월로 다시 탄생하는 것 같은 순간을 맛보게 되어 기분이 아주 좋았다.
1980년대 중반 추운 겨울 방학 때 함박눈이 많이 내렸다. 온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덮여 은세계를 만들었다. 깊은 밤 사범대학 교육 4호관 506호 내 연구실 복도 문 쪽에서 조용한 노크 소리가 났다. 새벽 1시가 넘었는데 누가 내 문을 두드린단 말인가? 머리끝이 서는 것 같았다(나는 약간 겁이 많은 편이다).그리고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고, 컴컴한 물리•화학 실험실도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초저녁에 보았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예!” 하고 문 쪽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8척 거구의 이상주 총장이 새벽녘 까지 불이 커져 있는 학내 교수 연구실을 차례로 들러 격려하다가 내 연구실 까지 오신 것이다. 10여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가셨다.
나는 전송을 하고 연구실에 들어와 앉았는데 괜히 코끝이 찡했다. 세상에! 이런 총장님도 이 세상에 계시는구나! 이 일 뿐만 아니다. 밤 11시 쯤 학내 중앙도서관에 들려 그 때 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모든 학생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누어 주면서 학창 시절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학창시절의 총장님 경험을 이야기 하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사범•부산교육대학 총 동문회가 있는 날이면 총장실에서 직통 전화를 직접 걸어주시거나, 내가 자리에 없어 전화를 못 받으면 비서를 시켜 총장 자동차로 서울까지 같이 가자고 전갈이 온다. 사범대학 교육학과에는 부산사범 12회 김수천 선배 교수님이 계셨는데, 늘 같이 동행하여 총동문회에 참석하였다.
이상주 총장님은 청와대 교육문화 비서관, 강원대학교 총장, 울산대학교 총장, 한림대학교 총장, 성신여자대학교 총장, 교육부부총리 등의 공직을 엮임 하시면서 한국에서는 가장 젊은 나이에 가장 오래 동안 총장을 지내신 분이시다. 한국에서 아직 이렇게 장기간 총장을 지내신 분이 전무후무 하다.
제자들과 동문들이 모인 허물없는 모임에 참석하시면 춤도 잘 추시고,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자상한 성품이 잘 들어나 주위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유머와 기억력이 특출하셨다. 한 번은 춘천에서 서울사대 제자들과 부산교대(사범포함) 동문들이 모임을 가졌다. 모두 양주를 거나하게 마신 후라 오고가는 말이 쉬워졌다. 그렇게 관운이 좋고 장기간 총장직을 하실 수 있는 노하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천기를 함부로 누설 할 수 없지만, 이 교수가 물으니 나에게만 이야기 해 주시겠다며 귀에다 대고 하시는 말씀이 “돈과 여자 문제에 대해서 깨끗해야 한다” 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취기로 간이 약간 부어있었던 나는 겁도 없이 큰 소리로 되 여쭈어 보았다. 남자가 여자에게 깨끗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깨끗해야 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돈을 지불해야 할 장소에 있는 여자라면 확실히 지불해서 남자답게 깨끗하게 마무리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 뒤에 들은 이야기이다. 총장실에는 항상 갖가지 민원성 문제들이 쇄도하는데, 그 중에는 교수들이 여자 문제를 일으켜 그 교수 목을 잘라달라는 투서가 많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대부분 시간과 장소와 투서자 신분이 확실하여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워 총장이 골치를 썩이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투서가 총장에게 오면 총장이 직접 당사자 교수를 조용히 불러 때와 장소와 투서자를 알리고 그 투서를 교수가 보는 앞에서 찢어버리고 해결 방안을 숙의하여 내 보내는데 교수들 대부분이 간도 크게 공짜로 뭘 해보겠다고 덤빈 결과가 대부분이라서 늘 돈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 이다. 한 번은 서울에서 열리는 부산교대 총동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총장과 김수천 교수와 같이 상경하는 승용차 안에서 들은 이야기 이다. 대학 건물을 여러 채 지은 건축업자가 총장실에 찾아와 총장에게 개인 적으로 사례를 하겠다고 하여 그 사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돈으로 바람이 불면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강원대 도서관 앞 운동장에 미래광장을 설계하여 광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한 업자가 찾아와 총장에게 사례를 하겠다고 하기에 그 돈으로 강원대 정문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늘 사무국장이 도맡아 일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 때 당시 강원대 사무국장이 진주고등학교 내 동기였다. 종 종 만나 점심을 같이 했다. 은근 슬적 총장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물어보면 놀랄 일이 많았다. 총장 출장비는 학교와 관련된 공무를 위하여 쓰는 비용인데 이상주 총장은 철두철미 빈틈이 없다는 것이다. 총장 개인의 일이면 절대로 출장비를 청구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학교 교육행정 전반에 걸쳐 초비상 상태로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출장비가 남으면 남은 돈을 반드시 대학에 반납한다는 것이다. 영수증을 첨부하여. 이런 총장이니 800여명(지금은 1,300여명)의 교수들과 수많은 학교 행정직원들이 가진 1,300여개의 입을 통하여 바깥 세상에 어떤 말이 전해지겠는가?
한마디로 현대판 청백리였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 한새벌의 같은 마당에서 이런 걸출한 대선배가 배출된 것이 내 인생 삶 내내 자랑스럽게 느껴져 왔다. 선배님을 뵌지 20여년이 지난 재작년에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개최된 국제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출입구에 들어가려는데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를 집고 입장하고 계신 이상주 선배님을 뵈었다. 인사를 드렸다. “지리학을 전공한 이학원 교수가 아닌가? 반갑다. 그간 잘 지내셨는가?”. 나는 놀랐다. 그 연세에, 그 동안 강원대학에서만 계신 것이 아니고, 강원대학교를 떠나신 이후 3개 종합대학교 총장을 지내시면서 수많은 교수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고 또 많은 세월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 하실 텐 데도 아직까지도 이 후배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시며 불러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내 얼굴이 선배님께서 기억할 수 있도록 특출하게 훤칠하게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내 연구 실적이 특출하여 국내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학자도 아닌데도 기억을 하시고 계신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상주 선배께서 춘천 한림대학교 총장을 하고 계실 때였다. 지방사립대학교 중에서 이공계통으로는 포항공대가 으뜸이고, 인문계통으로는 한림대학이 전국 최고라는 말이 있듯이 한림대학교는 재단이 튼튼하고 우수한 인문계통 연구 교수들이 많아 학생 정원의 약 80%가 서울에서 내려와 재학하고 있다. 내 아버지가 서울 연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직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내린 의사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직장암의 가족 내력이 있으면 50대 이후의 가족들은 수시로 대장 내시경 검사를 해 봐야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나 보고 몇 번이나 대장 검사를 해 봤느냐고 물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다고 하였더니, 꼭 교수나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제일 말을 듣지 않고, 미루고 미루다가 늦게야 암을 발견하고서 종합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하면서 빨리 검사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는데 자식이라는 것이 그 말을 듣고 곧장 검사를 해 보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가 아버지가 퇴원하여 고향으로 퇴원 하신 후 춘천으로 와 한참을 지내다가 세브란스 의사 말이 마음에 걸려 대장암 명의를 찾아 한림대학교 부속 성심병원에서 검사를 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장에서 용종이 5개나 발견되었다.
요즘에는 검사를 하는 중에 용종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레이저 칼로 잘라내지만, 그 당시는 검사와 수술이 분리되어 있었다. 수술을 하고 절단된 용종을 검사해야 양성인지 음성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용종이 5개나 있다는 소리를 의사로부터 듣자마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 죽는 줄 알았다. 다리가 풀려 걸음이 잘 걸리지 않았다. 내 어쩌다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춘천까지 와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가. 마누라와 자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그리고 아버지 앞에 죽으면 불효자식이 더 큰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온갖 생각과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림대학교 총장이신 이상주 선배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배님, 제가 춘천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여차 여차 전후 사정 이야기를 다 말씀드리고,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선배님은 침착하셨다. 잘 알았다. 주치의를 찾아가 자세하게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해 주겠다고 하셨다. 곧 전화가 왔다. 용종 2개가 좀 크고, 3개는 작은 것이라 큰 걱정을 하지 말고 수술을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내가 수술하는 날 당신께서도 미루던 수술을 그 날로 잡아 놓았다는 것이다. 총장님께 무슨 병으로 수술을 하시느냐고 물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여쭈어보지도 못했다.
수술 날이 왔다. 아침 8시에 병원에 가니 병원장을 비롯하여 3과 과장 의사들이 초긴장을 하여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총장님과 어떤 사이인지를 먼저 물었다. 선후배라고 바르게 말했는데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더 자세하게 말 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화면으로 수술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외견상으로 악성은 아닌 것 같지만 절단한 용종 조직 검사를 해 봐야 안다는 것이다. 보통 일주일 정도 걸리는데 기간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선배 총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종양을 검사한 결과 별 이상이 없다고 한다. 안심하고 잠을 잘 자라는 것이다.
다정다감한 선배님이셨다. 검사와 수술 비용이 너무 싸서 또 한 번 놀랐다. 아마도 선배님 가족으로 처리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을 뿐이다. 이상주 선배님은 본이 인천이고 나는 벽진이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 이후 2년에 한 번씩 위내시경, 대장 내시경 검사를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그 때 마다 대장에서 용종이 한 두 개 씩 발견되는데 요즘은 아주 쉽게 그 즉시 잘라낸다. 그 때 마다 이상주 선배님 생각이 난다. 금년에도 4개나 발견되어 잘라냈다.
이상주 선배님은 손이 보통 사람보다 큰데다 손가락이 길고 예쁘다. 손가락에 살이 쪄 있는 모습이 예쁜 여자 손 같기도 하고 부처님 손을 닮았다고들 말하기도 하는데, 손에 복이 다 들어있는 것 같다. 인사차 손을 잡으면 따뜻하고 푹 안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귀가 크고 길어서 부처님 귀를 닮으셨다. 운동장에 800여명의 교수들을 모아 놓고 이 중에서 총장감을 찾아보라고 하면 누구든지 이상주 선배님을 지목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특출한 신체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지성미가 흐르고 생긴 모습이 귀골이다. 그리고 획이 크고 장중하면서도 아주 섬세한 마음결을 갖고 계신 대인 풍모의 선배님이시다.
선배님께서 장수하시면서 남으신 여생이 편안하시고 건강하시기를 마음 속으로 늘 기원한다.
2013년 8월 4일, 춘천에서 이학원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