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가 시속 15km 못넘는 보행자 우선도로
[보행자에 진심인 사회로]〈14〉네덜란드 보행친화 도로 ‘보네르프’
1960년대 네덜란드 델프트서 도입, 나무 심고 화분 내놔 차량 감속 유도
사고 50% 감소하자 정부서 법제화… 제한속도 15km-지정 공간에만 주차
암스테르담 등 다른 도시도 벤치마킹
작년 한해 보행 사망자 43명, 韓은 1018명… 인구당 사망률도 8배
지난달 14일 네덜란드 델프트시 도심에 위치한 람스트라트 거리의 보네르프에서 한 시민이 걷고 있다. 오른쪽 위로는 보네르프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델프트시가 세계 최초의 보행자 우선도로로 도입한 보네르프는 교통사고를 감소시키며 네덜란드 주택가의 대표적 도로 형태로 자리 잡았다. 델프트=신지환 기자
지난달 14일 네덜란드 델프트시의 한 주택가. 집을 나와 걷던 패트릭 얀선 씨(61)가 지나가는 차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운전자는 길 한복판에 잠시 차를 세운 뒤 창문을 내려 얀선 씨와 10분가량 얘기를 나눴다.
두 사람이 서 있던 폭 3∼4m의 거리엔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없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동안 자전거를 탄 여성과 아이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이곳은 네덜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행자 우선도로, ‘보네르프(Woonerf)’다. 보네르프에선 차와 사람이 이렇게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이 흔하다.
델프트에서 30년 넘게 살았다는 얀선 씨는 “이곳에선 사람과 자전거, 자동차가 모두 보행자의 보폭에 맞춰 움직인다”며 “집 앞 거리를 단순한 도로가 아닌 주민들의 공존을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게 보네르프의 정신”이라고 했다.
○ 사람과 차가 보폭을 맞추는 보네르프
네덜란드어로 ‘생활의 터전’이란 뜻을 가진 보네르프는 1960년대 델프트에서 처음 도입된 세계 최초의 보행자 우선도로다. 당시 델프트 주민들은 늘어나는 어린이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자발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도로에 화분을 내놓거나 나무를 심어 차량 속도를 줄이고 도로 환경을 개선해 나갔다.
이후 델프트시와 델프트공과대 등이 나서면서 보네르프에 속도가 붙었다. 차량이 독점해 가던 거리를 ‘생활과 놀이의 공간’으로 복원해 보행자에게 돌려주고 사람과 자동차, 자전거 등이 공존하는 도로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보네르프 도입 이후 델프트시의 교통사고가 50% 가까이 감소하는 등 보행자 보호 효과가 확인되자 네덜란드 정부는 1976년 보네르프를 법제화했다. 현재 네덜란드 도로교통법은 △보행자는 보네르프의 모든 공간을 사용할 수 있고 △차량은 시속 15km를 초과할 수 없으며 △지정된 공간에만 주차가 가능하다는 내용 등을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델프트 기차역에서 서쪽으로 80m 떨어진 람스트라트 거리의 보네르프에선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어린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보도와 차도 사이의 높이 차를 없애거나 줄인 덕분에 보행자는 편안하게 통행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아무렇지 않게 도로 중앙으로 걸었고 보행자를 발견한 차량은 일단 멈춰 기다렸다. 보행자가 길을 터주지 않았다고 경적을 울리는 일도 없었다. 길이 교차하는 지점은 도로를 지그재그로 배치해 차량이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이게 했으며, 과속방지턱은 20∼30m마다 설치돼 있었다.
○ “차와 자전거는 길 위 손님”
보네르프는 1980년대 이후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며 네덜란드 주택가의 대표적인 도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수도 암스테르담도 ‘Zone30’(시속 30km 제한 도로)의 형태로 보네르프를 받아들였다. 유동인구가 많은 대도심 주택가에 기존 보네르프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던 만큼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 물론 보도와 차도의 구분을 없애고 과속방지턱과 화분 등을 두는 보네르프의 핵심 요소들은 대부분 적용됐다.
암스테르담 시 포피 사베네이어 대변인은 “보네르프의 설계 원칙을 우리 식대로 해석해 구현한 것”이라며 “보행자는 (주인처럼) 길 전체를 사용할 수 있지만 자동차와 자전거는 도로의 손님”이라고 설명했다.
○ “보행자 ‘라스트 마일’ 접근성 높여야”
보네르프 도입 이후 네덜란드의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네덜란드 교통안전연구소(SWOV)에 따르면 지난해 네덜란드의 보행 사망자는 43명으로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의 7.4%를 차지했다. 반면 지난해 한국의 보행 사망자는 1018명으로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의 34.9%를 차지했다. 인구 10만 명당 1.96명의 보행자가 사망한 것으로 네덜란드(0.25명)의 7.8배에 이른다.
암스테르담시의 교통 설계 정책 책임자들은 보행 친화 도시를 위해 필요한 정책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자동차 금지 구역 설정 등을 통해 차량 이용량을 줄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어 “대중교통과 자전거 시스템을 개선해 보행자의 ‘라스트 마일’(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이동 과정)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델프트·암스테르담=신지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