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몇 달을 다녔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메가폰을 잡은 군인들이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군인들은 귀대(歸隊)하라고 화급하게 외쳤다. 우리나라 국군은 일요일 외박을 했기 때문에 군대에 군인들이
없었고 이들에게 귀대를 알리는 사람들이었다.
라디오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이북에서 처 내려왔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녘에는
은은하게 포성이 들려왔다. 군인들을 실은 트럭은 동대문에서 청량리 쪽으로 계속 나갔다. 그들은 트럭 위에서 군가를
부르며 나갔다. 세계 제2차대전을 치루기는 했어도 고공(高空)에 B 29가 나타나면 공습경보를 울리는 정도였지
우리나라에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나가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하루가 지나갔다. 날씨는 화창했다. 대통령은 서울 시민은 반석 위에 있는 것처럼 안전하니 안심하라는 방송을 했다.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는 우리 국군이 북진하면 점심은 평야에서 먹고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는다고 하였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참으로 들었으니 순진하다 할까! 그 위에 대통령의 시민을
안심시키는 방송을 들었으니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서 북쪽 하늘에 번개 같은 섬광(閃光)이 비추고 포성이 어제보다 좀 더 가까워졌다. 시민들은 불안해했지만
무엇을 아는 것이 없으니 그냥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다. 저녁녘에 북쪽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소달구지에 약간의 가재도구를 싣고 노인도 태워서 내려오지만 대부분 사람은 걸어서 등짐을 지고
내려온다. 이들은 갈 곳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불안한 밤을 또 보냈다. 아침부터 포성이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청량리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가도에는 피난민 행렬이
이어졌다. 집을 버리고 논밭을 버려두고 떠나는 사람들이다. 목적지가 없는 이들은 며칠 나갔다가 오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전쟁에 관한 상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모한 행렬일 것이다. 더욱이 전연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일어났으니 그저 놀랍고
두려울 뿐이었다.
미아리고개까지 적이 들어왔다는 말이 전해지고 시민들은 무척 불안했고 곧 서울에 들어올 것이라 하였다. 사실 아는 것이
없으니 무엇을 어찌해야 할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우리 가정도 피난하러 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내가 살던 신설동에서 아는 분이 있는 왕십리로 가기로 하고 그 댁에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고 무작정 저녁에 떠나서 왕십리로 갔다. 왜 왕십리가 피난처인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집에서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그 행동은 어떠했겠는가!
피난처에 방 한 칸을 할애받아서 식구가 모여 있는데 바로 그곳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포성인데
공포의 소리였다. 신설동에서 피난 나오면서 할머니는 집에 계시게 하고 나와서 어머니는 그 밤에 집으로 가야겠다고
나서셨다. 온 식구가 나서서 집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포격은 더 심해져서 도무지 이동할 수 없었다.
위급상황에서 아무 집이나 뛰어 들어갔다. 그 댁에도 노인만 집을 지키고 젊은이들은 어디론가 피난 가고 없었다.
노인은 우리를 무척 반겼다. 두려움이 극에 달했는데 사람을 보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 댁 이불을 모두 내려서 머리 위에
쓰고 포탄을 면해 보려 했다. 어리석은 짓이지 이불 쓰고 있다고 포탄에서 벗어날까! 새벽 3시쯤 되었는데 포성이 잦아들었다.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어놓고 숨을 쉬었다. 포탄은 우리 가족을 피해갔다. 살아있다는 생각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멀리서 아련히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에 있던 이북 추종세력들이겠지, 포성이 끝나는 시점에 이들은
길거리로 나와서 플래카드를 들고 외치는 것이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에 우리 가족은 그 댁에서 나왔다. 그리고 걸어서 성북천(城北川)을 따라서 신설동으로 이동했다.
그 당시 성북천 서쪽으로는 서울경마장이 있었다. 경마장 북쪽의 동대문 가도에는 전차(電車)가 다녔다. 이 지점에 왔을 때
하천에 사람이 꽉 차 있어서 자세히 보니 이북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자기 키보다 더 긴 것 같이 느껴지는 총을 메었다.
총에 대검을 세워서 더 크게 보였던 것 같다. 이들은 10대 후반의 청년들이라 했다.
그렇게 해서 서울은 북측의 수중에 들어갔고 국군은 남쪽으로 쫓겨 내려갔다. 이날 새벽 2시 30분 한강 철교가 폭파되었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전쟁에 관해 무지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우리 가족은 안전한 집을 놔두고 폭탄이
떨어지는 곳으로 피난 갔었다. 한국전쟁 발발 3일간의 일이다.
벌써 74년 전의 일이다. 한국전쟁은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학살에 의한 주검이 훨씬 많다고 한다.
무모한 일이지, 오늘도 전쟁하는 곳이 있다. 전쟁이란 말을 들으면 왠지 내 어렸을 때 경험한 공포가 떠오른다. 그리고 무모한
인간의 욕심이 많은 백성을 고난에 빠뜨린다는 생각을 한다. 전쟁은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이 얼마든지
있다.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코(賀川 豊彦) 선생은 반전론자(反戰論者)였다. 평화주의자(平和主義者)이다. 세계 제2차대전
중에 군부가 가가와 선생을 찾아와서 묻는다. 왜 전쟁을 반대하십니까? 가가와 선생은 나가면 진다. 그리고 다른 나라를
괴롭히지 말라고 일렀다. 군부는 선생에게 우리는 나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작습니다. 인구가 많습니다.
지하자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역외로 진출해야 삽니다. 라고 하였다. 가가와 선생은 네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으니 너
자신을 개발하라고 하였다. 전후 일본의 경제, 사회, 문화 발전은 역외 식민지에서가 아니고 그들 자신을 개발한 데서 이룬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
2024년 6월 25일(화)
한국전쟁 발발 74주년에
김정권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구침산제일교회 원로장로
대구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