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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융국사비명(諡圓融國師碑銘) 부분
(원융국사께서) 부석사에 이르렀다. 화엄정토(華嚴淨土)의 사상을 주창하여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비대(媲對)하였으니 영축산(靈鷲山)으로써 칠보정토(七寶淨土)를 삼아 항상 안주(安住)하시는 보신불(報身佛)로 여겼다.
이 절은 의상조사께서 중국인 서화(西華)에 유학하여 화엄(華嚴)의 법주(法炷)를 지엄(智儼)으로부터 전해 받고 귀국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본당(本堂)인 무량수전(無量壽殿)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左右補處)도 없으며 또한 전전(殿前)에 영탑(影塔)도 없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義相)스님이 대답하기를, “법사(法師)이신 지엄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승(一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十方淨土)로써 체(體)를 삼아 생멸상(生滅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이르기를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로부터 관정(灌頂)과 수기(授記)를 받은 이가 법계(法界)에 충만하여 그들이 모두 보처(補處)와 보궐(補闕)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지 않으신 까닭에 궐시(闕時)가 없으므로 좌우보처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영탑(影塔)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華嚴) 일승(一乘)의 깊은 종지(宗旨)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엄 스님은 이 화엄 종취(華嚴 宗趣)를 의상에게 전해 주었다. 의상이 전수를 받은 후 원융국사에까지 전승(傳乘)되었다. 그러므로 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절에 주석(住錫)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
篇2】(1995)〕 중에서
"화엄정토(華嚴淨土)의 사상을 주창하여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비대(媲對)하였으니 영축산(靈鷲山)으로써 칠보정토(七寶淨土)를 삼아 항상 안주(安住)하시는 보신불(報身佛)로 여겼다."에서
* 화엄정토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아미타부처님을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석사 아미타불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수인으로 알려진 선정인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이유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비대"라는 말을 "짝하였다"라는 뜻으로 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을 바로 아미타불인 보신불로 여겼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는 화신 석가모니불이 바로 보신 아미타불이 됩니다.
* 이는 서방정토만 서방정토 또는 정토가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하셨던 바로 이곳 우리가 사는 남섬부주가 바로 서방정토이자 정토라는 사상, 따라서 모든 곳이 정토로, 바로 화엄정토라는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출처: 블로그( 목경찬 교수)
첫댓글 화엄종 사찰 입니다
무량수전 최고의 목조 건물 입니다
대웅전 마당에 용이 있는 사찰 입니다
나무아미 타불 관새음 보살 _ ()()() _
여기서 상세히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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