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그림자 - 관룡사 당간 지주 / 김경성
시간이 흘러가도 차오르지 않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의
흔적만이 켜켜이 쌓여갈 뿐
해체할 수 없는 기억은 읽을 수 없는
암각화처럼 쓸쓸하다
그대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 심지를 꽂았던 가슴에는
우물같은 자국이 있다. 그 너머로
조금씩 무너져가는 오래된 탑과
빛과 바람이 스칠 때마다
기억을 지워가는 벽화의 채색 빛처럼
대웅전 어칸 문의 경첩이 기억하고 있는
문이 열리고 닫혔던 숫자만큼
제 몸을 뚫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가슴 안으로 물컹하게 들어갔던 것, 혹은 빠져나왔던 것
흔적으로 남아
뚫린 가슴 너머로 바람 흘려보내며
푸른 깃발을 기다리고 있다
허물어져가는 시간의 눈금 위에 서서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온 몸에 푸른 꽃 피도록 오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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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간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 절을 거쳐 간 숱한 삶의 그림자를
보아낸 시인의 예리한 눈은 ‘해체할 수 없는 기억’에 머물러
있다. 기억이란 해체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알면서도 짐짓 건드려보았던 것인지 ‘암각화처럼 쓸쓸하다’
라고 진술한다. 내게서 빠져나간 시간은 곳곳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관룡사 당간 지주에 새겨진 자국들은 한때의
그 누군가의 절실한 기억의 편린이었을 것이며, 여과되지
않은 아픔이었을 것이며, 기구(祈求)였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따라 잠시나마 고였던 시간의 흔적을 따라
또 다른 시간을 찾아 나서는 김경성의 시선은 한 발짝 비켜선 채
냉철함마저 보인다. 타자가 남긴 시간의 흔적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발견한 때문이다.
‘대웅전 어칸 문의 경첩이 기억하고 있는/ 문이 열리고 닫혔던
숫자만큼/제 몸을 뚫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가슴 안으로
물컹하게 들어갔던 것, 혹은 빠져나왔던 것’은 바로 현재라는
창을 통한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나의 절실함이 여닫았을 문의
경첩으로 발견되어진 것이다. ‘허물어져가는 시간의 눈금 위에
서서/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결심하는 것이다.
/ 박해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