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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오늘은 “의인은 그의 신실로 살아야만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8절의 “그들”은 “칼데아 사람”을 가리킵니다(합 1:8).
그들의 말들은 표범들보다 빠를 뿐만 아니라 이리들보다 날카롭습니다.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기동성에 성읍들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졌습니다.
9절의 “강포(violence)”라는 단어(하마스)는 “폭력”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앞에 2~3절에 폭력을 행한 자들의 폭력에 대해 옵니다(합 1:9).
아내가 빌라를 팔아서 1억 2천만 원을 받았고 이래저래 8천만 원을 더하여 2억짜리 집을 사기 위해 1천만 원을 계약금으로 주고 계약하였는데, 예기치 않은 세금 2,500만 원이 나오니까 계약한 집 해약하고 세금 내자는 남편이 있습니다. 아내가 그 말년에 2억짜리 집에도 못 살게 다 가져가는 남편이 폭력입니다. 평생 아내 돈 자기가 쓰며 그 돈으로 다른 여자 간음한 것이 폭력입니다. 아내는 자식 때문에 이혼도 못 하고 이후 30년 동안 각방을 사용합니다.
어쨌든 폭력을 행한 자들의 폭력에 대해 칼데아 사람이 옵니다.
그들은 왕들을 무시하고 주권자들을 조롱거리로 봅니다(합 1:10).1)
1.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합 1:12~17).2)
하박국 1장 12~17절에 “반석이여 당신은 재판을 위해 그를 놓으셨고 징계하시기(correct) 위한 목적으로 그를 설립하신 것입니다. 당신은 악을 보시기에 눈이 순수하시고 수고에 바라보지 못하신데 어찌하여 당신은 불성실하게 행동하는 자들을 그냥 바라보시며 사악한 자가 그보다 더 의로운 자를 삼킬 때 그냥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당신은 인류를 바다의 물고기들처럼 움직이는 것처럼 만드실 것입니까? 그가 그 모두를 낚시에 오르게 하였으며 그가 그의 망사에 끌어올렸으며 그가 그의 그물에 모으며 그러므로 그가 기뻐하였고 그가 즐거워하므로. 그가 그의 망사에 희생 제물을 바치고 그의 그물에 제물을 태우니 왜냐하면 그것들에 그의 몫이 기름지고 그의 음식이 살찌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의 망사를 비우고 민족들을 죽이기에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 1장 12~17절은 ‘하박국의 두 번째 탄식’입니다. ‘악인이 더 의로운 이를 삼키는 현실’을 탄식합니다.3)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신 32:4).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십니다. “반석”은 늪처럼 빠져드는 곳이 아니라, 발을 두고 설 수 있는 곳입니다. “반석”은 의지할 수 있는 곳인데 하나님께서는 “반석”이십니다(합 1:12).
집을 지을 때 반석 위에 지어야 안전하며 흙 위에 지으면 위험합니다. 지금 중국이 이런 상황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도시가 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반석”은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됩니다(시 27:5, 삼하 22:3). “반석”은 난공불락의 땅이기에 반석에 피난할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반석”은 오랜 세월을 변하지 아니하고 굳게 제자리에 있습니다.
“정의(justice)”라는 단어(미쉬파트)는 “재판”, “심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시려고 바벨론을 설립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잠 3:12).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므로 복된 자입니다.
그는 악(evil)을 보시기에 눈이 순수하시고 수고에 바라보지 못하신데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십니다(합 1:13).4)
그런데 하박국 예언자에게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사항이 있었습니다. 비록 유다가 죄악을 범하였을지라도 바벨론보다 의로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을 하박국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합 1:13).
하박국은 인류를 물고기들처럼 만드실 것인지를 물었습니다(합 1:14). 인류를 통치자가 없는 땅에 기는 벌레처럼 만드실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아니하고 올바른 통치자가 없는 상황 속에, 불의를 당연하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정의를 외치고 추구하여야 합니다.
그가 그 모두를 낚시에 오르게 하였고 그가 그의 망사에 끌어올렸으며 그가 그의 그물 안에 모으며 그가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입니다(합 1:15).
마치 어부가 바다의 물고기들을 그물에 모아 배에 끌어 올리는 것처럼 바벨론이 인류를 그렇게 정복합니다. 그리고 그 정복으로 즐거워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는 즐거워도 잡힌 물고기는 즐겁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가 그 망사에 희생 제물을 바치고 그 그물에 제물을 불태우니 그것들에 그의 몫이 기름지고 그의 음식이 살찌기 때문입니다(합 1:16).
어부는 자기가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된 것이 그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그물을 우상화하여 희생 제물로 도살하고 희생 제물을 불태웁니다.
사람들은 풍요와 풍성한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대상에 제사합니다.5) 중국은 기술을 믿고 댐들을 지었는데 비가 많이 오니 무용지물입니다. 중국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과학 기술 위에 문명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들이 쌓아 올린 과학 기술이 재난을 당할 때 지켜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그 망사를 비우고 민족을 죽이는 일에 아끼지 않습니다(합 1:17). 바벨론은 민족들을 아끼지 않고 멸망시켰습니다.
바벨론이 민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 채 짓밟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하여 묻습니다.6)
하박국 2장 1절에 “내가 내 책무 위에 서 있고 내가 방어벽 위에 서고,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고 그가 나의 논증에 무엇을 돌릴지를 보기 위하여 내가 지켜볼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책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미쉬메레트)는 “책무”라는 뜻 외에 “경계”, “주의”, “망봄”, “감시”, “지킴”, “책임”, “직무” 등을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들은 “망보기”(watch)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망보는 곳입니다.
마치 파수꾼이 망보는 장소에 서서 열심히 주위를 지켜보는 것과 같이 하박국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대답하시는지 지켜보겠다고 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응답)을 기다립니다.7)
2.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합 2:2~5).8)
1) 환상은 정한 때에 있으니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 2장 2~3절에 “환상을 기록하고 판들에 분명하게 하라. 환상은 정한 때에 있고, 그 끝이 숨 쉬고 거짓말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만일 그것이 머뭇거리면(Though it tarries) 그것에 대망하라, 이는 그것이 들어올 것이며 그것이 지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소년 사무엘이 하나님을 봉사한(was ministering) 날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중하였으며 증가하는 환상이 없었습니다(삼상 3:1).
“환상(vision)”(하존)은 “바라보다”(하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상”은 영어로 “vision”입니다.
만일 사람이 원하는 때 자기 스스로 환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환상이 없어지면 다시 환상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런데 환상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한다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무엘상 3장 1절로부터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게 하셔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비전”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이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발견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기에, 증가하는 환상이 없었습니다(삼상 3:1).
그런데 자기의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God's Vision)으로 둔갑시켜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셨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벌하시기 위해 바벨론을 그 도구로 쓰셨는데,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후에 그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늦는 듯이 보여도 하나님께서 “정한 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대망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조급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급하다고 합니다. 당장 되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외치는데 “빨리빨리”가 좋은 점이 많으며 “빨리빨리”라는 특성으로 한국의 경제가 “빨리빨리” 발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복지센터에 가서 해 달라고 하면 한 달이 되도 안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날로 문제를 해결하든지 늦어도 며칠 안에 해결합니다. 부지런한 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하니까 빨리빨리 발전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빨리”를 외쳐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멈춤”이라는 빨강 신호등 앞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앞당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디게 보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할 때 시간이 걸리니, 하나님의 말씀 성취도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비록 더디게 보여도 반드시 성취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한 때에 되지 아니하였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의 때는 완벽하고 절대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면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정한 때가 있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때를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한 때에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는 것입니다.
2) 의인은 그의 신실로 살아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그의 영혼이 부풀며 그의 안에 똑바르지 아니하고, 의로운 자는 그의 신실 안에(by) 살 것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며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새로운 경험이 아닙니다.9)
“부풀다”라는 동사(아팔)는 그의 마음이 교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부풀리다”(puff up), “거만한”(proud)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이 땅을 통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며, 그의 일정에 따라서 공정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10)
현실은 악인이 영원히 통치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영원히 통치하지 못하였으며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70년 뒤에 멸망하였습니다. 사람의 시간으로는 70년이 길 수 있으나,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습니다.
북한은 어떻습니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가 통치한 것입니다. 진짜 “김일성 장군”이 존재했는데 “김성주”가 이름을 도둑질하였습니다.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도용했고 그가 바로 우리가 아는 김일성입니다. 좌파는 뭐 하나 진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거짓의 기초 위에 세운 왕국입니다. 사람들이 깨어나서 그 거짓말을 간파하는 순간 그 왕국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김정은에게는 지금 내놓을 만한 아들이 없고 이것은 곧 김일성 혈통의 독재체제가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재명이 지금 대통령 직분 도둑질해서 대통령 놀이 재미 들려 있는데 악한 통치자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악인은 공정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악과 불의가 멸망하고, 정의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기실 것입니다.
“곧다”라는 동사(야샤르)는 “곧다”(upright), “옳다”로 번역되었고 그의 영혼이 그의 안에(in him) 곧지 아니합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때,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니까 교만하게 되고, 교만하니까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백만장자들의 성공 요인 30가지 가운데 제1순위가 “정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정직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성공하기 위해 정직을 내팽개쳐 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재명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과 민주당 의원들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과 반대되는 자가 곧 “의인”, 즉 “의로운 자”인 것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이것들(These)은 노아의 역사(account)라, 노아는 의인이었고 그의 세대들 안에(in) 완전하였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옳을 “의(義)”와 사람 “인(人)” 자인 “의인(義人)”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의인”이 “의로운 사람”, “올바른(righteous) 사람”을 뜻합니다.
노아는 올바른 성품으로 인해 “그의 세대들”과 구별됩니다.11)
의롭다는 말은 올바른 행실의 표준에 부합한다는 뜻을 담아냅니다.12)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표준은 도덕법과 특별계시 속에 드러납니다.13) 사람은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규범(norm)에 따라서 살아서 의로운 사람입니다.14)
“의로운(righteous)”(찻디크)은 “옳고 바른”, “공평한”을 뜻하며, 하나님의 기준(norm)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곧은(straight)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있다는 것이며, “곧다”라는 말은 똑바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똑바로 걸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저 싫어요’라고 하고 왼쪽으로 가든지 오른쪽으로 갈 때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conformity)인 상태여야만 의롭다고 평가됩니다.
노아는 의롭다고 판결받는 것에서 법적 하자나 결함이 없었습니다.15) 선과 악, 의와 불의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결정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16)
어근 sdq의 의미는 기준에 적합함(conformity to a norm)입니다.17)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한(conformable) 사람이 곧 의로운 사람입니다. 노아가 의로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한 자였던 것을 뜻합니다. “의롭다”라는 판단은 사람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던 때 노아는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올바른 자”(the righteous)라는 기본적인 뜻을 지닙니다.18)
“의인”은 하나님 및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입니다.19) 의인은 그의 신실함으로(by) 살아야 합니다.
“그의 신실”을 70인역이 “나의 신실”로 번역한 것은 틀린 것입니다.20)
레위기 18장 4~5절에 “나의 법률들을 행하고 나의 법규들을 지키고. 너희는 나의 법규들과 나의 법률(judgment)들을 지킬 것이라, 그것들을 인류가 행하고 그가 그것 안에 사는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21)
오직 의로운 자는 그의 “신실(信實)”(에무나) 안에 살 것입니다. 여기 “신실”이라는 한자어는 “믿음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믿음”에 따르는 “열매” 및 “믿음직한 행실(行實)”이 “신실(信實)”입니다.
의로운 사람(righteous man)이며 그의 세대에 완전한 노아(창 6:9)는 그의 신실 안에 방주를 만든 까닭에 홍수의 심판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신실 안에 살아 신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룩 16:23).
인내는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정직한 관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22)
하박국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실한 삶을 살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23)
하나님께서 악과 악마를 물리치시고 죽음 자체를 이기실 것입니다.24) 우리는 그날을 대망하며 의인으로서 우리의 신실 안에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심판하시며 정의롭게 행하실 주 하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25)
신명기 32장 3~4절에 “이는 야훼의 이름을 내가 부를 것임이라, 너희는 위대(greatness)를 우리의 하나님께 돌려라(ascribe). 그 반석이신 그의 행위가 완전하시니 이는 모든 그의 길들이 정의임이며 신실의 신(God)이시고 불의가 없으시며 올바르시고 똑바르시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믿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직함이며 이것이 “신실(信實)”입니다(시 33:4, 36:5, 88:11, 89:1, 96:13, 100:5).
구약의 모든 구절에서 “믿음”이 아니라 “신실”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니 하박국 2장 4절에도 “신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볼 때 합리적입니다. 신약의 인용 때문에 “믿음”으로 번역하면 시대 흐름을 역행한 것입니다.
의로움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26)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서 순종하며 삶을 사는 자가 의인입니다.27)
하박국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영혼이 살게 된다고 기록하지 않았고, 의인이 누군가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의인 자신의 신실을 말하였습니다. 의인은 자신의 변함없는(stedfast) 신실함으로 살아야 합니다(shall).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의 신실로 살 때 의인이 된다고 말씀하지 않고 이미 의인이 된 사람이 그의 신실로 살아야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사람이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인으로 인정받은 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였습니다.
악인의 영혼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악인과 달리, 의인은 그의 신실함으로 살아야 합니다(but the righteous shall live by his faithfulness).
1) 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서울: 성서유니온, 2016), 480.
2)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하박국』 (서울: Exposimentary, 2011), 355.
3) 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483.
4) D. M. Lloyd-Jones, 『하박국 강해』, 박영옥 옮김 (서울: 목회자료사, 1998), 37.
5) 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489.
6) 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490.
7) Lloyd-Jones, 『하박국 강해』, 49.
8)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하박국』, 355.
9) Lloyd-Jones, 『하박국 강해』, 66.
10)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하박국』, 392.
11) Kenneth Mathews, 『NAC 창세기 1』, NAC 성경주석, 권대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8), 435.
12) Mathews, 『NAC 창세기 1』, 436.
13) Bruce K. Waltke, 『창세기 주석』, 김경열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 231.
14) Gordon J. Wenham, 『창세기 1-15』, WBC 성경주석 1, 박영호 옮김 (서울: 솔로몬, 2006), 337.
15)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서울: Exposimentary, 2010), 180.
16)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181.
17) Alister E. Mcgrath, 『하나님의 칭의론』, 한성진 역 (CLC, 2008), 27.
18) 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503.
19) 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504.
20) 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506.
21) Christopher J. H. Wright, 『하박국 폭력의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 조덕환 옮김 (서울: 시들지않는소망, 2024), 119.
22) 김기현,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서울: 복 있는 사람, 2016), 163.
23) Wright, 『하박국 폭력의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 134.
24) Wright, 『하박국 폭력의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 135.
25) Wright, 『하박국 폭력의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 136.
26) Wright, 『하박국 폭력의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 125.
27) Wright, 『하박국 폭력의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 128.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