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제 이대봉(大興帝 李大峰)은 모처럼 만에 풀어진 표정으로 2층 난간에 가만히 기대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1층에서는 아파트처럼 늘어선 갈색 탁상들 사이로 수많은 인원이 서류 더미와 전화 더미의 양면전선 속에서 씨름하며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관료들은 아까는 일본어로, 지금은 한국어로 떠들다가도 잠시간 만주어로 혼잣말을 하더니 다시금 전화를 들어 올렸다. 형형색색의 장교들은 지도를 그려가며 이곳저곳 면면이 열망을 수놓다가도 선선히 짜맞출 수 없는 조각을 놓고서 서로 격론을 벌이더니 켜켜이 쌓여가는 잿빛 현실 속에 하나둘 점점이 몸을 사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고관대작들이 차고앉은 2층 사무실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드나드는 이들과 삼삼오오 모인 이들의 역동적인 모습 그 자체가 벽을 뚫고서 들려오는 것만도 같았다.
어둔 양복쟁이들과 탁한 제복쟁이들이 서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도 격하게 팔을 휘저으며 가로젓는 모습과 그네들 사이를 오가는 서류뭉치와 서리들의 동선이 서로 교차하니, 실로 어수선산란하달지 질서정연하달지 도통 판단할 수가 없었다. 기동주의자든 화력주의자든 그도 아니면 요새주의자든 간에, 가배와 연초의 무제한 보급 없이는 버티기 힘들 환경이었다.
맹약군 사령부의 아주 평범한 일상이다.
이 광경도 이제 앞으로 하루면 작별이다.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 대한제국 황제 이대봉의 어깨 위에서 짓누르던 거대한 무게추를 훌훌히 털어주었다. 이제 단 하루, 하룻밤만 지새우거든 그 짐은 일본제국 천황에게로 넘어갈 것이었다. 패자(霸者)란 참으로 거치적거리고 피곤한 자리였다.
얼굴에 퍼져나가는 미소를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는지, 손으로 볼을 살살 문지르던 이대봉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탁상 위에 놓인 찻잔에서 퍼져 나오는 아련한 다향을 즐기며, 그는 아늑함 속에 뛰어들었다. 지금 그의 시선이 닿고 있는, 벽에 걸린 사진들과 문서들과 기념물들이 계속 남아서 그가 맹약 패자로서 지나온 여정을 증언해 줄 것이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시선은 이내 옆에 걸린 지도로 옮겨갔다. 그로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사이 얼마나 다사다난했던가?
재임 초부터 대청한국을 위협하던 대몽한국과 그 뒷배인 노서아 제국과의 육상 충돌은 한때 일촉즉발까지 갔다가 겨우 일단락 지은 것이 작년의 일이었다. 저기 걸린 곰 머리 박제보다도 그것을 선물해 오던 순간 몽골 한의 그 굴욕스러워하는 표정이 더 값진 전리품이었는데, 그 순간은 사진을 남길 수가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노서아 쪽과는 반대편에서 신경전을 벌이던 북미연방도 좌우좌 연합, 그러니까 삼란연합의 부상과 함께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덕분에 관계가 급진전하였다. 하기야 세상에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아무리 세 나라가 과거 가까웠던 적이 있기로서니, 그리고 합스부르겐시스의 로마제국이 유럽의 패자로 부상했기로서니, 서로 다른 사상과 체제를 지닌 세 나라가 연대할 줄이야.
이들은 모인 구성원들만큼이나 그 이름도 참 괴상하기 그지없었다. 삼란조약 당시 이렇게나 차이가 큰 자신들이 의기투합을 해냈다고, 각자가 서로 상대의 좌파와 우파에 서 있다면서 좌우좌라는 말이 나와서 그리 이름 붙였다던가? 기묘한 일이었다. 그로서는 아직도 프랑스의 파시스트들과 잉글랜드의 공산주의자들, 네덜란드의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들이 서로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좌우지간 그들의 충격적인 등장과 함께 세계정세도 급변하였다지만, 자신은 올라타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이대봉은 스스로 자부했다. 로마제국과 황국맹약이, 그리고 삼란연합과 노서아 제국이 각각 연대하여 서로 견제하고 북미연방이 한 발짝 떨어져서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 현시대는 대체로 평화로운 듯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상대에게 주먹을 휘두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본디 평화를 사랑해 마지않는 이대봉으로서는 작금의 상황이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다.
그는 몸을 세워 탁상 위에 올려둔 모형들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기차와 자동차와 항공기, 그리고 우후죽순 솟은 마천루와 장엄한 정경들. 많은 것들을 생각해 두었으나, 내적으로도 산적한 문제들 탓에 모두 착수할 수는 없었다. 맹약의 영향권 내에서 날뛰는 삼공화주의자들을 찍어 눌러야 했고, 바깥에서 음험한 시선을 보내던 다른 열강들에 맞서서 강병에 힘써야 했다. 특히 이놈의 맹약군을 벼려내는 것은, 가맹국들의 무장력을 한데 모으는 것은 몹시도 지난한 일이었다.
대한제국 육군과 대청한국 육군은 노서아 제국의 거대한 몹집과 대몽한국의 기민함을 가장 두려워했고, 일본제국 해군과 유구제국 해군은 북미연방의 압도적인 해양력을 경계했다. 그 와중에 팽창욕 넘치는 일본제국 육군과 대한제국 공수군, 대청한국 황국위병, 유구제국 해병군 등은 대순제국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북역을 탐할지 남벌을 꾀할지는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했다.
대한제국 보위총국과 헌병군, 대청한국 금위대, 일본제국 특별고등경찰대와 육군 헌병대, 내무군은 점령지 치안 업무까지 떠안는 것이 꺼려서인지 그런 건 모르겠고 국내 불순분자들이나 강력히 때려잡자고 어깃장을 놓았고, 대한제국 전투경찰대와 일본제국 해군 특별경찰대, 보통경찰대, 대청한국 기마경찰대, 유구제국 경찰예비대는 또 괜히 평화로운 지역을 들쑤시고 다녀서 일거리를 늘린다며 그들을 상대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한제국 민보군이나 일본제국 특설지구경비대 같은 이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전쟁만은 피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자기네 권한과 자원을 맹약군에 넘겨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을 뚫고서, 이대봉은 맹약 직속군을 꾸려내고 그들이 사고 치지 않게 붙들어 매어왔던 것이다. 비록 맹약군과 나머지 각국군 간 알력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생겨나기는 했으나, 차라리 이렇게 쪼개져 있는 것이 누구 하나가 섣불리 사고를 치지는 못하리라고, 이대봉은 스스로 위로하였다. 오히려 지금처럼 시련을 딛고서 이것을 어떻게든 민간 차원까지 확대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꿈꿔온 번영하는 세상을 이룩할 진정한 방법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 * *
4국의 정예들이, 기병과 보병이, 포문과 장갑차량이 미동도 없이 햇살을 받으며 도열한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하늘에서는 항공기들이 곡예비행을 하면서 맹약 가맹국들의 국기를 하늘에 펼쳐내었고, 각양각색의 대포들이 축포로써 군악대와 화음을 맞추었다. 저 먼 외만주에서 여송까지 전혀 다른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만주의 대칸 아이신기오로 이힌은 새삼 선조들의 현명한 결정에 감사했다. 일찍이 대한과도 겨루고 순나라와도 싸우고 몽골과도 맞서던 조상들은 몽골 놈들이 노서아를 등에 업자 발 빠르게 대한과 손을 잡았다. 대한과 함께함으로써, 그들은 바다 건너 새 문명 질서와 연결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잘해봐야 몽골 놈들처럼 노서아의 주구로 전락하든가 아예 순나라 놈들처럼 언제 식민지가 될까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리라.
이제 패자 이임식은 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한제국 황제가 차기 패자 예정자인 일본제국 천황에게 패자 사령장을 넘기고 선언만 하면 끝나는 것이다. 천황의 임기가 끝나거든 그다음은 이힌 자신이고, 자신 다음에는 유구황제가 넘겨받기로 정해져 있었다.
물경 만 단위에 근접한 인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경례하는 광경에 그는 전율했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다채로운 제국은 로마제국이며, 가장 드넓은 제국은 노서아일 것이고, 가장 부유한 것은 북미연방일 것이나, 가장 거대한 힘은 제국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결집한, 제국들의 힘으로 빚어낸 황국맹약일 것이다.
그렇지마는.
하지만 그 맹약을 버텨내야 할 반고(盤古)는, 아틀라스는 과연 어떨까?
그는 시선을 가까이로 옮겼다. 단상 앞에는 식순의 마지막을 위하여 대한황제와 일본천황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이힌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것이 자신의 미래였기에, 특히나 천황과 같은 처지가 될 예정이기에 그는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황제가 희희낙락한 기분을 숨기려고 애쓰는 것과 달리, 일본천황은 벌써 중압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분명 얼굴은 살이 잘 올랐건만, 이힌의 눈에는 어째 꽤 수척해 보이는 듯도 하였다.
그러한 감상을 뒤로 한 채, 대한황제가 일본천황에게 사령장을 건네는 그 순간을 목도하던 참이었다.
"이것으로 패자 이임이 완료되었음을 선―."
"폐하! 급보이옵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사열 장병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고, 대한황제와 일본천황은 서로 사령장을 붙잡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천황의 구겨진 표정이 황제의 얼굴에까지 전이되는 모습만이 시간이 정지한 게 아님을 드러낼 뿐이었다.
식장에 난입한 정보참모는 새파랗게 질려서는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일랑 감히 하지도 못하고 그저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분명 본부를 지키고 있었을 터인데, 무전이나 전령을 보내어 조용히 처리할 생각조차 못 하고 식장까지 부리나케 달려온 모양새를 보아하니 보통 일이 아닐 성싶었다.
"카..캉에서 삼란연합의 의장이 암살당했사옵니다! 배후로 삼공화주의자들이 지목되었사온데, 삼란연합 측이 우리 책임을 물어 최후통첩을 보내왔고, 노서아 제국이 개전 시 개입을 확인했나이다! 또한, 로마제국도 우리를 도와 참전을 선언했사옵니다!"
"뎃?!" "엩?!"
아, 저것이 '얼굴이 시커메지다.'라고 하는 게로군. 그런데 이러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지?
이힌은 문득 유구황제는 무슨 심정일지 궁금해졌다. 그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유구황제를 흘깃 쳐다보았다. 전쟁에 벌어졌구나 싶은 착잡함이 드러나면서도, 내심 지금 저 자리에 자신이 서 있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물론 이힌 또한 그러했기에, 그를 향해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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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공화주의자: 양호 농민공화국, 에조공화국, 난방공사의 잔당 및 그 정신적 계승자들.
로마제국: 합스부르크 황조 로마제국. 구 신성로마제국과 구 (동)로마제국의 정식 국가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