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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기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 고 정희 시 ’ 사랑법 첫째‘
詩를 쓰듯 설렁대는 말들을 일격에 눕히고 성나는 말과 말
사이를 잘라냅니다.
詩를 쓰듯 보다 많은 생략법과 저녁 어스름 같은 침묵의
공간 안에 한 생애의 여유를 풀어 버리고 두 귀를 쭈뼛히 세워 동서남북으로 뻗은 가지를 자릅니다.
동서남북으로 뻗은 화냥기를 자르고 자르며 돋아나는 아픔까지 잘라냅니다.
자존심 부드러운 열 손가락으로 詩를 완성하듯 마침표를 지워 버립니다.
두 배의 객토를 뿌리 위에 얹습니다.
- 고 정희 시 ‘ 사랑법 넷째 ‘
[이 時代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4.
미리 늙은 살 이쪽저쪽 도려내고
톱니처럼 두 마음 꽉 들어맞을 때
두 마음 매인 말 엉덩이
혼신의 채찍으로 후려치거라
이십사 시간 신경을 죄어
한쪽으로 한쪽으로 달리게 하라
먼지 자욱하고 돌멩이 날으나
뒤돌아보아서는 아니 되느니
마차가 빠를수록
먼 곳을 보거라
- 고 정희 시 ‘ 사랑법 일곱째‘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그림자 멀리멀리
얼음짱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 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어기 떡취 얼레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 고 정희 시 ‘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
* (아름다운 사람 하나) 들꽃세상. 1990.
월정사 부처님처럼 마음을 비우고 잠드는 밤에 마음 저켠 벌판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여리게 혹은 강하게 비가 내렸습니다 눈물보다 투명한 그 빗방울들은 삽시간에 하늘의 절반을 적시고 오대산 구상나무 숲을 적시고 우수수 우수수수수 부처님 발목 밑에 내려와 잠들지 못하는 새벽 풀잎 옆에 오랑캐꽃으로 피었습니다 은방울꽃으로 피었습니다 초롱꽃으로 피었습니다 바늘꽃, 두루미꽃으로 피었습니다 사랑꽃, 이슬꽃으로 피었습니다 아..... 신록으로 꽉 찬 오월 언덕에서 햇빛 묻은 미루나무 몇 그루 아름다운 이별처럼 손 흔들고 있었습니다
- 고 정희 시 ‘ 사랑‘
나직이 그러나 힘차게
소우주의 붕괴가 시작되고
그 붕괴의 갈기를 날리며
우람하게 우람하게 첼로는 울었다
미증유의 혼돈이 결을 내며 쓰러졌다
아 억 겹의 자웅도 열 시에 열렸다
백 미터 전방으로 물러앉은 산맥들이
다섯 개의 선처럼 떠올라 울고
불 번쩍하는 정신의 섬광
슬픔의 급소마다 찬란하게 꽂혔지
해방이다 해방이다 해―방―이―다
무서운 피돌기가 시작되면서
점차 붕괴는 붕괴가 아니었어
점차 음악은 음악이 아니었어
드디어 첼로는 첼로가 아니었어
그것은 하느님의 바른손이 되어
우주의 덜미를 흔들고 흔들고 흔들고
그것은 하느님의 왼손이 되어
숯이 된 가슴팍에 횃불을 박았어
오 정신에 의한 정신을 위한 정신의 르네상스,
그때 나는 결연히 마주쳤지
어지러운 정신의 광휘를 보았지
그 이후 나는 믿게 되었어
한 사람의 정신이 첼로가 되는 날
한 사람의 슬픔이 첫눈 같은 詩가 되는 날
우주는 새로이 탄생된다는 것을
나는 간절히 꿈꾸게 되었네
- 고 정희 시 ‘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
[이 時代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92(1983).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 고 정희 시 ‘ 봄비 ’
* 지리산의 봄, 문학과 지성사, 1987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 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 고 정희 시 ‘가을 편지’
어머님과 호박국이 그리운 날이면
버릇처럼 한 선배님을 찾아가곤 했었지.
기름기 없고 푸석한 내 몰골이
그 집의 유리창에 어른대곤 했는데,
예쁘지 못한 나는
예쁘게 단장된 그분의 방에 앉아
거실과 부엌과 이층과 대문 쪽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그분의 옆얼굴을 훔쳐보거나
가끔 복도에 낭랑하게 울리는
그 가족들의 윤기 흐르는 웃음소리,
유독 굳건한 혈연으로 뭉쳐진 듯한
그 가족들의 아름다움에 밀려
초라하게 풀이 죽곤 했는데,
그분이 배려해 준
영양분 가득한 밥상을 대하면서
속으로 가만가만 젖곤 했는데,
파출부도 돌아간 후에
그 집의 대문을 쾅, 닫고 언덕을 내려올 땐
이유 없이 쏟아지던 눈물.
혼자서 건너는 융융한 삼십 대
- 고 정희 시 ’ 객지‘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3.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따습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턴가 눈물은 내 시편들의 밥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불혹의 나이라는 마흔의 고개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띤 소중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여의었다. 돌연한 어머님의 타계가 그렇고 스승의 죽음이 그렇고 문단 선배의 죽음이 그렇다. 또 어느 때보다도 많은 젊은이들이 가혹하게 민주주의 제단에 바쳐졌다. 나른한 어둠이 나를 덮치려 하고 있다. 멈추지 않고 가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미래인데도......
- 1987년 가을, 고 정희 ‘自序 ‘
詩쓰는 행위가 곧 신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詩와 행동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구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나의 시가 관심하는 문제는 삶 자체이지 결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우리의 삶의 영역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통의 문제들이 곧 우리 삶의 현장이며 그것들과 내 삶이 부딪는 장소에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나의 시는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의 고뇌의 궤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가도 사회학자도 경제학자도 아니지만 개개인의 삶이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들의 규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러한 제도적 억압의 굴례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 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였다.
- 고 정희 ‘ 시집 뒤표지글 ‘
[이 時代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92.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 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에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형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 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 고 정희 시 ‘ 관계’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고 정희 시 ‘ 지울 수 없는 얼굴 ‘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 고 정희 시 ‘ 땅의 사람들 6 ‘
[지리산의 봄], 문학과 지성사, 1995.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 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 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린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 고 정희 시 ‘ 묵상 ‘
하루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 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 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을 들어 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 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 앞에 드넓다
- 고 정희 시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 사발을 들어 올릴 때‘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 고 정희 시 ‘ 하늘에 쓰네 ‘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니
뿌리 깊으면야
밑동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당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 정희 시 ’ 상한 영혼을 위하여 ‘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
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
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 고 정희 시 ‘ 쓸쓸한 날의 연가 ‘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 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고 정희 시 ‘ 겨울 사랑 ‘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 고 정희 시 ’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무정한 이여, 하고 소리쳐 부르면 앞산이 그 소리 삼켜 버리고 다시 무정한 이여, 하고
부르면 뒷산이 그 소리 삼켜 버리고 정말 무정한 이여, 하고 먼 산 향하여 토악질하면 안산
에 주룩비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일시에 안산에 적시는 주룩비 과천을 적시고 군포를 적시고 포일리를 적시는 주룩비 끝내
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주룩비, 내 생의 목마름 조금 적실 수도 잇으련만, 아아, 주룩비, 잠
들지 못하는 것들 품어 함께 노래할 수도 있으련만, 외로움의 우산 밖으로 밖으로 미끄러져
내려 빠르게 떠나가는 물줄기는 꼭 당신 뒷모습 같아 나는 서러움에 목이 메고 어디선가
소쩍새 우는 소리로 사랑의 축대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 고 정희 시 ‘왼손가락으로 쓰는 편지 ‘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네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 고 정희 시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
[아름다운 사람 하나 / 들꽃세상]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
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의 등을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등을 기대지 못하고 돌아
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도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건너지 못할 강 하나
를 사이에 두고 미루나무잎새처럼 안타까이 손 흔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도 북한강이 흐르
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상에 안식이 깃드는 황혼 녘이면 두 눈에 흐르는 강물들 모여 구만리 아득한 뱃길을 트고
깊으나 깊은 수심을 만들어 그리운 이름들 별빛으로 흔들리게 하고 끝끝내 못한 이야기들 자
욱한 물안개로 피워 올리는 북한강 기슭에서, 사랑하는 이여, 내 생에 적셔 줄 가장 큰 강물
또한 당신 두 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고 정희 시 ‘ 북한강 기슭에서‘
당신이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저 쓸쓸한 황야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가슴을 열었더라면 저 산등성이 날아오르는 새들이 저무는 하늘에 신의 악보를 연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더라면
세상은 한 발짝씩 천국 쪽으로 운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의 기쁨과 편안한 강기슭과 아름다운 섬의 일박 이 일이 또다시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합니다.
우리들이 함께 춤추던 밤의 힘찬 포옹과 무심한 새벽 달빛과 무정한 세월 뒤에 속절없이 피고 지는 산꽃 들꽃이 또다시 온몸을 들썩거리게 합니다.
아아 자나 깨나 내 머리맡에 너무 큰 하늘이 내려와 있어 밤마다 서슬을 새운 별들이 명멸하고 적막한 산천 처마 밑에서 노여운 내가 마녀처럼 울고 있습니다.
- 고 정희 시 ‘ 상처 ‘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
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
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 둘 수는 없습니다.
- 고 정희 시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 1990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 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 고 정희 시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
아아 그윽해라 눈이 내리네
님 그리운 날 눈이 내리네
평화롭게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어둠의 들판 저편
우리들 부끄러운 기억을 덮고
우리들 고통스러운 상처를 덮고
우리들 슬픔의 집을 덮어
백리에 뻗은 백두 벌판
사랑의 광야에 이르네
아아 부드러워라 눈이 내리네
님 보고픈 날 눈이 내리네
포근하게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사랑의 광야 저편
우리가 가야 할 언덕을 덮고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을 덮고
우리가 건너야 할 강을 덮어
천리에 굽이치는 백두 난봉,
사랑의 숲을 만드네
아아 이뻐라 눈이 내리네
님 만나러 가는 날 눈이 내리네
속삭이듯 겨울 하루 내리는 눈은
기다림의 광야 저편
살아있는 날의 가벼움으로
죽어있는 날의 즐거움으로
마음을 비운 날의 무심함으로
우리를 지나온 생애를 덮어
만리에 울연한 백두 영혼,
사랑의 모닥불로 타오르라네
- 고 정희 시 ‘ 사랑의 광야에 내리는 눈 ‘
* 시집 : 아름다운 사람 하나
조용하거라, 공포여, 고통이여.
곧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눈만 감고 가만히 있으면
너는 반드시 가루가 되어 부서질 터이니.
기다리거라, 분노여, 불안이여.
세계가 끝났다고 네가 생각하는 날,
참으로 끝나는 것은 다만 너의
작디작은 심장의 움직임뿐일 것이니,
나를 떠나거라, 애정이여, 동정이여.
네가 집착한 온갖 대상은
손가락으로 흘러 떨어지는 모래보다
더 순간만의 것이고 더 무인 것이니,
잠자자, 내 감각, 내 피부......
우주의, 신의, 사람들의 고통을
인공적으로라도 덜 느낄 수 있도록!
- 고 정희 시 ‘ 저녁 기도 ‘
꽃은 누구에게나 아름답습니다
호박꽃보다야 장미가 아름답고요
감꽃보다야 백목련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우아하게 어우러진 꽃밭 앞에서
누군들 살의를 떠올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의 적이 숨어 있다면
그곳은 아름다운 꽃밭 속일 것입니다
어여쁜 말들을 고르고 나서도 저는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모나고 미운 말
건방지게 개성이 강한 말
누구에게나 익숙지 못한 말
서릿발 서린 말들이란 죄다
자르고 자르고 자르다 보니
남은 건 다름 아닌
미끄럼 타기 쉬운 말
찬양하기 좋은 말
포장하기 편한 말뿐이었습니다
썩기로 작정한 뜻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에도
몹쓸 괴질이 숨을 수 있다면
그것은 통과된 말들이 모인 글밭일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데 서른 다섯 해가 걸렸다니 원)
- 고 정희 시 ‘ 현대사 연구 1 ‘
푸른 악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 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 고 정희 시 ‘ 강물 ‘
1.
마치 카프카의 '성'에 사는 케이, 성주 케이 같다고나 할까
나는 오늘밤 혁명을 꿈꾸네
동반자적 부활을 꿈꾸네
오만 오천 에이커의 평원 속에 있는
외로움의 집의 사건을 꿈꾸네
2.
확실한 알리바이를 지우기 위하여
눈 내리는 광야를 걷고 또 걸어
나는 그대 사는 성곽에 도착하네
오만 오천 에이커의 대평원 속에
이쁘게 패인 내 두 발자국을
하얀 눈이 내려 흔적을 지우는 모습은 엄숙하네
그래 어떤 사람들은
인생이란 자손과 친구를 만드는 것이란 부질없는 말을 했지
오만 오천 에이커의 외로움을 건너봐
인생은 부질없는 엄숙함이란 생각이 드네
3.
외로움 사람들의 눈물이 하늘로 올라가
눈이 되어 내려오는 밤이네
외로움에 둘러싸인 그대 성곽
단단한 빗장으로 고요한 그대 성곽 밑에서
나는 잠시 내가 지금 건너온 외로움의 연혁을 되돌아보네
지나온 길은 언제나 황혼빛이지
상처 자국마다 분홍 꽃잎을 달아주는 황혼의 따스한 손길이
내 박동을 진정시키네
4.
저 성곽의 삼엄한 경보장치를 뚫고
그대 모르게, 바람처럼
성곽을 빠져나올 한 외로움을 기다리는 일은 사뭇 비장하네
검은 망토자락을 휘날리며 달려 나오는 그대 외로움과
천둥벌거숭이 내 외로움이 만나
두 손을 꼬옥 맞잡고
세상이 그윽하게 광야로 달려 나가
성곽이 무너지게 얼싸안는 일,
광야 한복판
외로움의 장작불 괄게 지펴놓고
두 영혼의 횃불을 돌리며
내게 강 같은 평화
우리 샘솟는 기쁨 노래하는 거,
오만 오천 에이커에 덮인
비정하고 비정한 눈을 후루룩 녹여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춤추는 밤의 혁명을 위하여
나는 지금 꿈의 봉화를 올리네
내 겉옷과 속옷을 벗어
그대 성곽 하늘 높이 봉화를 올리네
5.
오 저기 그대 외로움이 빠져나오네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사는 넋이란 넋들이 산지사방에서
아아아아.... 달려 나오네
아~아~아~아~ 내가 달려 나가네
벌거벗은 외로움이 와지끈 얼싸안고
혁명의 사다리를 올라가네
6.
그대 모르시게
벌거벗은 한 외로움과 다른 외로움이 만나
오만 오천 에이커의 벌판에 짜놓은 들비단을 보는가?
바람결에 들비단 흔들리는 모습 보는가?
쑥부쟁이 구엽초 당귀꽃 쥐똥오줌풀
바랭이 삐비꽃 바늘각시원추리꽃
가람에 하늘비단 어리는 고요,
부드러운 혁명의 자궁을 보는가?
7.
눈 덮인 광야를 걷고 또 걸어
굳건한 그대 성곽을 바라보며
오만 오천 에이커의 외로움 허물고 나면
저기 어스름처럼 서 있는 죽음의 그림자,
인생의 설한인들 뭐 그리 대수랴
죽음이 다시는 두렵지 않네
부활의 아침이 그닥 멀지 않네
8.
대저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옷을 벗는 일이네
대저 혁명이란 무엇인가, 황야에 들비단 흔들리는 일이네
벌거벗은 두 몸에 하늘비단 굽이치는 모습 바라보는 아침에는
이별이 다시는 무섭지 않네
- 고 정희 시 ‘ 성곽에 둘러싸인 외로움 건드리기 혹은 부활 ‘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종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뇌졸중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자궁암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섬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풀잎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북풍한설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수중고혼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적막강산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흉곽진동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유니폼을 입고 새벽 도성을 비질하는 사람
아슬아슬한 절벽에 매달려 번쩍이게
유리창 닦고 있는 사람
"라이스는 나이스다"
무논에 모포기 심고 있는 사람이여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바람 부는 광장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어두운 골짜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서러운 강기슭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눈물샘을 모른다
- 고 정희 시 ‘ 눈물샘에 관한 몇 가지 고백 ‘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계시는 그대여
우르르 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 고 정희 시 ‘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오월의 융융한 햇빛을 차단하고 아파서 몸져누운 날은
악귀를 쫓아내듯 신열과 싸우며 집 안에 가득한 정적을
밀어내며 당신이 오셨으면 당신이 오셨으면 하다 잠이 듭니다.
기적이겠지 기적이겠지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제자리로 돌아간 이 대낮에
이심전심이나 텔레파시도 없는 이 대낮에
당신이 내 집 문지방을 들어선다면
나는 아마 생의 최후 같은 오 분을 만나고 말 거야
나도 최후의 오 분을 셋으로 나눌까
그 이 분은 당신을 위해서 쓰고
또 이 분 간은 이 지상의 운명을 위해서 쓰고
나머지 일 분 간은 내 생을 뒤돌아보는 일에 쓸까
그러다가 정말 당신이 들어선다면
나는 칠성판에서라도 벌떡 일어날 거야
그게 나의 마음이니까 그게 나의 희망사항이니까… 하며
왼손가락으로 편지를 쓰다가 고요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잠이 듭니다.
흔들림이 끝난 그 무엇처럼,
- 고 정희 시 ‘ 아파서 몸져누운 날은‘
오월이라는 의미를
그대 저녁밥상에서 밀어내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밥이다
오월이라는 눈물을
그대 마른 가슴에서 닦아내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칼이다
오월이라는 함성을
그대 출세진급 표에서 삭제하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역사성이다
오월이라는 상처를
그대 장래 희망사항에서 내려놓지 말라
광주는 그대 부활의 땅이다
오월이라는 주먹밥을
그대 축복 가운데서 외면하지 말라
광주는 그대 진실의 징표이다
오월이라는 기다림을
그대 겨울 난롯불에 화장하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봄, 우리의 봄,
서울의 봄이다
- 고 정희 시 ‘우리의 봄, 서울의 봄 2‘
가을바람과 옷깃을 스친 뒤 세상이 지루하여 낮술을 마셨습니다
쨍그렁 소리가 나는 빈 술잔에 칸나꽃대 같은 노여움을 따라 부으며
꿈에 본 수미산도 잠기게 하고 날개 달린 낮달도 띄워 당신 생각 단풍으로 아롱지도록 술잔을 채우고 또 채웠습니다
- 고정희 시 ‘노여운 사랑 ‘
* 시집 :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들녘에 고개 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열어놓으니
만리에 용 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 고 정희 시 ‘ 꿈꾸는 가을노래 ‘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 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 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 궁상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뿌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 -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솟는 사랑의 일곱 가지 무지개
이 세상 끝 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 고 정희 시 ‘ 더 먼저 더 오래‘
남녘 태백산맥에서 발원하는 봄기운과
북녘 백두산맥에서 뻗어 내린 봄기운이
내려오다 올라가다 얼싸안는 곳에서
어여쁘구나 지리산이여
대명천지 어머니들 일어나
장엄한 젖줄을 쓸쓸한 땅에 물리니
그 한줄기는 소백산맥으로 받아내고
그 한줄기는 노령산맥으로 받아내고
그 한줄기는 백악산맥으로 받아내고
그 한줄기는 차령산맥으로 받아내고
그 한줄기는 광주산맥으로 받아내는 곳에서
눈부시구나 지리산이여
별건곤 어머니들 일어나
둥글디 둥근 수평선을 이루며
수려한 치마폭을 황량한 땅에 덮으니
호남평야 일으키러 영산강 달려가고
김제평야 일으키러 낙동강 달려가고
경기평야 일으키러 임진강 달려가고
김해평야 일으키러 섬진강 달려가고
내포평야 일으키러 금강 달려가고
나주평야 일으키러 보성강 달려가는 곳에서
영원하구나 지리산이여
시방세계 울창한 어머니들 일어나
봄기운 휘몰아 산천초목 흔드니
그 바람 압록과 청천에 이르고
그 바람 대동과 두만에 이르고
그 바람 금강 일만이천봉에 이르고
그 바람 묘향산과 구월산에 이르고
그 바람 북만주땅 요동벌에 이르고
그 바람 북방을 휩쓰는 곳에서
우뚝우뚝하구나 지리산이여
- 고 정희 시 ‘온누리 봄을 위해 부르는 노래 ’
『지리산의 봄』, 1987, 49―50
한 곳으로 한 곳으로 달려가던 끈
탁 트인 하늘에 겁 없이 놔주고
흐르는 바람결에 아쉬움도 놔주고
자유가 서러워 서러워 울었지요
풀잎 뜯어 날리며 울었지요
내 쪽으로 부는 바람 있으리라 믿으면서
네 쪽으로 가는 길 있으리라 믿으면서
귀뚜라미 우는 쪽에
사랑을 묻었지요
- 고 정희 시 ‘ 이별노래’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 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줄을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로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 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선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 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기다림 썰어 넣고
스무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 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 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오 년 묵은 상처도 뽑아 넣고
칠 년간 미련이며
구 년 된 슬픔도 다져 넣고
참나무숯불에 괄게 괄게 달이니,
아 사랑의 길눈 밝아지고 있는지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스무아흐레 동안 그치지 않았습니다.
- 고 정희 시 ‘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
한시에는 신새벽 건너오는 바람이더니
세시에는 적막을 뒤흔드는 대숲이더니
다섯 시에는 만년설봉 타오르는 해님이더니
일곱 시에는 강물 위에 어리는 들판이더니
아홉 시에는 길 따라 손잡은 마을이더니
열한 시에는 첫눈 내린 날의 석탄불이더니
열세 시에는 더운 눈물 따라 붓는 술잔이더니
열다섯 시에는 기다림 끌고 가는 썰물이더니
열일곱 시에는 깃발 끝에 걸리는 노을이더니
열아홉 시에는 어둠 속에 떠오르는 둥근 빛이더니
스물한 시에는 불바다 달려가는 만경창파이더니
스물세 시에는 빛을 누빈 솜옷이더니
스물다섯 시에는 따뜻하고 따뜻하고
따뜻하고 먼 나라에서
아름다운 사람 하나 잠들고 있다
- 고 정희 시 ‘ 그대 시간’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돼
었
다
- 고 정희 시 ‘ 너. 여섯‘
[앵무새의 혀 :시인선-김현 編]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친구가
경기도 들녘에서 꺾어온
들국 한아름을 꽂아놓고
불현듯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그것은 시골에 그냥 핀 들국이 아니라
고향을 다녀올 때 본
어머니의 망연한 눈빛 같기도 하고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수유리에서 해남쯤으로 떠도는
못다 핀 망령들의 이름 같기도 하고
좀 더 길게 음미하노라면
서른아홉 살의 목숨을 거두고
두 마리, 빈곤을 상징하는 노새에 끌려
아틀랜타 시가지를 빠져나가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를 따르던 흑인영가 같기도 하고
- 고정희 시 ‘ 들국‘
* 시집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한 곳으로 한 곳으로 달려가던 끈
탁 트인 하늘에 겁 없이 놔주고
흐르는 바람결에 아쉬움도 놔주고
자유가 서러워 서러워 울었지요
풀잎 뜯어 날리며 울었지요
내 쪽으로 부는 바람 있으리라 믿으면서
네 쪽으로 가는 길 있으리라 믿으면서
귀뚜라미 우는 쪽에
사랑을 묻었지요
- 고정희 시 ‘아름다운 사람 하나 ’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기운에 구워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 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성신 술잔 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 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 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 보고
덜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인두 질 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선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 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 고 정희 시 ‘날개 ‘
장미꽃 이불 얘야, 인생이 추울 때 꺼내 덮을 수 있는 명주솜 이불 두어 채 마련하자꾸나 네가 아무리 당당하게 살아도 혼자 가는 뒷모습 한없이 춥구나 어머님 살아생전 마련해 주시마던 명주솜 이부자리 그대로 비워둔 채 홀연히 저 세상 떠나셨지요 청천 날벼락같은 그 슬픔의 자리 찬바람 숭숭한 그 자리에 그대 오른손이 모르게 은밀히 놓아주신 장미꽃 이불을 처음 꺼내 덮었습니다 내 인생이 추워서가 아니라 이 이불속에 서리서리 펼쳐주신 그대 곡진한 사랑 음미하고 싶어서지요 이 이불 위에 피고 지고 다시 피는 한 세상 따뜻함 품고 싶어서지요 장미꽃 수 천 송이 잔잔한 이불 밑에 우리 동행하는 뜻 나란히 잠든 밤은 서천서역국 달그림자 쪽으로 수란 잎이 벙그는 밤입니다 장미 향기 수 만 리 은은한 이불 밑에 우리 함께 가는 길 나란히 누운 밤은 가난한 지붕마다 별들이 내려와 사랑의 보석을 깔아놓은 밤입니다 장미 바늘로 누빈 안식의 이불 밑에 이쁜 우리 꿈 나란히 꽃 핀 밤은 등이 추운 것들 나란히 나란히 쓸쓸한 마음들 나란히 나란히 걸어 들어와 동쪽 바다 밑에서 해 하나씩 건져 올리며 따뜻하고 따뜻하게 얼싸안는 밤입니다
- 고정희 시 ‘ 장미꽃 이불‘
해거름 녘 쓸쓸한 사람들과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봄 눈 파릇파릇한 숲길을 지나
아득한 강물이 내게로 왔네
이십 도의 따뜻하고 해맑은 강물과
이십 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이
서로 겹쳐 흐르며 온누리 껴안으며
삼라의 뜻을 돌아 내게로 왔네
사흘 낮 사흘 밤 잔잔한 강물 속에
어여쁜 숭어 떼 미끄럽게 춤추고
부드러운 물미역과 수초 사이에서
적막한 날들의 수문이 열렸네
늦게 뜬 별 둘이 살 속에 박혔네
달빛이 내려와 이불로 덮였네
저물 무렵 머나먼 고향으로 흐르던
따뜻한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외로운 사람들의 낮과 밤 지나
기나긴 강물이 내게, 내게로 왔네
사십 도의 따뜻하고 드맑은 강물 위에
열두 대의 가야금소리 깃들고
사십 도의 서늘하고 아득한 강물 위에
스물네 대의 바라춤이 실렸네
그 위에 우주의 동행이 겹쳤네
- 고 정희 시 ‘ 따뜻한 동행 ’
그대 눈썹 밑에 흐르는
미시시피 물안개에
사흘을 넋 잃다
그것을 가지면 밥이 되고
갖지 않으면 돌이 된다
- 고 정희 시 ‘ 시인(詩人)‘
*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 지성사, 1983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 고 정희 시 ‘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오라, 죽음이여
동구 밖에 당도하는 새벽 기차를 위하여
힘이 끝난 폐차처럼 누워 있는 아득한 철길 위에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야 하리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
원으로 깍지 낀 사람들의 등뒤에서
무수한 설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린다
- 고 정희 시 ‘부음’
* [지리산의 봄] '94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 들었다
- 고 정희 시 ‘ 소외 ‘
내 친구 천재순(千在純)의 아가는 웃고 있었어
예쁜 뺨과 하얀 손가락을 가진
千在純의 아가는 방긋 웃고
따라 웃는 千在純의 거울 속에서
그리운 어머니를 보았지
어머니일 수 없는 나는
어머니인 千在純을 보았어 그것은
나와 千在純의 거리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인 자와 어머니일 수 없는 자의
고독일 수도 있어 늘 웃는 자와
웃을 수 없는 자의 아픔일 수도 있어
집이 그리운 자의 눈물일 수도 있어
고향을 오래 떠나본 자는 알지
어머니 부르며 돌아오는 밤에
무심코 마주치는 이 층집 불빛과
여럿이 둘러앉은 저녁밥상의 따스함
홀로 오래 떠도는 젊은이는 알지
- 고 정희 시 ‘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고 정희 : 1948년 1. 17. 전남 해남 출생, 한국 신학대 졸업.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할 그 이후'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여권 신장 운동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자유분방한 활동가로서 가정법률상담소 출판. 홍보 책임간사. 여성신문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실낙원 기행><이 시대의 아벨> <눈물꽃> 등을 남겼으며 그 가운데 남도의 가락을 접목시킨 <초혼제>로 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1년 6월 9일 취재차 지리산 등반 중 불의의 실족 사고로 피아골 계곡의 급류에 휘말려 아까운 생애를 마침.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대표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낙원 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 눈물꽃,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 광주의 눈물비, 아름다운 사람 하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Ps) 어떤 여성 시인보다 투철한 여성 해방 의식을 시에 구현한 고정희(高靜熙, 1948~1991)는 “자그마하고 깡마른 몸집에 커다란 두 눈, 연약하면서도 완강한 조선 여자의 골상”을 하고 있던 시인이다. 그는 대학의 여성학 관련 전공 교수들과 ‘또 하나의 문화’ 동인을 결성해 활동하고, 1988년 『여성신문』의 창간에 발 벗고 나서 편집 주간을 맡는다. 시인은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나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지 않으며 정치 현실과 예술의 혼을 따로 떼어놓지 못한다. 삶과 이데아는 동전의 안과 밖의 관계이다.”라고 말한다. 남녀 차별과 사회 모순을 꿰뚫어 보며 군더더기 없는 직설적이며 강건한 문체로 여성 해방을 노래한 고정희는 시와 삶을 한 덩어리로 밀고 나간다.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을 낳았기 때문에, // 국토분단 장벽보다 먼저 / 민족분단 장벽보다 먼저 / 남녀분단 장벽 허물 일이 급선무”
작지만 당찬 ‘여성 해방 전사’ 고정희는 1948년 전남 해남에서 평범한 집안의 5남 3녀 가운데 맏딸로 태어난다. 그의 본명은 고성애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무렵의 일이며, 광주에서 나오는 『새전 남』 · 『주간전남』의 사회부 기자로 1970년부터 근무하며 시대 의식과 여성 문제에 눈을 뜬다. 고정희는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 「부활과 그 이후」 등을 추천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79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그는 허형만 · 김준태 · 장효문 · 송수권 · 국효문 등과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과 시창작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한다. 문단에 나온 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 『실낙원 기행』(1981) · 『이 시대의 아벨』(1983)을 펴내며 비평가들의 눈길을 끈 그는 장시집 『초혼제』(1983)를 내고 나서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