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치의 글쓰기가 끝났다고 삶이 갑자기 시작되는 게
아니라서
나는 발코니에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멀리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내가 난간 위에 둔 물컵
을 가볍게 통과한다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웬만하면 어려운 생각들은 밀어내보려고 한다
딱히 갈 곳 없이 돌아다닐 때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힘으로 어디든 도착하는 것처럼
나는 계속 문장을 선택하고 선택은 나를 쪼개놓고 스스
스 사라진다
아, 쪼개진 만큼 가벼워졌다면 나는 걸어 다닐 필요가
없을 텐데
작은 숲을 계속 헤매며 무한을 만들었던 사람은 숲을
나와서 쓴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을 견디는 게 어렵다라고
일기에 숲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모든 빛이 한 번에 몰려든다면 틀림없이 죽을 테지
나는 밝고 집요한 조명을 하나 켠다
잠에 들면 그는 자꾸 운전을 하려 한다
나는 그에게 달라붙은 잠을 뜯어내어 그의 일기를 고친다
일기는 소중하지만 때가 되면 이름을 지우고 아무에게
나 줘버리고 싶기도 하지
열어놓은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나는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일으킨다
그의 베개 밑에 차 키를 몰래 숨긴다
어떤 부적은 당사자가 몰라야 효력이 생긴다
그가 얼굴을 베개에 깊이 파묻은 만큼 내가 침대에서
떠오른다 쪼개진 나의 조각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불면의 시작이자 사랑의 시작이다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다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문학과지성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