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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and Concept of Argentine Tango Music - 아르헨티나 탱고의 기원과 개요 - 1
아르헨티나 음악이라면 탱고가 유명하다. 그러나 탱고는 아르헨티나 전체를 대표하는 음악이라기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으로 특수하게 발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르헨티나 전국에 분포하는 음악은 이른바 폴클로레라고 부르는, 즉 민족음악이다. 아르헨티나에는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 민속무용의 형식이 전해지며, 그 총수는 100개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 주된 것은 북부 고원지방의 칼나바리트, 바이레시트, 서부 안데스산 기슭의 쿠에카, 토나다, 동부 라플라타강 유역의 폴카, 차마메, 페리콘, 그들 여러 지방에 둘러싸인 중앙부의 북쪽지방(산티아고, 코르도바 등의 여러 주)의 삼바, 가트, 에스콘디도, 차카레라, 그보다 남쪽의 팜
파 대초원지방의 마람보 등입니다.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도 라틴 음악의 기본 3요소 중의 흑인요소가 없고 에스파냐계와 인디오계의 2요소로 성립되고 있으며, 위에서 말한 여러 종류의 댄스 리듬은 대부분이 6/8박자(칼나바리토는 예외) 이다. 가트나 차카렐라 등은 그 전형적인 것으로, 6박자와 3박자가 엇갈리는 복잡한 폴리 리듬을 기타로 표현한다. 이는 라플라타강 유역의 차마메가 인접국 파라과이의 음악을 흡수하여 발전한 것으로 보아도 된다. 삼바나 리트라레냐를 주류파로 하는 오늘날의 폴클로레는, 민속음악이라기보다는 멕시코의 음악 칸시온 란체라와 마찬가지로 대중가요라고 하는 편이 적합하다고 할 방향으로 진전되어 왔습니다.
Antonio Banderas - Take The Lead
(안토니오 반데라스 - 주도권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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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엔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탱고라는 나라이다. 탱고가 춤곡이라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탱고는 때론 저속하고, 때론 우아하지만, 항상 그 느낌이 강하고, 리드미컬하며 정열적이다. 무한한 인간의 욕망을 극도로 절제하여 엣센셜하게 표현된 것이다. 탱고의 상징 : 탱고는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갈등을 상징한 것으로, 춤을 자세히 보면 여자는 원주민이고 남자는 막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이주민임을 알 수 있다. 여자 댄서를 두고 남자 댄서 간의 갈등은 땅을 차지하려는 이민자들의 영역 다툼이자 여자를 차지하려는 싸움인 것이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기원
'Tango'라는 단어에는 흑인들이 춤추던 장소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탱고의 어원은 ‘만지다’'맛보다' '가까이 다가서다' '마음을 움직이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비롯되었다. 탱고는 그 어원에 이미 탱고의 초기 발생 배경을 담고 있으며 춤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탱고는 19세기 유럽의 댄스와 댄스 음악이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 산물이다. 탱고의 문화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의 유기적인 결합은 19세기 아르헨티나의 복합적 문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남부 유럽의 고전적인 춤곡과 아프리칸 이주민들의 칸돔베(candombes)의 경쾌한 리듬과 즉흥적인 스텝, 민속음악이 결합된 탱고 음악은 모체, 또는 원조로 쿠바 아프리칸 노예들의 음악
인 느린 하바네라(Habanera)가 시초가 되고 있다. 하바네라는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한 2/4박자의 춤곡으로, 아바나에서 이 우아한 춤곡을 접한 아르헨티나의 선원들에 의해 19세기 중엽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왔다. 쿠바의 하바네라는 아르헨티아에서 더 강한 템포감과 아르헨티나 목동의 노래, Gaucho 목동들이 기타에 맞춰 부르던 즉흥적인 노래인 플라야다스(playadas)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변두리로 들어와 섞이면서 ‘밀롱가'―현재 탱고의 변형된 형식이나 댄스 홀을 지칭한다―라는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이로써 현대의 탱고와 가장 가까운 조상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이 새로운 댄스가 유럽계 이민자들 사이에 성행하면서, 악기를 다룰 수 있고 노래를 좋아하던 이탈리아인들의 음악과 어우러져 현재의 탱고가 발생하게 되었다.
Loreena McKennitt - Tango to Evora
(로레나 맥케니트 - 탱고 투 에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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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월 1일 캐나다,의 매니토바 Manitoba주 모덴 Morden에서 태여났으며 포크와 뉴에이지, 팝, 어덜트 컨템포러리, 켈틱(Celtic) Style을 추구하는 음악인 이며, 아버지는 가축생명보험 설계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난 여가수 로리나 맥케닛 (Loreena McKennitt)는 클래식 피아노와 가수가 되기 위한 연습, 그리고 '하리랜드 스타인(highland style / Scotland. 고지 지방 특유의)' 댄스를 배우며 소녀시절을 보냈습니다, 또한 그녀 자신만의 전통적인 음악 사랑은 위니펙 Winnipeg의 포크 클럽에서 더욱 강하게 되었습니다,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던 '로리나 맥케닛은 수의사가 되였고 그녀의 천부적 재질 중 하나가 음악 사랑이었는
데, 수많은 음악을 들으며 수많은 악기를 다루던 그녀는 특히 '켈틱 하프(Caltic Harp)'의 마력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일랜드(Ireland) 음악의 집중탐구 끝에 그녀는 '온타리오 스트랱포드(Ontario, Stratford)'로 진출하여 포크 클럽 가에서 하프와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게 되고, 토론토에선 스트리트 뮤지션 Street Musician으로 나서는 등 자작곡을 선보이며 스스로 프로모션 투어(홍보여행)에 나서게 된 셈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라벨(label)', '퀸란 도로(Quinlanroad)'를 설립 1985년 데뷔 앨범 '엘리멘탈(Elemental)'을 발표하기에 이르고, 1991년 4집 '더 비짓(The Visit)'으로 캐나다의 그래미로 일컫는 주노 어워드 Juno Award를 수
상 일약 스타덤 Stardom에 오르게 됩니다. 2004년 위니펙 페스티벌에서 평생 공로상, '골덴 밴죠 어워드(Golden Banjo Award / '라이프타임 어치브먼트(Lifetime Achievement)'를 수상 명실공히 캐나다의 국보급 뮤지션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습니다. 레너드 코헨, 조니 미첼, 닐 영, 고든 라이트 풋 Gordon Lightfoot등과 함께 2002년 Manitoba주 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II세가 참석했던 어전 공연에 '헤드라인 퍼포머(Headline Performer)'로 연주, 2002년 Wilfrid Laurier University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7월 매니토바주 를 빛낸 인물로 선정 훈장을 받았습니다, 또한 '로리나 맥케닛은 "깨끗한 바다 지키기"(Cook Rees
Memorial Fund)' 재단과 자연보호협회(Three Oaks Foundation)을 설립, 우리돈 40억 정도의 기금을 조성(자신의 음반/공연수익 중 거액을 헌납)한 아름다운 음악인 입니다. 1860∼70년에 즈음하여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산된 밀롱가는 아프리칸 흑인 노예의 주술적 의식을 표방한, 독특한 싱커페이션을 가진 2/4박자의 카니발 음악 칸돔블레(Candomble)로 진화하고, 이는 탱고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음악이 되었다. 그 밖에 유럽의 폴카와 중남미의 격렬한 축제 음악 살사와 볼레로에서도 그 내용을 흡수하게 된다. 탱고 음악에 함유된 복잡하고 다양한 다문화적 배경은 탱고 음악이 오늘날 인종과 민족에 구애받지 않고, 월드뮤직으로서 폭
넓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요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탱고의 기원에 대해 다소 논란은 있으나, 대체로 1870년대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Boca)라는 부둣가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기원이 다양한 여러 종류의 노래와 춤이 결합되면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187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부 보카 지역으로 아프리카 흑인들과 쿠바 선원들이 모여들었고, 19세기 말 전쟁으로 생계의 기반을 잃은 유럽의 이민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대거 유입되었다.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에 정착하기 위해 힘겨운 생존투쟁을 하였는데, 고달픈 그들의 삶의 애환을 달래주던 춤이 바로 탱고
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된 것은 1880년대이며, 1930년대까지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져, 짧은 시간에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유럽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이주민들로 가득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기가 가득한 이국적인 ‘남미의 파리’의 거주자 중 75% 이상이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 이거나 그들의 자손들이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남쪽에 있는 지저분한 항구인 보카에는 부두와 신생 공업 지대가 인접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극빈층 이주민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이 가난한 서민의 도시에는 유럽의 생활양식 그대
로인 카바레와 음악이 흐르는 선술집과 레스토랑이 보헤미안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고 있었다. 거친 항만 노동자와 도축업자, 밀수꾼과 거리의 여인들이 뒤엉킨 이 도시의 풍경에는 생활에 찌든 노동자의 권태와 고독감이 가득하였다. 이렇게 하층민의 가난한 삶과 체념적인 인생관은 라틴 음악의 격정과 융화되어 탱고 음악의 정서와 내용이 되었다. 흥청대는 밤거리와 어둡고 습기 가득한 보카의 일상은 2/4박자의 강렬한 리듬감과 악센트를 자아내며, 강한 호소력으로 그들의 삶과 영혼을 지배했다. 보카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항구에서 기생하는 도박사·밀수꾼 등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포르테냐 음악’(Musica Portena)이라고도 불렸다.
El Tango de Roxanne " Moulin Rouge"
(록산느의 <엘 탱고> <물랑루즈>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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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탱고 음악의 발전
최초의 탱고 곡은 1880년대에 발표된 ‘Bartolo’로 기록되고 있으며, ‘El Choclo’의 작곡자인 앙헬 비요르도가 기타와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며 장난스럽게 불렀던 노래가 탱고 음악의 원형이었다. 초창기의 탱고는 플루트·클라리넷·기타·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지만 1910년 무렵 ‘El Amancer’의 작곡자인 로베르토 피르포가 처음으로 독일에서 수입해온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사용하면서, 반도네온은 탱고를 특성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은 강력한 스타카토·레가토 주법으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독특한 리듬감을 재현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도구였다. 1910년대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에 의해 제안된 탱고의 기본적인 편성은 ‘오르케스타 티피카’라는 고유한 명칭의 반도네온 2대, 바이올린 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로 구성된 6중주 편성으로 확립되었다. 때로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축소한 반도네온 1∼2대, 바이올린 1∼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의 편성인 ‘콘훈토’는 더 밀도 높은 연주에 사용되기도 했다.
Angel G. Villoldo - El Choclo (Violin: Katica Illényi, Cello: Anikó Illényi)
(엔젤 G. 빌롤도 - 엘 초클로(바이올린: 카티카 일레니, 첼로: 아니코 일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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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o Iglesias - El Choclo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 엘 초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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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가르델은 탱고 음악의 첫 번째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수려한 외모와 아름다운 음색, 뛰어난 작곡 능력을 보유한 그는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탱고 스타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19세기 말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서 유럽과 남미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결합하며 탱고 음악의 특성을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그는 자신이 주연했던 영화에서 13세 소년,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발탁하기도 했다. 가르델은 1937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백 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초기에는 주로 왈츠나 쿠에카·가우초 등의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을 연주하다가, 1917년 최초의 탱고 히트곡 ‘Mi Noche Triste’를 발표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Mi Buenos Aires Querido’는 그의 이름을 오늘에까지 지속시켜주었던 초기 탱고 음악의 명곡들이었다.
Carlos Gardel - Mi Buenos Aires Querido
(카를로스 가르델 - 친애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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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델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그가 뿌린 씨앗들은 하나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가르델과 함께 ‘현대 탱고의 시조’라 불렸던 훌리오 데 카로를 비롯해서 로베르토 필포·프란시스코 카나로·오스발도 프레세도·후안 필리베르토 등이 포스트 카를로스 가르델 시대의 주역으로 초기 탱고의 발전을 진두 지휘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탱고의 또 다른 의미인 무용을 위한 목적을 특화시켰다. 이때부터 탱고 음악은 춤곡의 성격을 전면적으로 띠기 시작했으며, 탱고 음악을 위한 대규모 밴드가 조직되었다. 후안 데 아리엔조와 아니발 트로일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 쿰파르시타’와 같은 정식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을 생산했다. 탱고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1930년대는 탱고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혼란의 시간이었다. 1930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부가 아르헨티나를 점령하면서 탱고 음악은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3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문화를 향유할 수 없었던 폭정 시대에 탱고 음악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탱고가 연주되고, 탱고 춤이 함께 흐르던 클럽과 댄스 홀은 폐쇄되었고, 수많은 탱고 작곡가와 뮤지션들이 블랙 리스트에 오르며, 창작의 날개를 꺾어야만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면서 탱고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탱고 음악은 ‘아르헨티
나 서민들의 자유를 위한 찬가’라는 의미가 보태졌다. 가난한 빈민층의 음악이었던 탱고는 지식인과 상류층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로 변모되어 갔다. 1946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표방하며, 기층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군인 후안 페론이 집권하고, 아르헨티나 국민의 연인이자 성녀였던 영부인 에비타가 정열적인 탱고를 선보임으로써, 탱고는 다시 한 번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1952년 에비타가 사망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의 전역에는 수백개의 탱고 오케스트라가 번성하였고, 크고 작은 댄스홀에는 수만 명의 댄서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론주의가 선택한 정치적, 외교적 고립, 그리고 1955년 로나르디 군부의 집권과 경제적 공황을 겪으면서 탱고는 20여 년 동안 암울한 어둠 속에서 버려져야만 했다.
Carlos Gardel - Por Una Cabeza
(카를로스 가르델 - 머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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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 탱고와 콘티넨털 탱고
탱고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였으며, 1910년대에는 유럽의 상류층 사회를 중심으로 탱고 붐이 일기도 했다. 이 무렵 유럽을 사로잡은 탱고의 열풍은 미국에도 상륙하는데, 탱고 스텝을 고안하여, 대중적으로 유포시킨 무용가 카스루 부부와 이탈리아 출신의 무용가이자 영화배우였던 루돌프 발렌티노에 의해 확산된 ‘발렌티노 탱고’의 공로가 컸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탱고 음악은 유럽에서 새로운 작풍으로 작곡·연주되었고, 탱고는 전통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와 유럽의 우아한 댄스 음악이 접목된 유럽의 새로운 탱고 양식‘콘티넨털 탱고’로 분화되었다. 아르헨티나 탱고가 빈민굴과 선술집 등 서민들의 삶의 터전에서 비롯되었던 것에 반해, 콘티넨털 탱고는 유럽 상류사회의 무도회에서 시작되었다는 정서와 계급적인 측면에서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콘티넨털 탱고는 정박자의
리듬을 기초로 한 아르헨티나 탱고에 비해 더 가벼운 리듬감과 우아한 선율미를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고전음악에 근접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반도네온·바이올린·피아노·베이스에 의해 연주되었던 데 반해, 콘티넨털 탱고의 오케스트라 편성 방식은 유동적이기는 했지만, 더욱 다채로운 현악기가 채용되어 실내악적인 감수성이 부가되었다. 또한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 대신에 아코디언이 널리 채택됨으로써, 밝고 매끄러운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 되었다. 콘티넨털 탱고가 댄스 음악의 목적에 치중하고 있음에 반해, 아르헨티나 탱고는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그리움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가사 중심의 노래 언어라는 특성에서도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 탱고의 부활
에비타의 사망, 그리고 기층 민중의 힘을 두려워했던 군부 독재가 탱고를 억압하면서, 탱고는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침묵해야만 했다. 탱고가 연주되던 클럽이나 살롱은 문을 닫았고, 자연스레 탱고 오케스트라는 하나둘 해체되었다. 탱고를 연주하던 뮤지션들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으며, 수많은 초기 탱고 음악의 선구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오르케스타 티피카의 편성은 축소되고, 레코드 녹음이나 해외 공연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탱고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탱고 음악이 겪은 모진 풍파와 함께 대중들의 기호도 변모했다. 이런 변화의 요구에 발맞추어 탱고 음악 역시 새로운 체질 개선을 시도하게 된다.
Madonna - Don't Cry For me Argentina
(마돈나 -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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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또 다른 기회였다. 영원히 소멸될 것만 같았던 탱고가 새로운 부흥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탱고의 우상,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의 닫혀진 음악, 제한된 음계와 화성학에 갇혀 있던 탱고 음악에 날개를 달아 드넓은 창공을 보여주었다. 그는 독창적인 화음 개념을 부착시켜 1959년 ‘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Berretin’ ‘Verano Porteno’ ‘Melancolico Buenos Aires’ 등의 현대 탱고의 걸작을 쏟아내면서 탱고의 새로운 차원과 부흥을 꾀했다. 피아졸라는 “탱고도 재즈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탱고 음악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양식으로 진화·발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
다. 그가 내딛은 ‘새로운 탱고’(El Nuevo Tango)를 향한 선언 아래 깨어 있는 탱고 작곡가와 연주자가 몰려왔으며, 이 변화의 흐름 속에 탱고는 오늘까지 닫혀진 음악 형식이 아닌 열린 음악으로 진화하고 있다. 피아졸라의 고군분투 속에 탱고는 재즈와 클래식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음악가의 귀와 가슴을 유혹했으며, 더 이상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음악으로만 구속되지 않았다.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데 카로의 탄생일인 12월 11일을 ‘탱고의 날’로 제정했으며, 1980년에는 탱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고 부흥의 리듬은 고조되었다. 1987년 탱고의 명곡에 당시의 스텝을 가미한‘탱고 아르헨티노’의 공연은 세계적
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계의 모든 음악가들은 자신의 창작에 탱고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격정과 비감 어린 음악을 넣기 위해 탱고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1998년 ‘탱고’라는 영화를 연출하여 탱고가 단순한 음악과 춤이 아닌, 그 자체로서 문화임을 일깨웠던 영화감독 카를로스 사우라는 “탱고의 영혼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전까지 나의 작업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고 탱고의 의미를 밝혔다. 아르헨티나의 생선비린내 가득한 선창과 홍등가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 태어난 탱고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에 스며 있는 애환과 영욕, 기쁨과 눈물, 집착과 한이 어우러진 고단한 삶의 기록이며, 그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이며, 처절한 몸부림이다. “탱고는 시인들이 언어로 기술하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투쟁은 곧 축제라는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글: 하종욱(재즈 칼럼니스트) ]
Astor Piazzolla - Adios Nonino
(아스토르 피아졸라 - 아디오스 노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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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는 유럽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로 이주한 이주민들로부터 시작된 민족음악이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되었고,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니 탱고 용어는 스페인어로 되어 있다. 영어의 'Tango[탱고]'는 스페인어에서도 'Tango'이지만 [땅고]로 발음된다. 탱고 추는 사람들을 'Tangueros 땅게로스'라고 하고, 탱고 추는 남자는 'Tanguero 땅게로', 탱고 추는 여자는 'Tanguera 땅게라'라고 한다. 탱고 추는 장소는 'Milonga 밀롱가'라 하는데, '밀롱가'는 두 박자 탱고 음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음식을 먹으면서 탱고 쇼도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탱고 추는 장소를 'Tangueria 땅게리아'라고 한다. 보통 두대의 바이올
린, 피아노, 더블베이스, 그리고 반도네온에 의해 연주된다. 초창기의 연주에는 종종 플루트, 클라리넷, 그리고 기타가 사용되었다. 탱고 음악은 기악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노래를 곁들이기도 한다. 탱고 음악은 탱고 춤 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기본적인 리듬은 4분의 2박자이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흐르는 라플라타 강 유역 몬테비데오, 부에노스아이레스 두 도시의 주변에서 생성된 음악이다. 탱고의 발상지로 알려진 아르헨티나에도 그 기원이나 변천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다. 일반적인 정설로는 라플라타강 유역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의 선착장에 외양항로의 선원들이 1800년대 쿠바 섬에서 유행하던 2/4박자의
가요조의 음악 아바네라를 전하였고, 여기에 부에노스아이레스나 몬테비데오의 거리에서 연주되고 춤추던 칸돔베가 섞여서 밀롱가가 파생하였으며, 그 밀롱가의 변형된 음악이 탱고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탱고는 밀롱가의 파생 후 1875년경에 싹이 터서 1880년경에는 가장 오래된 탱고라고 하는 페레스 작 <다메 라 라타>가 작곡되었고, 1889년에는 칸포아모르작 <사르헨트 카브라르>, 라도니사니의 <울보> 등이 잇달아 작곡되었다. 이 시기를 탱고의 유년기라고도 한다. 1900년 이후 탱고는 눈부신 발전을 하였으며, 악사, 악단이 배출되었다. 그 당시 작곡된 <엔트레리오스의 사람>, <엘 초클로>, <엘 폴테니토> 등은 그 리듬에
밀롱가적인 면모를 남기고 있다. 연주방법도 당시는 3중주 또는 4중주 정도의 소편성 악단이었으며, 악기도 클라리넷, 플루트, 바이올린, 기타가 사용되고 있었다. 1905년경 처음으로 피아노가 사용되었다. 그 후 독일의 반도네온이 등장하여 기존의 플루트, 클라리넷 등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연주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16년 프란시스코 카날로가 처음으로 베이스를 사용하였고, 베이스, 피아노, 바이올린, 반도네온 등으로 5중주단을 편성하였다. 이 4악기를 주체로 한 편성을 표준적 편성악단(orquesta típica)이라고 명명하였다. 콘티넨탈 탱고(Continental Tango)는 아르헨티나에서 직접 건너온 아르헨티나의 작품이다. 표
준적 편성악단 형식으로 연주된 탱고를 아르헨티나 탱고라고 하며, 아르헨티나 이외의 나라에서 만들어져 티피카 악기편성 이외로 연주되고 구미에서 도래한 탱고를 콘티넨탈 탱고라 한다. 콘티넨탈 탱고의 기원은 아르헨티나 탱고에서 온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1905년 아르헨티나 해군 연습함 '사르미엔트 호'가 두 번째의 유럽 방문 때 <엘 초클로>와 <라 몰로차>의 악보를 기항지마다 살포한 것이 처음이며, 1907년 그 곡의 작곡자들인 안헤르 비졸드나 엔리케 사보리드 등이 유럽에 건너가 탱고 보급에 힘썼다. 1914년부터 1918년에 이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아르헨티나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 여러 나라, 북아메리카와의 교류는
한층 활발해져서 유럽이나 미국에는 구미 사람들에게 적합한 우아하고 친하기 쉬운 탱고가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제라시>, <꿈의 탱고>, <푸른 하늘>, <부인이여, 그 손을>, <장미의 탱고> 등 수많은 아름다운 곡들이다. 한편, 연주가도 게치, 웨버 등의 명연주가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달그늘에 피는 난초꽃>, <헤르난도스 하이도어웨이> 등이 작곡되어, 현재 탱고는 전 세계에 유행하고 있다. 가사가 붙은 탱고도 많은데 그 내용은 샹송 등과 같이 이야기 모양으로 되었으 며 다운타운의 불량배와 가우초(카우보이)의 생활을 노래한 것이나 영탄조(詠嘆調)의 실연을 노래한 것들이 많다. 처음에는 변두리의 댄스음악으
로 경시 되어 온 탱고도 점차 뛰어난 연주자들이 배출됨으로써 감상할 만한 가치를 지닌 음악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선구자로는 《El CHOCLO》 등을 작곡한 Angel G. Villoldo , 《La morocha 》 등을 작곡한 Enrique Saborido , 반도네온의 명연주자 비센테 그레코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Juan de Dios Filiberto는 《CAMINITO》 등 서정미가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곡을 썼으며 Enrique Santos Discepolo 는 《YIRA YIRA》 외에 인생관을 반영한 작품들을 남겨 탱고음악을 내용적으로 충실하게 하였다. 이 밖에 Roberto Firpo , Francisco Canaro, Juan D'Arienzo 등 연주자들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Julio De Caro는 현대 탱고의 시조(始祖)로 불리며 그의 영향을 받은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연주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났 다. 악단지휘자로는 Anibal Troilo, Osvaldo Pugliese등이 유명하며 탱고가수로는 Carlos Gardel이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나 일세를 풍미하였고 Edmundo Rivero가 최고로 꼽힌다.
* 아바네라 Habanera
아바네라(habanera)는 탱고의 할머니라고도 불리는 음악이다. 에스파냐 식민지였던 쿠바섬에 사탕수수와 담배재배의 잡역부로 건너온 아프리카 흑인들이 그들의 노래와 춤을 전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쿠바 태생의 음악가 크레오르가 쿠바 사람에 대한 적합한 새로운 감각의 음악을 탄생시켰으며 이것을 아바네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1800년 중엽 에스파냐의 음악가 세바스티안 이라디에르가 쿠바섬을 찾아갔을 때 명곡 <라 팔로마>를 비롯하여 하바네라조의 음악을 수없이 작곡한 일이 있다. 프랑스의 작곡가 비제도 가극 <카르멘>의 제2막에 아바네라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Nostalgia Habanera
(하바나에 대한 향수)
Cuban Scenic Views. Musica Cubana de la Decada de 1930-1940. Cuban Music of the 1930s
(쿠바의 아름다운 풍경. 1930~1940년대 쿠바 음악. 1930년대 쿠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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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돔베 Candombe
칸돔베(candombe)는 탱고의 할아버지라고 할 만한 것이다. 사전에 의하면 '남녀 흑인의 상스러운 춤, 그 춤에 쓰이는 큰북의 일종'으로 되어 있다. 칸돔베는 식민지시대 이래의 음악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서 추던 축제의 음악이었다. 밀롱가나 새로 탄생한 탱고가 점잖은 사람이나 상류사회의 사람들에게 백안시되면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부에 침투한 데 대하여, 조잡하고 속된 음악으로 치부되었던 칸돔베는 점차 쇠퇴했다. 1930년경까지는 카니발 때 젊은이들이 이 음악에 맞추어 춤추며 거리를 누비고 다녔지만, 카니발의 쇠퇴와 더불어 지금은 극장 또는 레코드 이외에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Candomble - Africa Ruge en los Carnavales Afrodescendientes
(캔돔블 - 아프리카계 카니발에서 아프리카가 포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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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롱가 Milonga
밀롱가(milonga)는 탱고의 아버지에 해당한다. 하나의 음악이 파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겹치고 영향을 미쳐 탄생하게 된다. 밀롱가에는 하바네라와 칸돔베가 영향을 주고 있음이 확실하며, 현재 밀롱가의 형식에는 하바네라계와 칸돔베계의 2종류의 리듬이 있고, 양자 혼합형도 볼 수 있다. 밀롱가의 파생은 대체로 1860년경이며, 한때 빠른 유행을 보였으나 새로운 음악인 탱고의 탄생으로 칸돔베와 마찬가지로 쇠퇴했다.
Francisco Canaro & Orquesta - Reliquias Porteñas
(프란시스코 카나로 & 오케스트라 - 포르테냐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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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안데스Andes 음악
이 나라에서 태어난 탱고와 마찬가지로 도시적인 세련된 음악성이 특징이며, 4 중창, 5 중창의 중창이 특징이다. 폴크로레가 왕성한 곳은 북서부의 볼리비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후후이주이다. 여기서는 매년 폴클로레 최대의 이벤트 "꼬스낀Cosquin"이 개최된다. 오랫동안 아티스트의 고령화와 음악 산업 자체의 쇠퇴가 염려되었지만, 최근 새로운 시점에서 폴크로레를 연주하는 그룹이 활약하고 인기를 얻고 있다.
Peteco Carabajal - La Estrella Azul (푸른별)
(대표적인 아티스트: Leon Jieco, Mercedes Sosa, Atahualpa Yupanqui, Una Ra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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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내용은 아내와 이혼하고 헤어진 어린 딸을 생각하는 부친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뻬테꼬 까라바할(Peteco Carabajal)작곡. 까라바할 가계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음악가 집안이다. 메르세데스 소사와 볼리비아 그룹 안디노와 무나이 등도 연주하고 있다.
Dúo Barzola - Camino a San Francisco
(바르졸라 듀오 - 샌프란시스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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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padre, Felipe Barzola es la guitarra de base, el que acompaña, cuenta anécdotas y recuerdos con humildad. El hijo, Carlos, la guitarra líder, el que puntea. Cómo un breve homenaje a este excelente dúo de guitarristas de Bahía Blanca y a la música "western", me tomé el atrevimiento de publicar "Camino a San Francisco" (de Hugo Coimbra y Jorge Beilliard), con introducción de "El bueno, el malo y el feo" interpretado por Ennio Morriconne y su orquesta.
(아버지인 Felipe Barzola는 베이스 기타로, 반주를 하며 겸손하게 일화와 추억을 들려줍니다. 아들인 카를로스, 리드 기타리스트, 따는 사람. 바이아 블랑카 출신의 이 훌륭한 기타 듀오와 "서양" 음악에 대한 간략한 찬사로 나는 감히 "Camino a San Francisco"(Hugo Coimbra와 Jorge Beilliard 저)를 출판했습니다. 못생긴" Ennio Morriconne과 그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가는 길" 이라고 남미에서는 제목을 붙였지만, 이것은 영화 「속 석양의 건맨, 황야의 1달러 은화」의 테마곡. 이 영화가 히트해 여러 아티스트가 연주했는데 그중에서도 라이카스 연주가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친다. 「속 석양의 건맨」의 테마곡은 「선 악 추」로, 로스 라이카스의 카를로스 후로레스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는 아르헨티나 북부의 작은 마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서부극 유행에 만든 곡명일지도 모르지만 기존의 서부극과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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