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를 이루는 작지만 가장 중요한 근간은 가족이다.
그러나 유명 가수 장윤정 사태를 비롯하여 가족간에 법정타툼을 벌이며 화목이 깨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너무나 늘어가고 있다,
왜 가장 가까운 혈연지간에 이런 다툼이 생길까.
본 기자는 '자신의 집과 어머니를 찾기위해 가족 소송'을 하는 한 중년남성을 취재하게 되었다. 그 남성은 너무나도 절절하게 "집을 찾아야만 어머니를 찾아올 수 있다. 결국 아버지와 동생과 소송을 하게 되었다" 며 안타까운 사연을 털어놓았다.
독자의 알권리와 공익을 위해 안타까운 '아들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이 사연은 인터넷의 한 까페에 게시되어 많은 네티즌의 가슴을 울린바 있는데, 사연을 들려준 사연의 주인공인 임대상 씨는 '사실관계 중 이복동생은 사실 친동생이다. 하지만 너무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이복동생만도 못한 사이가 되어 이복동생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 이라며 정정했다.
가족소송하는 아들의 말을 옮긴다.
▲ 어머니와 집을 찾고 싶다는 큰아들 © 정찬희 기자 | |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징집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30년생)와 결혼한 아버지(28년생)는 내가 4살, 남동생이 2살이 되던 해 바람이 나서 어머니와 우리 어린 형제를 두고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우리 형제는 외갓집과 친가 등을 전전하며 친척집 눈치밥을 먹고 살았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 고단한 생활을 하던 내가 중3이었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가 사는 단칸방으로 웬 남성과 어린 남매 2명이 초라한 행색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다. 밥 줘"
얼굴도 모르고 살던 그.. 아버지였습니다. 함께 살던 새 여자가 죽고나자 아이들까지 데리고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습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사랑 같은 건 받아본 일이 없으니 '아버지다' 하는 그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여자들이 그러했듯 어머니는 '그래도 너희 아버지다' 라며 아버지를 위해 밥을 차리고 데려온 아이들까지 거두었습니다.
그 때 돌아온 아들은 알고보니 아버지가 집을 나가며 데려간 막내였고 어머니는 살뜰이 뒷바라지 하여 이후 명문 대학에 가서 지금은 수자원 공사의 임원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지방 국립대 법학과 출신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단한번도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어와 부인과 자식들에게 한푼도 준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머니에게 '술값 내놓아라' '밥값 내놓아라' 행패를 부리며 폭력까지 휘두르기 일쑤였습니다. 지금도 수틀리면 밥상을 들어 엎고 행패를 부리던 그날의 풍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뒤엎은 밥상에서 흩어진 밥과 반찬을 정리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 빌던 나의 불쌍한 어머니..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온 후 생계를 위해 오히려 더욱더 버거운 노동과 폭력을 감내 하여야만 했습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울분.. 우리 두형제 기르는 것만으로도 젖은 손이 마를 날이 없었던 고된 삶이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은 돌아와서도 자식을 위해 노력은 고사하고 오히려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에게 고통만 주었습니다.
가난한 살림.. 가족을 위해 나와 남동생은 대학진학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공장에 다니며 야간대학을 다니며 학위를 취득하고 주택공사에 입사했습니다.
그러다 1985년 현재 분쟁중인 아파트를 주택공사로 부터 분양을 받았습니다.
▲ 사연의 임대상 씨가 제시한 부동산 매도증서 © 정찬희 기자 | |
사진은 내 앞으로 분양된 아파트 임을 증거하는 증서입니다.
그런데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와 내 아내는 젊으니 괜찮지만 단칸방에 사는 내 어머니와 형제가 안타까워.."
하여 아내를 설득하여 그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머지 형제들이 살게 해주었습니다.
난봉꾼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나만 잘살겠다고 그 집에서 살기보다는 가족에게 장남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의 몸에 병마가 찾아왔습니다. 암으로 건강했던 나의 몸은 대꼬챙이처럼 말라갔습니다. 그야말로 언제죽을지 모르는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니가 죽으면 니 어머니는 어떻게 하느냐. 저 집을 넘겨라"
"......"
아버지의 말에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밉지만 내가 죽고 남겨질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하여 나는 '내가 죽거들랑 어머니에게 주겠습니다" 하며 '매매 예약'을 어머니(정차연) 앞으로 해주었습니다.
▲ 매매예약이 적시된 등기부 내용 중 일부. 임대상 제공 © 정찬희 기자 | |
그러나 '법대출신' 아버지는 이 집을 빼앗았습니다.
매도도 아닌 '매매예약'을 근거로 소송을 하고 나와 어머니를 만나지도 못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현재 치매 등 건강이 안좋은 상태인데 아버지는 어머니 대신 이 집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며 공기업에 다니는 막내 동생과 짜고 결국 이 집을 팔아 돈을 나누어 갖고는 아들인 내가 어머니와 만나는 것을 막았습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면 아버지는 "아들이 나를 때렸다" 며 나를 고소했고,
내 다른 남동생 또한 오면 아버지가 계란을 뒤집어 쓰는 등 자해를 하며 집에 접근조차 못하게 하였습니다.
결국은 어느날, 아버지가 건강검진을 위해 집을 비운 날 몰래 어머니를 집밖 베란다 철창너머로 만나야 했습니다.
▲ 임대상 '방범창 너머로 어머니를 몰래 만나야 했습니다." © 정찬희 기자 | |
몰래 어머니에게 찾아가니 어머니는 '뭐하느라 한번 오지도 않았느냐' 며 서운함을 내비치셨습니다.
1층 베란다 철창너머의 어머니는 수척해 있었습니다.
"어머니, 나랑 집 때문에 소송하시는건 아시오?"
가슴이 울컥하여 묻는 말에 어머니는 '몰라. 왜 그렇게 안왔어. 밥은 먹고 다니냐' 라며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진은 그날 철창 너머로 찍은 나의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다시 모시기 위해서라도(그간 고생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나는 저 집을 찾아야 합니다. 내 집이 되어야 다시 돌아가 어머니를 '합법적'으로 만날 수 있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우리 어머니의 고생으로 명문대 입학해서 지금 공사임원으로 있는 이복동생이라는 표현도 아까운 막내남동생은 장남이자 형인 나를 무고죄로 고소해서 나는 감옥까지 다녀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를 찾아오고 내 삶의 안정을 찾는 길은 내 집이었던, 그 집을 되찾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때문에.. 나는 어머니와 집때문에 소송하는 패륜아 아닌 패륜아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꼭 되찾아 남은 여생이나마 이 아들이 편안하게 모시고 싶습니다.
첫댓글 돈에는 형제도 없나?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군요
무엇을 ...........
말문이...
세상에는 정말 별일이 다있네요.
우선 마음과 몸이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재판에 처분문서를 증거로 제출 하는 뽀족한 방법을 추구해야 가능합니다.
6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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