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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묘행무주 원문보기 글쓴이: 묘하
제24강 화무소화분/설우스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25분입니다. 화무소화분이라. 교화한다 이 말이죠. 화자는. 중생을 교화해도 궁극적인 실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제도한 중생이 없기 때문에 교화를 했어도 교화한 바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에는 어떠느냐. 너희들은 여래가 생각하기를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이르지마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하지 말 것이니 왜냐하면 실제로는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없는 것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은 여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아가 있다고 설함은 곧 아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범부들이 스스로 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범부라 하면 여래가 말씀하기를 범부가 아니기에 이를 범부라 부르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정리해 드려야 할 요지가 부처님께서 많은 중생들을 그 80평생에 45년간 법을 설하시고 교화 하셔서 많은 중생을 교화하셨는데. 한 중생도 교화한 바가 없다고 지금 이야기 하신 부분이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해가 가야 되고. 또 제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설득력이 있어야 되는 시간이죠. 두 번째는 실제로는 말이지 아가 없는데 중생 스스로가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이 부분도 오늘 여러분들에게 잘 설명 해 드려야 될 부분이다 이 말이죠.
지금 여러분들은 보고 있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거 지금 나라는 아가 있는데. 그런데 이 아가 내가 없다는 거에요. 내가 없다는 것이 불교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심축에 들어있는 무아사상이거든. 무아. 오늘 이 무아도 왜 무아인지를 설명을 해 드려야 되는 부분이라. 사람이. 자~ 여러분들이 많은 이야기 중에 특히나 사람 몸을 받는 다는 것이 얼마만큼 어렵다고 천수경에도 백천만겁에도 사람 몸 받기 어렵다.
사람 몸 받기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정법을 만나서 그 정법을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의 진리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변화된 그 자기의 변화하는 모습 속에서 부처 되는 그러한 일들이 대단히 어렵다는 이야기죠. 우리가 이 사바세계에 사람 몸으로 올 때는 필연코 원이 있어서 사람 몸을 받으려 한 것이거든요. 왜 사람 몸을 그냥 받으려고 했을까요? 그냥 먹고, 자고, 놀고, 이렇게 지내는 거는 사실 축생이나 별 다름이 없는데. 사람 몸을 굳이 받아야 되겠다는 것은 도를 닦기 위해서 그러는 거에요. 축생이 도 닦는다는 소리는 못 들어 보셨잖아.
그러니까 사람이라야 만이 도를 닦는다는 거지. 도를 닦는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냐? 궁극적으로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이 나가 나를 너무나도 혼란스럽게 하고,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고, 나를 시달리게 만드니까 이 정체가 뭐냐? 이거를 알려고 좀 어려운 철학적인 면이라도 도전을 해서 이해를 하려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이면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아침을 먹어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도 항상 그와 같이 하면서도 우리는 부처를 모른다는 것이지. 24시간을 우리가 지내는데. 스스로 내 본래 갖춰진 불성에, 불성이라 하면은 쉽게 말해서 아주 지고 지순한 착한 성품이죠. 그 생명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니까. 생명의 본성은 대단히 크게 자비스러운 성격이 들어있기 때문에. 부처님과 같은 큰 자비의 성품이 있다고 불성이라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24시간 가운데에 이 불성을 몇 분이나 보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3분을 보는지, 2분을 보는지 몇 분을 보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 불성이 이 어리석은 무명의 껍질을 부서 버리고 그 불성이 드러나려고 하면은 아무래도 불성 보는 시간이 좀 많아야 안되겠습니까? 그렇겠죠. 솥에 얼음을 넣어놓고 그 얼음을 녹일려면은 밑에 아무래도 불이 좀 많아야지. 밑에 불이 적으면은 그 얼음이 안 녹거든.
그 얼음이라는 거는 뭐냐 하면은 결국은 궁극적으로 얼음은 물이죠. 물이지만은 그 얼음이 잘못된 어떤 조건에 의해서 물이 굳어버린 것이거든. 얼어 버렸다 이 말이야. 얼어 놓으니까 그 물이 얼음이 본래 그 목적을 다 행하는지 못하는 것이죠. 목마를 때 마시지도 못하고. 또 더러울 때 씻지도 못하고. 굳어 놓으면 그리 안 좋다는 것이지. 그런데 그것을 본래 모습대로 녹이려 하니까 불기운이 많아야 되는데.
우리가 그 불기운을 아주 지속적으로 계속 땔려면은 이런 법문을 많이 들어서 이 법문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확신이 서야 계속 그 불기운을 땔 수 있는 원력과 자기 원이 나오는 거에요. 믿음이 서지 않으면은 저걸 내가 불로 때워서 얼음을 녹일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또 저게 또 녹는다고 하더라도 내 사는 거 하고 무슨 큰 영향이 있겠나. 가치관에 있어서 뭐 별다름이 있겠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불을 때는 것이 하루에 1분짜리도 있고, 2분짜리도 있고, 24시간 되면 참 좋겠는데. 24시간 동안 그 불성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오늘은 이 대목이 참 어려운 대목이에요.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시키려면은 여러분들에게 법화경을 제가 말씀을 좀 드려야 될 거 같애. 법화경이라는것은 총 28품으로 되 있어요. 그런데 일품에서 14품까지를 우리가 정문이라 그러는데. 그 정문이라는 뜻은 그대로 부처님의 발자국의 흔적을 말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14품 까지는 우리가 여래라고 이야기를 할 때는 아 여래는 본래 도솔천 내용궁에 계시다가 이 사바세계에 정반왕의 부인 마야부인의 태를 빌려서 오셔서. 그리고 왕위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서 6년 고행 하셨다가. 29살에 대도를 성취하고. 아~ 29살에 출가를 해서. 35에 대도를 성취해서. 80에 이르도록 45년간 교화를 하시고 가신 분이다. 이렇게 생각하잖요. 우리가 여래라, 부처님이라 하면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것을 죽 우리들에게 법화경에서 14품까지는 보이는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 하면은 방편품이거든.방편이라는 말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은 안됩니다. 방편이라고 그러니까 그것은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고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방편은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버려야 될 것이고 방편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조금 더 깊이 대승법을 배우다 보면은 방편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한번 사유해 보셔야 되. 방편, 방편 하는데 그 방편은 어디서 나왔느냐? 그 방편은 바로 궁극적인 그 실체의 진실된 자리에서 나온 거에요. 왜 그러냐? 부처님이 45년간 설법하신 것들이 이 대승경전들이 다 방편설이다 이 말이야.
그러면 부처님은 보리를 증득각해서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에서 부처님이 다 설해놓으신 것이 그것이 방편이기 때문에. 방편과 우리가 가야 할 부처의 목적하고는 아주 깊은 연관 관계가 있다는 거에요.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것이 10이라는 숫자 같으면은 10라는 숫자를 바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3+7=10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요. 그러면은 3이라든지 7이라는 자체가 실제적으로 10은 아니지만도 3과 7은 반드시 필요한 필요조건이다 이 말이야.
우리가 꼭 그것을 밟아야 되고 거쳐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법화경에도 그 14품까지 그 방편품에는 부처님은 이렇게 이렇게 육신을 가지고 사바세계에 오셨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런데 14품에서 28품에 보현보살금발품까지는 뭘 말하냐 하면은 그거는 방편품이 아니고 본문이라고 그러는데. 법화경에서는. 본문이라는 말은 본질을 궁극적인 본 우리 부처자리를 이야기 하는 거요. 즉 말해서 여래의 그 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14품에서 28품 까지거든.
그러면 거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여래수량품이라는것이에요. 14품 까지는 중요한 것이 방편품이었는데. 방편을 거쳐서 그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게끔 부처님이 큰 자비를 나투신거거든. 그러면 이 여래 수량 품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이냐 하면은 여래에 대해서 너희들이 정말 잘 알아야 되겠구나. 부처님의 심정이 그런 것이죠. 그래서 그 여래수량품에 부처님이 뭐라고 하셨냐 하면은 너희들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진실로 믿겠느냐? 그러니까 모든 법문을 듣는 대중들이 진실로 믿겠습니다. 이것을 부처님이 3번이나 다짐을 해요. 진실로 믿겠느냐? 진실로 믿겠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이 그 당신의 본래 드러내고자 하는 말씀을 드러내는 거요. 너희들이 알고 있기로는 부처가 이 사바세계에 인간의 몸을 받아서 80평생을 살다 간 것이 여래라고 보지만도 실제로 여래는 그렇게 오고 가는 것은 방편이었고 본 여래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본여래는 본래 삼천정진겁전에 이미 다 성불해 마치신 분이 여래다. 그래서 이 여래라는 그 여래는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다 이 말이지. 왜?
여래라는 자리는 그렇게 만들어 지고 보완시키고 이렇게 잘 닦아서 이루어서 되는 자리가 아니고, 본래 여래는 그렇게 본연이 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여래는 본래 그렇게 되 있기 때문에 이 여래는 그 수명이 무량한 수명이다. 무량한 수명이라면 끝이 없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인간세상에 오고 가고 이러는 것은 여래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죠. 여래는 그 수명이 아주 무량하다.
그리고 본래 그렇게 성불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가 와서 사람 몸을 받고 출가를 해서, 6년 수행을 해서, 도를 이룬 것이 아니고. 본래 여래는 그렇게 여래로서 완전히 되어 있다 이 말이오. 이걸 선가에서는 본래성불되 있다 이 말이죠. 본래성불이고 본래부처다 이 말을 그 법화경에 와서 그렇게 밝히는 거요. 그래서 이 우주에 큰 불길의 급화가 와서 무너뜨린다 해도 여래는 무너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래는 불생불명하기 때문에 수명이 무량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쭉 하는 거요. 그게 무얼 말하느냐 하면은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본심을 드러내는 거에요. 지금까지는 다 그렇다 이 말이지. 그러면 본래 부처되 있고, 본래 그렇게 갖추어져 있는 여래의 지혜의 덕상을 우리가 믿기가 쉽지가 않죠. 왜? 우리는 날마다 여래를 안고 자고, 날마다 여래를 같이 일어나고, 여래와 같이 하면서도 여래를 우리가 믿지 못하고, 여래를 보지 못한다는 거요.
믿지 않기 때문에 못 보는 거에요. 믿으면 바로 볼 수 있는 건데, 믿지 않기 때문에 못 보는거요. 그래서 마침 산이 이리 있어도, 산 속에 금이 들어 있어도, 산이 그 속에 금이 있는 줄을 산이 모르잖아요. 우리가 그와 똑 같은 거에요, 믿지 않으면 우리가그대로 여래의 지혜덕상을 가지고 있지만은 우리가 그거를 모르고 사는 것이지.
이것을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우리는 알든 모르든, 이해를 하든 못하든, 믿든 믿지 않든, 여러분들은 본래 다 여래라는 거야.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 있는 거요. 그런데 왜 우리는 절대적인 우리가 여래인데, 왜 여래를 보지 못했느냐? 그래서 여기서 부처님은 그 이야기를 말씀하는데, 제가 이거를 비유를 하자니까. 제가 30대 인데. 선방 대중에서 죽 선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참 공부가 너무나도 잘 되요.
잘된다는 것이 알고 보니까 이제 와서 보니까 전부 다 망상으로 잘되는 거에요. 그래 선방에 딱 앉아서, 처음에 선방에 나가서 한 3년을 앉아 보니까 저 20년, 30년 된 고참스님들이 저 안에 딱 앉았는데 보니까. 앉으면 졸드라고. 그런데 안 조는 사람은 나 하나 밖에 없어. 그러니 내가 제일 승승 하다는 생각이 들은 거요. 하~ 그래서 내가 공부가 잘 되는구나. 그런데 한 시간 앉았다가 10분 포행을 하든지..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포행을 하고 그러는데, 그게 또 귀찮은 거야. 어디 들어가서 24시간 좀 앉았으면 좋겠다. 그 때 생각은 앉는 그 자체가 공부의 전체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던 거에요. 앉는 것이 공부다 이리 생각했던 것이지. 그래서 해제를 하고서는 수소문을 해서 도반이 지리산에 사설 조그마한 토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스님이 토굴생활 그만하고 대중에 나오겠다고 해서 그러면 내가 거기 가서 좀 살겠다. 그래서 들어간 거죠.
들어가서는 토굴에 살지만은 여법하게 내가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아침도 그 시간에 끓여 먹고, 점심도 끓여 먹고, 제대로 토굴 티를 안내고. 대중 생활하는 것처럼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좀 앉아서 공부 좀 해보니까 공부가 솔솔 하니 재미가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아이고 밥해먹고 하는 일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구나. 시간을 줄여야 되겠다는 내 나름대로 망상을 피우면서 변명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밥도 안 해먹고. 미숫가루, 그걸 가지고 대침을 다는 거에요. 그걸 먹으면서 공부를 하는데. 초봄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가을이 됐어요. 제가 개인적으로는 가을을 많이 타는 편이거든. 그런데 그 심산유곡에 들어가서 일년 동안 사람을 구경을 못했어요. 사람구경을 못하는데 그때 가을이 되니까. 나는 공부가 솔솔하니 잘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내가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 하면은 자꾸 내 의지와 뜻하고는 상관없이 사람이 찾아 와주기를 바라고 사람이 와주기를 바라는 거요.
그게 밑에서 자꾸 치솟는 거요. 내 속에 뭔가 그런 바램이 꽉 차 있는 거라. 기운이. 밤이 되니까 더욱 더 사람이 오는 거 같이 느껴지고 그런 거요. 한번은 앉았는데 발자국 소리가 차박차박 나는 거요. 나면서 조금 있으니까 가까이 들어오는데 그 소리가 더 가깝게 들려요. 그리고는 딱 문을 흔들면서 두들여요. 아~ 정말 사람이 왔구나. 그래서 문을 열고 누구세요 하고 나가보니까. 찬바람이 쌩 불면서 아무도 없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 왔다 간 것이냐? 이렇게 보니까 바람이 부니까 낙엽이 동태 굴러가듯이 굴러가는 거 봤어요? 낙엽이 무리를 지어서 동태 굴러가듯이 이쪽 구탱이에서 저쪽 구탱이로 굴러다니는 그게. 내 귀에는 사람 발자국 소리로 들리는 거요. 그리고는 바람이 와서 흔드는 게 문 두드리는 소리로 들리고. 그러는 거요. 그래서 나가서 문을 여는 순간에 내가 거기서 아주 썰렁한 바람이 불면서 아주 허한 그런 것을 보죠.
그때 무엇을 내가 느꼈느냐 하면은 이 순간이야 말로 나의 허상을 보는 순간이고, 나의 거짓을 보는 순간이고, 나의 그 허망된 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보는 순간이구나 하는 거를 느낀 거에요. 왜 내가 이런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그래도 대승경전을 배운다는 것은 참 대단한 복입니다. 우리가 이 대승경전을 배워야 되요. 이게 방편설이지만은 이 대승경전을 보지 아니하고.
대승 경전이라 하면 반야부 계통의 경전이라든지. 또 궁극적으로 가서는 화엄경의 계통이라든지, 열반경이라든지, 이런 대승경전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많은 법문을 들어서 그러한 정견이 잘 서 있을 때 여러분이 공부를 하는데도 장애가 없을 뿐 아니라. 여러분이 착각에 의해서 여러분이 어려운 낭패를 안 당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러한 대승의 깊은 정견을 이해를 못하고 자기가 공부한다고 들어가는 사람은 굉장히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기 스스로의 욕망과 그 바램에 의해 허상이 나타나는 거요. 능엄경에 보면은 우리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허상이 나타나서 그 허상에 속아서 그 공부에 장애가 생기고, 공부를 착각하고 중도 하차하는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그렇잖아요?
아무도 사람도 안 왔는데 그냥 내 귀에는 마음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차박차박 나고,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 공부가 솔솔하니 재미있다고 하는 주제가 그 착각하고 문 열고 나갈 정도로 그게 무슨 공부냐 이 말이요. 그런데 거기서 그걸 탁 내가 다 만들어 내는 허상이구나. 이런 것들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정견을 알면은 이것도 나쁜 거는 아니에요. 왜?
우주의 기운이 그렇게 조용할 때, 물론 중생심으로서 마음이 쉬지를 못해서 애쓰는 과정이지만도 나 역시 공부하는 그 과정에서 마음이 차분히 쉴 때, 우주의 리듬과 내 리듬이 맞아 떨어 질 때, 그때 우주는 아주 자연은 아주 평온하게 안정된 본연의 모습에서 조금도 부동함이 없이 잘 리듬을 타는데, 나는 그 리듬에서 내 본래 그 욕망의 번뇌가 일어난 거에요. 일어나니까 그 리듬을 같이 못 맞추는 것이지.
이런 과정도 공부를 하다 보면은 누구나 겪는 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살다 보니까 제가 오늘 이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그만큼 정견이 중요하다. 정견을 알지 못했을 때는 여러분들이 공부 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허상을 실상으로 잘못 봐서 공부가 어렵게 되는 수가 많으니까 이런 대승경전을 듣는 것이 큰 복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를 드리고, 그리고는 제가 한 3년 지나고서는 토굴에 오래 있어도 별로 좋을 게 없겠다 싶어서 다시 대중으로 나오면서 그만두고.
그리고 인연이 돼서 조그마한 암자를 하나 만들었죠. 암자를 만들었는데 상좌가 여럿이 되지만은 그 때 같이 살기는 맞상좌하고 같이 사는 거라. 지금 여기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려고 그러는 거요. 맞상좌도 선방을 한 10년 이상 다녔기 때문에 같이 생활을 하는데. 내가 가만히 보니까 공부는 굉장히 열심히 하는데, 생활 속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는거 하고 매치가 잘 어우러지질 않는 거에요. 따로 노는 거에요.
그래서 저거를 어떻게 해야 되나. 나는 스승이고 그는 제자니까. 그래서 한 번은 내가 방법을 쓰기를 이유 없이 자꾸 트집을 잡는 거요. 내가. 그러면서 너 이거 이거 잘못된 것이야. 그러면서 계속 뭐라고 하면서 공부가 뭐냐 말이지. 그러면서 그 사람의 자존심을 계속 건드리는 거요. 건드리는 정도가 어느 정도 건드리냐 하면은 칼로 살을 싹 베어내고서는요 거기다 소금을 탁 뿌리는 식으로
아주 자존심만 자존심만 골라서 건드리는 거요. 그러면은 이 사람이 여기서부터 벌겋게 색이 올라가면서 얼굴이 벌게 지는 거요. 그런데 사람이 참 점잖아서 한번도 대꾸하는 것을 못 봤어요. 그런데 속에서 불이 올라 온 거죠. 불이 올라와서 벌개지는 거요. 내가 가만 내가 농도를 봐서 거기서 더 건드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문을 열고 나오거든.
내가 나오기가 무섭게 그 사람도 뒤 따라 나오면서 등산화를 신는 거에요. 등산화를 신고 산을 한 바퀴 돌고 온다 이거지. 산에 갔다가 2시간 정도 있으면 내려와요. 내려오는 시간을 맞춰서 내려오는 사람을 바라보고 부처님께 참 공양을 올리려면은 따끈따끈한 공양을 올리지. 식어빠진 그 거를 누가 먹을 거라고 그걸 올리느냐? 이래하거든. 그러면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잘 들어 보세요.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모른단 말이야.
그러면은 내가 그 상좌에게 계속 자존심을 건드리고 계속 그러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자기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계속 화가 치미는 거에요. 화가 막 치밀 때는 화가 뭡니까? 우리가 쉽게 말해서 번뇌, 망상, 요즘 말하면 스트레스 받는다 이거 아닙니까? 이것이 꽉 찬 거거든. 그러면은 그 번뇌, 망상이라는 그것이 실제로 나의 본래 참 모습은 아니다 이 말이오. 나의 본래 참 모습은 아니다 이 말이지.
그러면 나의 본 참 모습은 그거하고 상관없이 본래 고요하고 칠정에 말이지. 희로애락 칠정이라든지, 오용락이라 든지, 또 팔풍이라 그래서 이익 되고 손해보고 칭찬해 주고 비판하고 이런데 동요 되지 않는 것이 이런 법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상관없이 고요히 우리 본성이 있거든. 그런데 지금 부글부글 끓는 거에요. 지금 화가 나서. 그러면은 지금 부글부글 끓는 그것이 실체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서는 아~ 이것을 내가 여기에 속았구나 하면은 그것이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화가 안 나겠죠. 이해가 갑니까?
예를 들자면은 내가 배타고 뱃놀이를 하는데 앞에서 배가 한 척이 와서 내가 놀이하는 배하고 부딪혔다고 생각하자. 부딪혔을 때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배도 똑바로 몰 줄 모르면서 노래하러 나와서 남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탁 넘어다 보니까 그 배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 할 때, 빈 배가 와서 부딪혔다고 생각 할 때, 화나는 것이 사람이 있는 거 하고 없는 거 하고 어떻게 다르겠어요? 다르겠죠. 주인이 없는 거 하고는 다르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화나는 이 자체가 내 모습이 아니고 실체가 아니다라고 생각할 때는 이게 화 나는 것이 다르다 이 말이오. 그럴 때 그것을 바로 알아 차리는 것이 그게 바로 따끈따끈한 공양을 나의 진여불성자리에다 공양 올리는 순간이다 이 말이오. 좀 어렵나? 그런데 이 사람은 그거를 따끈따끈할 때 그 찰라 순간에 알아 차려야 되는데, 그 찰나에 적해서 들어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스님이 왜 나한테 저랬을까 그러면서 혼자 생각도 했을 것이고, 그래. 내가 출가 할려고 들어올 때는 다 내 항복 받으려고 온 것이니까 내가 인욕으로 참아야지. 또 이런 생각을 한다든지. 두 시간 동안 산행을 돌아다니면서 그 생각을 해서 그 성을 가라앉힌 거에요. 그렇죠? 분별도 하고 분석도 해보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해관계도 따져보고, 내가 해야 할 목적의식도 한 번 생각해보고, 이러면서 그리하는 거요. 그것도 또 수행자니까 두 시간 만에 가라앉힐 만 하지, 근기 있는 사람은 석달 열흘 간다 하두만은.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이 두 시간 동안을 왜 돌고 오느냐? 바로 그 자리에서 나의 진성 불성에게 따끈따끈하니 그대로 공양을 올리지. 왜 두 시간 동안 그렇게 그 따끈따끈한 공양을 식혀서 쉰내가 나서 먹지도 못하는 거를 그때 사 미련하게 불성에다 소식을 전하려 하느냐? 그러는 거요. 자 이렇게 생각할 때 여기서 요거를 이야기 하려는 거에요. 산에 올라갈 때는 화가 잔뜩 났거든. 화난 것이 자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가 더 난 거에요. 그런데 훈습도 해보고. 이해도 해보고, 나름대로 이치적으로 따져보니까, 한 바퀴 다 돌고 내려 오니까
아 그거는 사실 나의 모습도 아니고, 내가 성낼 일도 아니고, 내가 또 마음이라는 놈한테 속았구나. 마음이라는 놈한테 속고 나니까 내 모양 꼴이 말이 아니었구나. 이런 나름대로 생각이 된 거 아니에요? 화 났을 때 이건 뭐에요? 번뇌죠. 번뇌를 여기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중생이라고 부처님은 이야기 한 거야.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중생을 제도 했다고 말하지 마라. 그랬거든요.
그러면 그 번뇌가 일어난 것이 그것이 실체적으로 번뇌라는 것이 딱 정해진 번뇌가 있는 거 같으면은 그거를 불살라 버린다든지, 쪼개서 없앤다든지, 거기 갔다 버린다든지. 이렇게 해서 했으면은 이거를 한 것이 있기 때문에 번뇌가 따로 있고, 우리의 본 진성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도 할 수 있는, 씻었으면 씻은 것이 있고, 제도하면 제도한 것이 있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이 번뇌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고 가만히 보니까 내 본성에서 나온 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본성에서 나왔는데 내가 그 본성을 정견과 정법을 몰라서 욕심에 의해서 중생생멸심으로 이거를 길을 잡으니까 이게 화가 된 것이고, 이것을 본래 진성자리의 정견, 정법을 알고 보면은 이게 생멸 화가 되는 쪽으로 안가고 본성자리로 돌아가잖아.
그런데 이게 하는 역할이 누가 하느냐 하면은 마음이라는 하나가 다 하고 있다는 거에요. 마음이 요것도 하고 저것도 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요기로 갔을 적에는 중생이라 하고 번뇌라 하기도 하고. 우리가 이거를 중생업식이라 하기도 하고. 이거를 처하는 그 당하는 입장을 생각할 때는 지옥이라 하고 그러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이것이 본래 본성이기 때문에 얼굴을 바꾸고 나니까. 이것이 자기 본성이기 때문에 제도한 바가 없잖아. 이렇게 이야기 하면 이해가 갈라나? 제도 한 바가 없잖아요. 그러면 여기 가서 뭐라고 이야기 했냐 하면은 『수보리야. 범부라고 함은 여래가 말씀하기를 범부가 아니기에 이를 범부라고 했다는 말이라든지,
또 수보리야 여래가 내가 있다고 설함은 곧 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범부들이 스스로 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 내가 화가 나고 그렇게 번뇌가 일어나는 그것이 내 스스로가 그것이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있는 거냐 이 말이지. 있는 거요? 없지요. 없으니까 없는 것을 가지고 내가 제도했다고 한다는 말은 제도 했다고 하면 여래를 비방하는 소리지. 그 여래를 잘못 아는 소리다 이 말이오. 그렇겠죠?
그러면 여기에서 또 말하는 범부라는 말은 번뇌를 다른 이름으로 범부라고 그랬잖아. 번뇌를 다른 이름으로 범부라고 그러거든. 범부가 범부가 아니기 때문에 하는 말은 그 번뇌가 실제로 본래부터 고정적으로 정해진 번뇌가 물건이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아니고 그건 뭡니까? 우리 진성이죠. 그렇지 않아요? 진성인데 이 번뇌가 없던 것이 허공에 한솔과 같이, 아지랑이 같이 나타난 거거든. 왜 나타났을까? 눈병 때문에 나타난 거야. 눈병 때문에.
눈병은 왜냐하면 욕심으로도 비유할 수도 있고, 정법을 모르는 미혹한 그 생각으로도 눈병에 비유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허공은 본래 그런 아지랑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없는데. 아지랑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 아지랑이를 걸레를 가지고 닦아 없앴다고 해서 그 아지랑이가 실제로 있어서 닦아 없앤 거 하고 없는 것을 내가 착각을 해서 닦아 없앤 거 하고 다르잖아요.
없는 것을 괜히 내가 착각했었는데 그것을 내가 제도 했다고 한다든지. 그걸 내가 있다고 한다든지 그렇게 하면은 여래를 비방한다 이 말이야. 여래는 여기서 무엇이 여래에요? 본래 나의 본자성, 그 참 진성자리를 여기서는 여래라고 그러는 거요. 금강경에선 그걸 여래라고 그래요. 여래라고 그러는 것을 여러분들이 삼천년 전에 오셨다 간 석가모니 부처님을 자꾸 여래라고 생각지 마라.
금강경에서 말씀하시는 여래는 우리의 본 참 천진한 본성을 여래라고. 그래서 제가 처음에 법화경을 비유로 들은 거에요. 방편품에는 그렇고. 이렇게 해서 본문에는 여래는 그런 여래가 아니다. 우리의 청정자성여래다. 화가 나고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금강경에서는 그것을 중생이라고 표현을 했고, 범부라고 표현을 했고, 아상 인상 중생 수자상이라고 표현을 했지마는 그것은 허공의 다 아지랑이였다.
허공의 아지랑이가 제도 할 것이 뭐 있으며 허공에 아지랑이가 있었다고 이야기 할 것이 있느냐 이 말이야. 아지랑이라고 하지만 아지랑이가 아니다. 그래서 범부라고 하지만 범부가 아니다. 중생이라고 하지만 중생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부정을 통해서 본래 청정한 우리 자성자리를 여러분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부정 법을 쓴 거에요. 조금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니까 이제는 그 상좌가 상당히 발전되서 요즘은 소금을 탁 뿌려도 전혀 별로 그게 없어요. 이제 바로 바로 즉각 진성공양 올리는 거요. 자기본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거야.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 불교를 이야기를 하고 법문을 하고 수행법을 이야기를 할 때, 너무 철학적으로 너무 관념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불교는 어디까지나 종교적이어야 되는 거에요.
종교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는 이러한 마음에 그러한 법을 이해를 하면은 그 이해한 법이 생활 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참 종교적인 인품으로 거듭 다시 생활에서 나와야 되는 거에요. 그것이 나오려면 거기에는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은 원력이라는 것이 따라야 되는 거요. 원력. 본래 그 진성자리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본래 청정한 자리인데.
그 청정한 자리가 물듦이 없고 그 청정한 자리는 오염됨도 없고. 그렇게도 이해 득실 관계에 요동치는 자리도 아니고. 그런 거를 알면은 거기다 우리는 원력을 세워야 되는 거야. 그러면 원력은 무엇이냐? 그 원력은 이 생명세계에 우리가 온 것은 이 생명이 모두가 다 나름대로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있듯이 모든 생명들도 다 살아야 되는 이유가 있는 거에요.
내가 행복해야 될 이유가 있듯이 모든 생명들은 다 행복해야 될 이유가 있는 거에요. 그러면은 그것은 상호간에 서로 나눔에 의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거다 이 말이야. 참 우리 불법을 몰랐으면 우리가 얼마만큼 인색하고 얼마만큼 우리가 이기주의고 얼마만큼 독선적이고 아만이고 그랬을는지 모르는데. 참 부처님법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관계 속에서 함께 공존해야 되고, 함께 공생해야 되고, 함께 우리가 더불어서 나누면서 살아야 된다.
이런 걸 생각 할 때, 지금 여러분들은 이런 법을 들으며 감사한 마음에 보답다는 길은 여러분의 진성여래를 어디서 드러내야 되느냐 하면은 생활 속에서 실천으로 나눔으로 공덕을 짓는 것으로 복을 짓는 걸로 이렇게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걸로 그 진성공덕은 드러나지. 그냥 두면은 그 진성공덕은 절대 드러나지를 않아. 그러니까 여러분은 종교적이어야 된다는 거야. 종교적인 마음으로 항상 기도도 열심히 하고. 여러분들이 봉사도 하고. 여러분들이 항상 참회를 무섭게 해야 된다는 거요.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다 생활 속에서 그 진성이 실천으로서 드러나도록 그렇게 하도록 하입시다. 성불 하입시다.
출처 :진불선원 () 선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 법흥(法興)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거룩하신 부처님!
무한한 지혜와 자비의 빛으로
저희들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옵소서.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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