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꽃은 참나리, 여러해살이 식물로 시골집 마당에도
폈다
병색이 짙은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할아버지와
대청에 앉아
바라보던 이름, 대가리에 대롱을 달고 파꽃이 쓰러지는
여름이었다
감니무 가지가 크고 억세다며 집을 비운 며칠 새 옆집 이
장이
나무를 베었다는 앞집의 교수 부부가
담 너머에 나란히 서서 그릇에 담긴 포도를 건넨다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부부에게 공연히 손짓만 할 뿐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말수가 적고 가볍게 묵례를 하는 것은
나였다
밑동을 사납게 도끼질한 그는 무슨 심정으로 나무를 때
렸나,
예쁜 꽃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예쁜 일이 눈에 달린 말
을 듣고서
납골당 입구에서 풀을 꺾던 할아버지의 오촌 조카라는
이장
그와 같은 무덤에 아버지를 두긴 싫다고
예쁜 꽃을 보는
나의 조상에겐 말하지 않았다
포도씨를 뱉으며 포도알을 삼키며 폭폭해, 나도 모르게
뱉는
그 말의 식감이 새로 배운 꽃도 죽어갈 감나무도 포도씨
를 삼키는
할아버지도 아닌 대가리에 대롱을 달고 쓰러질 듯
파꽃을 보게 하는 할머니의 말
죽어, 죽여, 하나의 말 같기도 한, 둘의 말
황달이 짙은 엄마가 딸의 머리채를 잡고 살려달라 악쓰
던 병실에서
세상 폭폭하다던 당신의 얼굴이 내 얼굴을 부비며 형의
이름을 말했다
포도씨를 뱉으며 포도알을 삼키며 낮은 그늘을 따라 사
방으로 늘어진
파꽃을 보았다 몰락한 가계의 벗겨지지 않는 왕관들 족
보에서나 찾는
고관대작들, 그것이 우습게도 고깔을 뒤집어쓴 조산들 같
다 여기면
형의 이름으로 나를 보던 할머니의 눈밭에
이토록 예쁜 새끼, 내 새끼 그 처연한 눈망울을 꽃으로 놓
아둘밖에
달리 내겐 방법이 없다
딸이 보고 싶다는 엄마에게 곧 오실 거라는 의사에게
둘 모두의 바람처럼 미소 짓는 딸에게도
갓 돌이 지난 딸이 있다고 했다 어린 딸의 그보다 어린 자
식을 위해
병실 가족 모두가 함부로 말하기 시작한 죽음에 의해
환자는 죽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귀를 세우면 하얗게 덮인 병실이어서
면역도 오염도 없는 방 안이어서
그녀는 순수한 마음으로 죽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죽고 보름이 채 되지 않아
할아버지도 죽었다
둘은 납골당에 갇혀 영원히 죽어진 채로 있다
엄마, 미안합니다
허리 병이 든 아버지가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하는 말
나는 짐짓 모른 체 술을 따르고 첨잔을 하고
납골당 주위에 술을 부으며
고귀순 할머니가 고귀순이라고 적던 한글 공책을 생각한다
아버지와 형, 어머니 이름 하나씩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주위에 구름을 두르면
꽃이라도 될는지,
내 희디흰 이름에 폭폭 눈이라도 왔으면 했다
매번 져주던 사람의 이름이 지독히 기억나지 않던 밤
그렇게 살지 말라는 전화와
어떻게 지내냐는 문자를 받았다
매번 지려고 하는 짓
그 몸짓의 애쓰는 마음이
꽃의 말이라 한다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 문학동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