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놀이기구 같이 생긴 그것은 하늘에 뜬 기차 같고 둥실둥실 태평한 풍선 같다. 타면 붕붕 솟아오르다 산꼭대기까지 수고스럽지 않게 나를 데려다준다. 이렇게 아이처럼 정의를 내리게 하는 동심은 대체 무얼 먹어서인가.(그래, 더위를 먹었다 치고..) 그 꿈동산 이야기를 조금 더 읊어볼까 한다. 가끔 등산을 가지만 수고스럽게 걷기 싫을 때, 그것들은 나를 무등 태우는 근사한 배경이었다. 설악에서도 타 보았고 중국까지 날아가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천문산 케이블카도 쫄깃거리며 타보았다. (꼭 놀이동산 가서 무슨 기구 타봤어 안타봤어 확인사살하는 녀석들처럼, 나는 그런 기구도 타보았음을 또한 밝힌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이처럼 어딘지 한 구석이 허전하고 마냥 가려웠으니, 이 증세를 무어라 말할까. 그것은 나 태어나 자란 섬들의 천국, 한려수도 미륵산 케이블카를 여태 타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에베레스트를 오른 엄홍길이 북한산을 오르지 못한 것과 같고, 세계를 손바닥 보듯 즐기는 여행가가 우리나라 의령이 어디 붙었는지를 모른다는 것과 같은 급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에베레스트 올랐어도 북한산 못갈 수도 있고, 의령 알아야 한다고 피 토하며 따질 자 없다. 그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이 생각했을 때 명예롭게 채우지 못한 허전함의 분야일 것이다. 혼자만 느끼는 당혹감으로.
그동안 천만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지만 나에게만 먼 그대처럼 아직까지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지 못한 것은 나로서도 의아하다. 통영 도천동에는 오촌당숙과 당숙모가 계시고, 심지어 그 딸인 아가씨가 케이블카 매표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는 상당한 뒷배경에도, 나와 그의 인연은 쉽지가 않았음이다. 남편은 이 상황에 미륵산이 얼마나 악산인지, 거기를 등산했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못함과 동시에, 친구 누구와 케이블카를 타봤다고 말한다. 저 눈치없는 상냥함, 가식이라곤 없는 순진무구함, 껌 씹듯 짝짝 울려퍼지는 경험담이 내 앞에서 반죽되어진다. 참으로 때와 장소를 구별할 줄 아는 자가 그립다. 예의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저 천둥벌거숭이를 나는 그저 바라본다. 그것이 곧 때를 기다리는 자세려니 하면서. 물론, 알기나 할까만...
햇살 따뜻하던 지난 일요일(이 여름에), 느닷없이 케이블카를 타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당숙어른의 병문안을 가지 못했던 것을 이유로 늦은 인사라도 하러 가자시는데, 내 귀에는 케이블카 타러가자는 말씀처럼 들려왔다. 하늘의 구름이 바다 위에 둥둥 떠가듯, 내 머리로 건성건성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나는 신나고 있었다.
뭐든 잘 먹는 나의 식성에 통영 당숙모의 성스럽기까지 한 밥상을 완벽하게 비우는 것, 밥값으로 설거지를 하는 것, 입가심으로 올여름 최고의 수박까지 끝내주게 먹는 것, 그것이 다 병문안의 행위 속에 포함되었다. 할 만한 일이었고 세상은 둥글둥글 원만하였다. 그럴 때 슬쩍 케이블카 카드를 꺼내든다. 당숙모님 결정적일 때의 센서 작동이 나와 같은 급이다. 전화 한 통으로 표가 끊어지는 두뇌회전은 아름답다. 고마움이 첨단의 세상을 만나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그동안 참았던 시간까지 곱으로 단축되는 이 쾌속의 세상. 차 한 대에 당숙모까지 모시고 미륵산을 만나러 간다. 아니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을 타러 간다.
어릴 때부터 자주 들어와 신기할 게 없을 것 같은 단어 중에 '한려수도'가 있었다. 고향 남해섬 바로 이웃이 여수였기 때문에 어린 눈은 바다의 경계를 짓지 못하였고, 한려수도는 모두 한 바다였을 뿐이다. 바다의 친척은 이웃바다 사람들끼리도 도타워 여수나 한산섬이나 매양 귓전에 닿은 그대로 한려수도 사람들이었다. 어릴 땐 통영이라고 하지 않고 충무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노량에서 엔젤호(abcd도 모를 때 발음대로 하자면 엔제로)를 타고 충무에 간다고 하였으며, 충렬사를 지척에 둔 우리는 노량마을 충렬사 생각하듯 충무를 떠올렸다. 바다는 이순신 앞에서 하나로 묶였고, 한려수도는 장군의 넋 그 자체인 곳이다.
한려수도는 통영 한산섬에서 여수 오동도까지의 바다길로 그림처럼 수려한 섬들의 낙원이다. 여수, 남해, 삼천포의 바다를 아우르다 통영 한산섬에서 대첩의 최후를 맞는 바다의 파노라마는 내가 태어나던 그해에 나라가 지정하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속속들이 섬이 들어앉은 이 아름다움의 이유없음, 내 마음에 항상 섬이 사는 이유일까. 안태본 다도해, 무리지은 섬들 사이로 내 수사는 점점 무의미해질 것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정상까지 걸어서 15분이란다. 거기서 간단히 5분 정도 오르면 박경리 선생의 묘소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있다. 미륵산 오르다 심심하면 찾아보라는 듯 편평하게 터를 만져놓은 것에서 산소 하나에도 후세를 살피는 어른의 마음결 같아 평화로워진다. 내 곁에 서서 박경리 산소와 기념관을 찾던 분들의 대화가 어수선하다. 예를 들면 박경리 산소 또 있다는 식이다. 참견을 안하려던 마음 살짝만 풀어서 간략 소개를 해드렸더니, 생각보다 아주 고마워한다.
우리나라에서 박경리를 모신 기념관은 선생이 태어나신 통영 박경리 기념관이 있고 말년을 보내신 원주 박경리 문학의 집이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 함부로 거창하게 박경리 문학관이라 이름짓지 말 것을 당부한 뜻을 받들어 통영에서도 기념관이라 하였고, 원주의 집은 그야말로 문학의 집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그저 박경리 문학관이라 부르고 있어서이지, 옳은 그대로를 지칭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하겠다. 하동엔 아예 평사리문학관이라 이름지었다. 산소에는 봉분 하나만이 놓여 있으며, 일체의 비석조차 거추장스러워 하였다. 이 정갈한 어른의 마지막 모습이 죽어 바다를 지킨 장군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나는 살피지 못하겠다.
어머니와 당숙모는 케이블카 정상에서 잠시 기다리게 하고, 우리 가족끼리 미륵산 정상을 밟았다. 날씨 덕분에 심하게 헉헉거렸지만 바다에서 올라오는 날 것 그대로의 바람 덕분에 더위보다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사람은 젖은 빨래가 된 것 같은데, 빨래를 말려주기 위해 바람이 신속하게 쌩~ 달려와주는 식이었다.
미륵산 봉수대 아래에서 맞은 바람이 특히 시원했다.
오르막 내리막 햇살 바람 맞은 시각이 약 40여분 걸렸다. 겨우 40분 정도의 짧은 땀빼기가 생각보다 훨씬 기분좋았던 것은 바다를 조망하며 탁 트인 한려수도에 대한 무한사랑, 거기에 가족과 함께 한 단란한 나들이, 손에 생수 한 병 들지 않아도 되는 순전한 몸의 홀홀함 덕분이었다. 미끌거리며 흘러내리는 땀은 날씨 자체에 소속되어 있어서 건강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필수이지 않던가.
미륵산에서 내려오는 중간에는 정지용 시비도 있다고 하는데, 방향이 달라 가보지는 못하고 말았다. 다만 정지용 시비도 있냐고 고맙게도 물어와, 그분이 여행을 많이 다녔음을 알려 주었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와 다도해 지방을 여행하고 여러 편의 기행문을 남겼음을 강조하였다. 정지용에게 여행은 후기 자연시를 낳은 구체적인 창작의 근간이었다.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더욱이 한산섬을 중심으로 하여 한려수도 일대의 충무공 대소 전첩기를 이제 새삼스럽게 내가 기록해야 할만치 문헌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미륵산 상봉에 올라 한려수도 일대를 부감할 때 특별히 통영 포구와 한산도 일폭의 천연미는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할 뿐이다. 이것은 만중운산 속의 천고절미한 호수라고 보여진다. 차라리 여기에서 흐르는 동서지류가 한려수도는커니와 남해 전체의 수역을 이룬 것 같다.' - 정지용 '통영'5 중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뚜렷하게 사고싶은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중앙시장에 차를 세웠다. 어물전 대야들도 더위에 기진해 있어서 밭에 지천인 애호박을 위해 갈치만 사서 나왔다. 언덕위로 동피랑이 기웃거렸지만, 통영은 만만하였으므로 늘 조금씩 어디론가 밀려나도 조급하지 않았다. 미륵 케이블 타고 내려다본 다도해, 섬들의 속삭임이 여전히 파도를 먹고 있었다.
첫댓글 통영, 안면은 많은데...나도 한번 케이블카를 타봐야겠군. 보기만봤지 타보지는 못했는데...정지용 시비도...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