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째 '용돈벌이용'으로 쓰고 있는 어느 잡지에 몇 달 전 기고한 맛집 기행으로 오랜만의 인사 올립니다.
‘가정식 백반’, 그 추억에 잠기다
딸을 부인과 함께 호주에 유학 보낸 뒤 3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는 언론계 후배를 얼마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에 기억의 먼 밑바닥에 잠겨 있던 단어 하나를 되살려 내고는 마음이 한동안 아득해졌다. 아침은 아예 거르고 일주일이면 닷새 이상은 매끼 매식을 해왔다는 그 후배는 지금 자신의 가장 절박한 소망 하나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살기 위해 먹기는 하지만 이제 식당에서 사먹는 밥은 생각하기도 싫어. 왜 그거 있잖아? ‘가정식 백반’이라고. 사람 손맛이 배어 있는 그 밥하고 반찬을 식탁에 죽 늘어놓고 먹어 보는 게 내 소원이야.”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요즘 어딜 가도 ‘가정식 백반’ 하는 집이 없던데, 혹시 서울 어느 구석에 아직 그런 집이 남아 있으면 소개해 줘.”
‘가정식 백반.’ 가만히 뜯어보면 희안한 조합의 말인데, 그런 만큼 이 말이 딱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도시의 어느 밥집 골목에 가든 한 두 집은 ‘가정식 백반’을 낸다고 써붙여 놓곤 했다. 특히 서민들이 자주 가는 식당가에는 이런 백반집이 나름대로 성업을 이뤘는데, 사실 여기에는 한끼 식사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과 관습과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이 말을 쉽게 풀면 한마디로 ‘집 밥’이 되겠는데, 아무리 비싼 밥을 사먹더라도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죽 먹어왔던 ‘집 밥’에 대한 향수를 덮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먹는 밥과 끼니와 식사지만, 거기에는 이렇게 짙은 그리움과 깊은 정과 아련한 추억이 배어 있는 까닭이다.
이제야 한 장면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청량리 근처에 있던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화재로 불타버린 청량리 대왕코너 건물 옆 전농동 입구의 어느 골목이었다. 수학을 가르치던 담임 선생님께 ‘발탁’되어 방과 후에 급우들의 학기말 고사 시험지를 채점하고는 선생님 손에 끌려 골목 안에 있는 후미진 식당에 들어갔다. “에이, 자장면 사주시면 더 좋은데….” 속으로 이렇게 불평을 내뱉고는 낡은 목조 식탁에서 상을 받았는데, 바로 ‘가정식 백반’이었다. 여름방학 직전의 무더운 날씨, 아주머니는 우리 상에 차례로 반찬을 내와 늘어놓았다. 중간치 크기의 멸치에 꽈리 고추를 넣은 멸치볶음과 오이지무침, 검은 콩자반, 열무김치, 콩나물무침 등속이 먼저 차려졌고, 뒤이어 껍질이 기름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고등어구이와 감자조림이 나온 뒤 마지막으로 엄청 큰 사기그릇에 고봉으로 담긴 보리밥과 아욱 된장국이 마무리를 장식했다. 나는 이렇게 한 상 차려진 밥과 국, 반찬을 먹는 내내 저 멀리 경상도 끝자락에 계신 어머님을 생각했다. 어린 시절, 어머님이 그 많은 식구들을 위해 지어내신 그 밥, 그 국, 그 반찬의 맛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날, 내가 먹은 것은 밥이 아니라 추억이었다.
그 후배 말대로 정말 요즘은 바로 이런 ‘가정식 백반집’을 찾기 어렵다. 대도시 밥집 골목들에는 무지하게 비싼 가격의 한정식이 요란을 떨고 있지만, 가짓수만 많지 실제로 젓가락이 가는 찬들은 별로 없는 법이다. 양적 성장과 외적 치장에만 몰두한 대도시의 얼굴을 그대로 빼닮은 것들이다. 이런 마당에 서울 용산 삼각지 뒷골목 일대에 남아 있는 백반집들은 그 자체가 명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삼각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로타리 한쪽이 개발되어 아파트와 오피스텔 빌딩이 치솟아 올랐지만 그 반대 방향 국방부쪽 골목은 서울에서도 드물게 옛 서민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1번 출구로 나와서 국방부쪽 방향으로 접어 들면 서민풍의 골목 안에 아직도 가정식 백반을 그럴싸하게 내는 집들이 몇 군데 남아 있다. 요즘은 대체로 전국 각지에서 국방부로 출장 온 군인들이 손님들이지만, 옛풍을 간직한 이 골목길의 백반을 먹으려고 먼 길을 달려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 특히 점심 시간 직전에 이 골목길에 접어들면 연탄불에 생선을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바로 이런 풍경이 서민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나는 전통의 ‘가정식 백반집’의 본디 모습이다. 김치와 각종 나물, 이런 저런 조림 반찬이며 국에다 튼실한 생선 한 토막까지 여러 반찬이 나오는데도 절대로 5천원을 넘지 않는다. 이 골목 어떤 집을 들러도 먹을 만하다. 이 여름, 떨어진 입맛을 ‘삼각지 가정식 백반’으로 되살려 보는 건 어떨지?
첫댓글 영국 코벤트리로 '추억' 하나 배달해 주세용~
자~삼각지표 가정식 백반 영국으로 갑니다, 받으시지요! 집하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더욱 먹고 싶은 게 가정식 백반!!, 이 여사, 오늘 저녁, 내가 배달해 준 집밥 먹고 한동안 짠한 추억에 젖어보시라!!!, 건강하시구.
베트남 쌀국수로 해장하자는 선배의 주장을 일거에 박살내고, 점심 행선지를 회사 근처 생선 구이 집으로 바꿨습니다. 어머니의 손맛까지는 아니라도, 그럴싸한 나물이 나오는 곳으로...
오늘 '눈물의 짜장면'을 맛봄. 주인 소박, 짜장 따봉. 소생이 쟁이 생활 시작한 뒤 처음 촌지 제안을 받았던 대한노인회 앞이어서 감회가 새로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