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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알
요한복음 12:20-36, 히브리서 11장
2020년 4월 11일 주일낮 11시
인도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교회 진천
서로 인사합니다 반갑고 고맙습니다.
썩은 감자는 땅에 심어도 싹이 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감자 중에 씨눈이 있는 감자를 심으면 싹이 나고 땅속에서 감자가 많이 자라게 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24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그것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땅에 떨어진 씨가 죽는다는 것은 썩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 주일이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다.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되었고 그리고 부활이 일어났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25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자기 목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와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이 세상에서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한다(David Gujik).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소망하는 일에 대한 보증이고 보지 않은 일에 대한 확신이다.” 라고 한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히브리서 12:4). 아벨은 가인보다 더 선한 제사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아벨은 의롭다 함을 받았다. 아벨은 죽었으나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은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 제도에 지정된 제물이다. 레 27:26에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라고 했다. 아벨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서 제물을 바친 것이다(이상근, [히브리서 주석], 114). 희생 제물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의 예표이다(히 10:1).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히브리서 11:5).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이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히브리서 11:6). 노아는 죄로 가득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믿고 자기 가족과 함께 구원의 방주, 배를 수십년 동안 고난가운데 준비했다(히 11:7).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익숙한 사람들, 정든 땅을 떠나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전혀 모르는 어떤 곳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나아갔다(히 11:8).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삭에서 야곱에게로 믿음의 가문을 이루어 흘러갔다(11:9). 모세는 애굽 왕궁의 죄의 즐거움과 금은 보화와 온갖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히브리서 11:25).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의 길, 대속의 죽음의 길을 가신 것처럼 모세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가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당장은 손해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 길은 가나안으로 가는 구원의 길이었다.
히브리서 11장은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순례자로 사는 것이고, 우리의 본향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 방관자나 구경꾼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심히 즐겁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영원히 이 땅에서 살 수 없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2: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친히 하신 선언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이라는 말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부활을 가리킨다(아더 핑크, [요한복음강해], 지상우 역, 696]. “사람을 이끄는 권능을 그에게 부여해 준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다. 그것은 생명을 부여하는 권능을 그에게 준 것이 죽음인 것과 마찬가지다. 십자가가 없으면 그리스도가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없으면 십자가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 결합되어 있다”(H. Bonar). 십자가는 사랑을 구현하고, 십자가는 의를 나타내고, 십자가는 진리를 선언하고, 십자가는 화해를 선언한다(H. Bonar).
예수님은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 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모든 민족, 모든 종족,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권세로 부터 달아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라일 주교). 요한복음 6:44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어떤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 왔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인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자 했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한 것을 보고자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찾아 왔다. 이 헬라인들은 서방에서 찾아온 사람들이다. 이에 예수님은 “-그 때가 왔다” 말씀하셨다. 이전에 예수님은 그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2:4과 7:6이다). 이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받아야 할 그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님이 마지막 제사를 드려야 할 “그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영광받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상식과 달랐다. 예수님의 영광은 “완전히 낮아져서 채찍질을 당하고 조롱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금그릇 안에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땅속에 흙과 묻혀서 변화되고 새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씨앗이 땅의 흙속에 묻히지 않으면 식물로 자랄 수 없다. 부활의 권능과 새생명을 얻으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이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님께로 이끌려 올 수 있는 길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미워하는 삶은 우선 순위를 분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증오를 떠나서 하나님의 일들을 사랑하는 삶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는 자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요한복음 12:26).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예수를 섬기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David Guzik). 이것은 여러분과 저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가정, 직장, 마을, 학교에서 예수님의 종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David Guzik, John, Blue Letter Bible).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시면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요단강 물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성령님께 이끌리셔서 광야로 나가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 성도가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고난 주간이나 어떤 일정한 기간에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역시 예수님을 섬기며 따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금식보다 기도보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한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다. 아내와 버스를 타고 청주를 다녀 오는데 버스 정류장을 막고 자기 가족을 태우는 사람,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을 보았다.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미가서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가서 6:8)이 송아지를 잡아서 번제를 드리는 것보다, 예배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부정한 저울로 남을 속이거나, 약한 자를 학대하고 착취하거나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하나님은 악하게 여기신다(미가서 6:11-13). 이사야 58장은 금식보다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이사야 58:4).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집없이 떠도는 가난한 사람을 집에 들이고, 벗은 자를 입히는 것이다(미가서 58:6-7). 요즘으로 말하면 노숙자를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 누군가를 돌보고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숙자의 주민등록증을 살리고, 의료보험 혜택과 지원금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사비로 사진관에 데려가서 사진을 찍어주고 읍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을 하고 가까운 축협에 통장을 만들게 하고 주소를 우리 집으로 등록하게 하고 고 정부임 성도 빈집에 살게 했다. 3일을 살다가 말도 없이 가버렸다. 계속 집으로 대전, 청주 법원에서 그 노숙자에게 출석요구서가 날아 왔다. 나중에는 경찰이 둘이나 찾아와서 그 노숙자를 찾고 저의 직업을 캐물었다. 그 경찰들에게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고 거칠게 대답했다. 사실은 그런 순간에 여유를 가지고 따뜻한 마음과 말씨와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 일이 성도의 삶인데 아직도 그것이 어렵다. 읍사무소에 말해서 그 노숙자의 주소를 우리집 주소에서 말소시켰지만, 남을 돕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내와 약 일주일간 고 박창남씨 밭의 비닐을 치웠다. 약 3년간 밭을 임대해 농사를 지으면서 풀약을 쓰지 않고 친환경으로 하려고 비닐하우스 폐기 비닐을 갖다가 깔았다. 그런데 4륜이 아니면 밭에 올라가지 못하여 농사를 포기했다. 그 밭주인 가족이 그 비닐을 걷어 내는데 한달이 걸렸다고 한다. 걷어낸 비닐을 치워달라고 했다. 아내와 제가 약 일주일 동안 마대자루 약 60포대에 비닐을 담아서 산에서 평지로 수레로 옮겼다. 고물상 하는 분에게 돈을 주고 차를 불러서 사석 여사 마을에 분리 수거를 마쳤다. 삶 속에서 바른 삶,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은 나와 가족의 수고와 물질과 돈과 정성이 들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고 사랑의 삶을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 분별력과 지혜가 없으면 쓸데없이 고생을 더하고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남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은 지혜와 헌신이 필요하고, 기도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때가 다가오자 인성을 입으신 분으로서 고민하며 기도하셨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당연한 기도였다 (이상근).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인성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려는 기도였다(이상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복종하려는 열심이 만났다”(Bengel). “나를 구원하사”는 십자가 고난을 앞둔 두려움에서 구원과 시험을 이기는 길을 달라는 기도이다.
요한복음 12:28은 성부자간의 영화로운 대화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최고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다.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는 나사로의 부활을 포함하여 이전까지 모든 예수님의 성역을 통한 영광이다.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앞으로 십자가 부활을 통해 이루실 영광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음성을 들으신 것이 세번 나타났다. 세례 받으실 때(막 1:11), 변화하실 때(막 9:9),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방문했을 때(요한복음 12:28) 이다. 첫째는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기, 둘째는 윱법과 선지자, 즉 유대인 상대에서, 세번째는 헬라인, 이방인 상대로서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복음이 세계를 향하여 퍼져 나가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과 영광이 여러분과 저의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헌신, 사랑, 관용, 배려, 기도, 말씀, 기쁨으로 날마다 순간마다 계속되길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