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고려개국 벽상공신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지고 무성(武成)의 시호를 받았다. 이 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남평을 관향으로 하고 있다.
문다성은 갓난 아기 때 백제 남평현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전라남도나주시남평읍의 장자못가에 문암(文巖)이라는 전설 속의 바위가 남아 있다.[1]
전설에 따르면 472년(백제개로왕 18년) 남평 동쪽에 장자지란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며 군주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대종회에서는 472년(백제개로왕 18년) 탄생은 고려 개국공신이라는 역사 기록과 맞지 않아 통일신라 말기로 정정하였다.
문다성의 아들 문탁(倬) 이후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하여 1731년 장흥 월천서원에서 발간한 남평문씨 최초의 족보인 신해보에서 문익(文翼)을 1세조로 하였고 이후 최초의 합의된 대동보에서도 중시조인 문익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정리하였으며 최신의 대동보도 이를 따르고 있다.
남평(南平)은 전라남도나주시(羅州市) 남평읍 일대의 지명이다. 백제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지역이었는데, 신라가 통일한 뒤에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을 두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현웅현(玄雄縣)으로 고쳐 무주(武州)에 속하게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남평군(南平郡)으로 바꾸었고, 1018년(현종 9)에 나주목의 관할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으로 남평현이 되었다. 1914년 남평군이 나주군(羅州郡)에 통합되고, 1995년 3월 나주시남평읍으로 승격하였다.
1993년 탄강지인 전라남도나주시남평면 풍림리의 문바위 옆에 설단하고 매년 3월20일 단제를 모시며 장연서원에 배향하여 9월 중정일에 유림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강릉 문씨(江陵 文氏) 시조 문장필(文章弼)은 1170년(의종 24) 무신난의 성공으로 중낭장(中郎將)이 된 뒤 공부낭중(工部郎中), 금오위(金吾衛)의 차장군(借將軍), 어사잡단(御史雜端)이 되었다.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원수(元帥) 윤인첨(尹鱗瞻)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참전하여 서경을 공벌하였다. 2년 뒤 추밀원(樞密院)의 승선(承宣)이 되고, 1181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거쳐 이듬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1183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어사대부(御使大夫)를 거쳐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이후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