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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왜 하나님의 전쟁인가? ―“해방신학”과의 대화를 위하여―
김이곤 교수
서 론
남 아프리카 케이프․타운(Cape Town) 대학교에서 흑인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구약성서를 가르치고 있는 이투멜렝․J․모살라(Itumeleng J. Mosala)라는 교수는 그의 최근 저서인 ꡔ남 아프리카의 성서해석학과 흑인신학ꡕ이라는 책의 결론부에서 말하기를, “성서로 하여금 [명실공히]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책이 되게 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성서 [자체]를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I.J. Mosala, Biblical Hermeneutics and Black Theology in South Africa(Grand Rapids, MI: Eerdmans, 1989), p.193; 이 부분은 동일 저자의 논문, “Bible and Liberation in South Africa in the 1980s: Toward an Antipopulist Reading of the bible,” The Bible and the Politics of Exegesis(ed. by D. Jobling, P.L. Day and G.T. Sheppard; Cleveland: The Pilgrim Press, 1991), p.267에서 재인용한 것임.
라고 강력하게 역설한 바가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분명, 전통적인 성서학에 대한 매우 심각하고도 근본적인 도전적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 첫번째 비판점은 18세기 이래 지금까지 세계 성서학 위에 군림해 온 구미의 성서비평학이 지니고 있는 그 방법론적인 한계점과 자기 모순적인 성격이 드디어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이고, 그리고 그 두번째 비판점은 구미의 성서비평학이 성서신학의 중심주제를 분명하게 부각시켜서 “성서로 하여금 성서가 되게 하는 사명수행”에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도전은 심각하고도 근원적인 것이었다.
첫번째 문제점이 지적하고 있는 그 요지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해방신학이 성서를 다루는 문제를 놓고 제1세계 비평가들과 이에 대한 해방신학 선호의 성서학자의 응답에 관한 조리정연한 논술, Ch.E. Gudorf, “Liberation Theology’s Use of Scripture: A Response to First World Critics,” Interpretation 41/1(January 1987), pp.5-18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전통적인 구미 성서비평학은 성서본문(텍스트)이 그 구전과 그 문서전승 당시에는 무엇을 의미했던가(what it meant) 하는 것을 추론하는 데만 집중하고, 현재(!)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자가 처해 있는 오늘의 역사적, 사회적 문맥(what it means), 즉 오늘의 독자의 “컨텍스트”는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는 그 점이다(물론 이것은 오늘날의 “독자비평적 비평학”이라는 것과는 다른 문맥을 가진 주장이다). 말하자면, 구미의 성서비평학은, 성서본문이 언제 쓰여졌느냐? 누가 썼느냐? 어떤 문맥에서 쓰여졌느냐? 어떤 특수 용어가 사용되었느냐? 그 본문은 어디서 기원(起源)되었느냐 하는 것 등을 분석하고 추론하는 데에만 관심하고, 그 성서본문이 오늘의 우리의 역사적 상황(컨텍스트)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 그리고 그 본문이 오늘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는 것을 밝혀 주는 해석학적 책임은 “마치 비학문적인 것으로(!)”, 또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돌려 버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미의 역사비평학은 “성서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를 오히려 성서를 독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성서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부터 분리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성서 메시지를 사회적이고 집단적인데 보다 단지 개인적인 명상의 대상으로 더 이용하도록 만들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학문주의적 씨니시즘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다른 하나는, 구미의 성서비평학이 자신의 성서해석 방법론을 유일한 최선의 것으로 보고, 해방신학은 이러한 역사비평학적 방법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구미의 역사비평학적 결과들만을 최선의 모범답안으로 받으라고 제3세계 신학을 향해 사대주의적 복종만을 강요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미 성서비평학의 태도를 가리켜서 크리스타인 E. 꾸돌프(Christine
E. Gudorf)는 성서주석 결과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제국주의” Cf. Ch.E. Gudorf, ibid., pp.9, 17.
논리라고 비평한 바가 있다. 해방신학은, 그러므로 성서를 불변의 무시간적 원리로서의 원형(archetype)으로서 볼 것이 아니라, 그 성서를, 이와는 달리, 언제나 자체변형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서 언제든지 자신을 사회적 여러 삶에(컨텍스트에) 직접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모델적 “원형”(prototype)으로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고 세계적 여성신학자인 엘리자벳․슛슬러․휘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가 부르짖은 바가 있다.Ibid., p.6; cf. E.S. Fiorenza, In Memory of Her: A Feminist Theological Reconstruction of Christian Origins(N.Y.: Crossroad, 1983), pp.33-34.
이렇게 하여, 해방신학은 감히 구미의 성서비평학이 그 제국주의적 교조를 버리지 않는 한은 그 성서비평학이 오히려 성서로 하여금 성서가 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한 셈이라 하겠다.
그 다음, 모살라(Mosala)가 지적한 현대 구미 성서신학의 두번째 문제점은, 앞에서 말한 것보다 좀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현대성서신학이 성서신학의 중심주제를 분명하게 부각시켜서 성서로 하여금 성서가 성서되게 하는 그 본래적 사명수행에서 실패하였다는 점이었다. 논의할 여지없이, 현대성서신학의 “중심주제”는 인간해방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인간 구원”이라는 것이 그 중심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신학은 이 “구원” 주제에 대한 깊고도 명철한 반성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이 해방신학의 주요 비판점이었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성서신학의 중심주제인 “구원”의 개념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구미의 성서학과 제3세계의 해방신학 사이에는 근원적인 차이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두 영역의 성서학이 모두 구원개념을 단순하게 “저 세상적인 것”으로 보고 따라서 현실역사의 삶을 단순한 하나의 시험적(테스트적) 성격을 띤, 즉 저 세상을 향한 시한부적 성격을 띤 것으로만 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구미의 신학은 어디까지나 역사 외(外)적으로(extra-historically), 그리고 이론적이고도 형식적으로 구원개념에 접근해 간 반면에, 그러므로, 구미신학은 구원의 문제를 개인주의적이고도 관념주의적으로 접근해 간 반면에, 이와는 달리, 해방신학은 어디까지나 역사 내(內)적으로(intra-historically), 그리고 실천적이고도 질적으로 구원개념에 접근해 가서, 그러므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계층적 비인간화 현상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방식으로 구원문제에 접근해 갔다는 점에서 그 근본적인 차이점이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Cf. G. Gutierrez, A History of Liberation(Maryknoll: Orbis Books, 1973), pp.149-187.
사실, 성서의 현실을 냉엄하게 들여다보면, 구미의 성서학이나 구미신학 일반이 걸었던 그 길은, “성서가 인간의 삶에 의미를 줌으로써 인간을 비인간화의 죄의 사슬로부터 풀어 주는 그런 인간해방과 인간구원에 이르게 해 주는 책이 되도록 성서를 해석해 주고 또 성서독자들로 하여금 그들도 또한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는 성서신학적 의무”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관심한, 매우 관념적인 학문주의에로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Cf. E. Gudorf, ibid., pp.9f.
6a) G. Gutierrez, A History of Liberation, pp.35, 118, 136, 194.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역사비평학적 성서학을 필두로 한 이러한 구미신학의 입장을, 만일 우리가, ꡔ모든 종류의 비인간화 요소의 요람이 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계층적 억압체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하는 그 “해방의 선교”가 곧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목적ꡕ이라고 선언한 라틴 아메리카 주교의 메덜린(Medellin) 교서6a)의 정신과 비교해 본다면,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는 구미의 성서비평학적 태도가 오히려! 해방신학자들보다 훨씬 더 “비성서적”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구미의 전승사적 성서연구 고찰방법을 통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는 출애굽이라는 정치적 성격을 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사에서부터 출발하였고, 이 사건이, 적어도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를 이해하는 “모범적”(paradigmatic) Ibid., p.159.
사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약성서는 끊임없이―여러가지 문학양식을 이용하여―약한 이웃을 경멸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잠 14:21 특히, 출 22:21-23), 동시에 야훼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변호해 주는 것(렘 31:34)이라는 것을 가르켜 왔던 것이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다면, 즉 성서의 현실이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약자를 위한 하나님의 인간해방 활동과 인간구원 활동을 증언하고 그 패러다임을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그런 것이 성서라면, 실로 그것이 그러하다면, 저토록 전통깊은 구미의 성서학과 구미신학이 어찌하여 그토록 성서의 해방주제를 “역사내적으로”(intra-historically/qualitively) 다루지를 못하고 즉 인간역사 내부의 주요 현안문제로 다루지를 못하고 그것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하였던 것일까? 바로 이 문제가 이 강연에서 다루려고 하는 중심적 이슈요 동기이다.
구약을 공부하고 있는 한 학도로서, 본인이 보는 관점에 의하면, 그것은 분명, 구미신학은 여기서, 즉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인간해방 역사를 통하여서 오히려 “해방의 논리”보다는 “힘의 논리”와 “지배논리”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잘못된 구미신학의 시행착오적 성서이해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소위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일하시는 그 하나님의 인간해방사에 관한 성서설화의 진의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한 성서해석학적 오류로부터 빚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성서해석학적 오류가 기독교 최초, 최대의 이단자인 마르시온(Marcion)의 성서이해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의 핵심은, “왜 하필 하나님의 전쟁인가?”, “왜 하필,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방식을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방식으로만 전개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해방 전쟁에 관한 성서적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라고 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1.출애굽 해방사건은 하나님의 전쟁의 대표적인 성서적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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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호익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08-14 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