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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나폴레옹,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도주하는 나폴레옹 군대.
1814년 3월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유럽 연합군에 패해 엘바섬으로 유배됐된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고 황제에 즉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연합군과 나폴레옹이 벨기에의 워털루에 진을 쳤다. 영국군 9만 5천명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 12만 명 등 모두 20여만명이 넘는 연합군을 영국의 웰링턴이 지휘했다. 이에 맞선 나폴레옹군도 12만 5천명에 달했다.
워털루에 집결하기 전 웰링턴은 북쪽으로부터 진군해 왔고, 프로이센 군대를 지휘하는 블뤼허는 측면을 보조하며 웰링턴과의 합세를 시도했다. 라인강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가 그리고 러시아 연대들이 예비군대로서 독일영토를 가로질러 프랑스로 진군해 왔다. 이들이 모두 집결하기 전 이들을 분열시켜야 했던 나폴레옹은 서둘러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 6월 16일 프로이센 군대의 일부를 격퇴시킨 나폴레옹은 17일 워털루로 진군했다.
6월 18일 나폴레옹은 휘하의 평범한 그루쉬 장군에게 프로이센 군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워털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웰링턴을 공격했다. 1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네 번이나 공격했으나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루쉬가 쫒았던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대는 그루쉬를 따돌리고 워털루로 무사히 집결, 웰링턴과 합류하고 나폴레옹을 기다렸다. 프로이센 군대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내려진 나폴레옹의 공격 명령으로 결국 나폴레옹군은 전투에서 패했다.
나폴레옹은 항복해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죽었다. 워털루 전투는 유럽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나폴레옹의 패배로 유럽에는 이른바 빈체제가 성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체제는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완고한 복고체제를 유럽 전역에 다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조선
[1998년] 원로배우 김진규씨 별세
← ‘오발탄’ 등 7백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원로 영화배우 김진규씨
원로 영화배우 김진규(75)씨가 1998년 6월 18일 골수암으로 별세했다. 온화한 인상에 차분함이 느껴지는 김씨는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까지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영화를 이끈 톱스타였다. 1923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한 그는 연극무대에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의 권유로 ‘피아골’에서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 데뷔, 빨치산으로 귀순하다 총을 맞고 죽어가는 애절한 라스트 신 연기로 단번에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듬해인 1956년 사극 ‘옥단춘’을 찍으면서 신인 여배우 김보애씨와 결혼한 그는 가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멜로 드라마와 문예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후 ‘로맨스 빠빠(1960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새 엄마(1963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고 1970년대 이후에도 ‘삼포 가는 길’ ‘불꽃’에서 주연을 맡았다. 김씨가 성실하게 일에만 매달리면서도 가족들의 불행을 막지 못하는 맏이 철호 역을 맡아 열연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년)’은 한국영화 사상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화려했던 연기생활에 비해 실제 삶에서는 많은 부침을 겪었다. 1970년 사재를 털어 직접 제작,감독한 ‘성웅 이순신’이 실패한 뒤 1978년 같은 소재로 ‘난중일기’를 제작했으나 이 역시 흥행에 참패, 가정이 풍비박산 났다. 연기생활 40여년 동안 출연한 작품만도 7백여편에 이르며 청룡상, 부일영화상, 한국연극영화 예술상, 대종상, 서울시문화상 등 거의 모든 영화상의 남우주연상을 한 차례 이상씩 받았다./조선
[1928년] 극지탐험가 아문센 사망
← 남북 양극탐험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북극해에서 사라진 아문센.
노르웨이 출신의 극지탐험가 아문센이 비행선 사고로 추락한 친구 노빌레를 구출하려다 1928년 6월 18일 북극권에서 조난당해 운명을 달리했다. 54세였다.
보르게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나 북극탐험을 꿈꾸며 자란 아문센은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95년 1등항해사가 됐다. 북극점 정복의 제1인자를 꿈꾸던 아문센은 1909년 미국인 R.E.피어리가 그보다 먼저 북극점에 도달하자 목표를 남극으로 바꾸어 1910년 ‘프람호’로 남극탐험을 떠났다. 로스해의 고래만 대빙벽에 기지를 설치하고 동료와 52마리의 개썰매로 남극점을 향해 출발한 지 55일 만인 1911년 12월 14일, 인류사상 최초로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것은 영국의 스콧 일행보다 35일 앞선 것이었다.
1925년 아문센은 비행정에 의한 북극비행을 시도했으나 실패, 다시1926년 엘즈워스와 이탈리아인 항공기술자였던 움베르토 노빌레와 함께 비행선을 이용해 북극을 횡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북극 횡단 비행에 대한 신빙성의 논쟁은 죽기 전까지 아문센을 괴롭혔다.
1928년 노빌레 일행의 북극탐험대 비행선이 스피츠베르겐 근처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하기 위해 비행정으로 날아가던 중, 비행정와 함께 아문센의 소식이 끊겼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
←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 시가지로 진격하는 북한군
6·25전쟁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군 가운데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석방되었다. 6월 8일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국제연합(UN)군측과 공산군측 간에 포로송환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송환을 바라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며, 송환을 바라지 않는 포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계해 총 120일 간의 설득 기간을 둔 뒤 최종 결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북한에 되돌려보낼 수 없다는 주장 아래 18일 0시를 기해 분산·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천·대구·상무대·논산·마산·부산·부평 등 7개 수용소에 분산·수용되어 있던 3만 7,000명의 포로 중 2만 7,092명이 석방되었다.
[1953년] 이승만, 반공포로 전격 석방
← 반공포로 석방을 환영하는 경북 영일군민들
1953년 6월8일, 유엔군ㆍ공산군 양측간의 포로송환문제가 2년 만에 타결됐다. 조기 종전을 원한 유엔군측의 대폭적인 양보가 돌파구였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2개월 내에 맞바꾸고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체코ㆍ폴란드ㆍ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가 4개월동안 이들의 귀환을 설득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정부와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데가 반공포로들이 6개월동안이나 이들의 설득공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6월18일 새벽2시, 미군이 경비중인 부산ㆍ대구ㆍ광주ㆍ논산 등 포로수용소의 전원이 끊기고 철조망이 뚫렸다. 유례가 없는 반공포로들의 대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못했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지만 주민들이 이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3만5600여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자유를 찾은 포로가 2만7,400여명이나 됐다. 그러나 8,000여명은 다시 철조망 신세를 져야했다./조선
[1850년] 커티스(Cyrus Hermann Kotzschmar Curtis) 출생
← Cyrus Curtis
1850년 6월 18일 태어남 / 1933년 6월 7일 죽음
"결코 큰 일을 이루지 못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시키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시키는 일밖에는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치루스 H. K. 커티스
커티스는 필라델피아에 언론 왕국을 세운 미국의 신문·잡지 발행인이다. 중학교 시절 수동식 인쇄기를 사서 4쪽짜리 주간지 <영 아메리카 Young America>를 펴낸 것이 그의 최초의 사업이었다. 이후 그는 보스턴으로 가 신문사 계통에서 일하다가 <피플스 레저 The People's Ledger>의 발행인이 되었다. 1879년 <트리뷴 앤드 파머 Tribune and Farmer>를 창간했고, 1883년에는 이 잡지의 여성란을 본격화한 <레이디스 홈 저널 Ladies' Home Journal>을 만들어 1년 반 만에 발행부수 20만 부를 기록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90년 커티스출판사를 세웠고, 1897년에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Saturday Evening Post>를 인수했다. 유능한 편집인 로리머와 손잡은 그는 인수 당시 발행부수가 2,000부를 넘지 않던 이 16쪽짜리 주간지를 5년 만에 50만 부를 넘는 유명한 잡지로 키워냈다. 이 잡지의 발행부수는 1909년에 100만 부,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270만 부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들을 인수해 신문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 분야에서는 잡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99년] 1960년대 농구스타 박신자,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1960년대 한국 여자농구 최고스타였던 박신자(朴信子)씨가 1999년 6월 18일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박신자씨는 세계 여자농구 107년 사상 위대한 선수 및 지도자 25명에 포함되어 사진과 국제대회에서 획득한 메달 등이 영구전시되는 이같은 영예를 안았다.
이 전당은 1999년 6월초에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 건립됐다.명예의 전당측은 박씨가 1960년대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아계라고 말했다. 박씨는 1963년 제4회 페루세계선수권대회에서 유일한 동양선수로 베스트5로 선정됐고, 1967년 제5회 체코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며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준우승의 주역이 됐다.
1967년 은퇴한 그는 1982년 신용보증기금 창단감독을 맡아 한국 스포츠사상 첫 여성사령탑 기록을 세웠다. 1983년에도 여성으론 첫번째로 여자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박씨는 1971년 미8군 문관 스티븐 브래드너씨와 결혼했다.
[1989년] 차범근, 서독에서 축구선수 은퇴
← 축구선수 차범근
차범근 선수가 1989년 6월 18일 서독에서의 축구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서독 분데스리가 기록은 3백8게임 출장에 98득점이었다. 차범근 선수가 서독 축구계에 발을 디딘 것은 1978년 12월30일이었다. 서독 프로팀인 다름슈타트클럽에 단신으로 건너가 테스트를 받은 것이 그때였다. 그러나 차의 본격적인 서독생활은 1979년 7월 12일 프랑크푸르트팀과 입단계약을 맺으면서였다. 당시 연봉은 22만마르크(6천6백만원)였다.
그는 입단 첫 해 12골을 터뜨리며 소속팀을 UEFA(유럽축구연맹)컵 우승팀으로 끌어올렸으며, 덕분에 다음 시즌 연봉 40만 달러(1억 1천만원)의 ‘갈색 폭격기’로 자리잡았다. 그의 서독생활은 1983년 7월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진가를 더했다. 당시 레버쿠젠에는 차의 서독진출을 시기, 고의적인 파울로 척추뼈를 다치게 한 ‘독일 병정’ 겔스돌프가 있었지만 차범근은 모든 것을 화해하며 이적에 동의했다. 이적료 1백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에 연봉 52만6천 마르크(1억6천만원)도 동양인 선수에게는 엄청난 액수였지만, 적을 용서하는 차의 태도에 서독 축구팬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차는 은퇴 후 쾰른 체육대에서 본격적인 축구 정교사 코스를 밟아 자격증도 땄다./조선
[1983년] 중국 전인대, 국가주석에 이선념, 국가중앙군사위주석에 등소평 선출
1983년 6월 18일 중공 전인대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에 등소평이 선출됐다. 쓰촨성 출생 등소평은 고급중학졸업 후, 1920년 프랑스에서 고학하였다. 젊어서는 모택동을 지지했으나 1978년 3차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모택동을 비판하고 경제의 현대화 건설·사상 해방·문호 개방책이라는 대전환을 가지며, 1979년 미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3년 제6기 전인대에서 등소평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함에 따라 중국의 권력기관의 하나인 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서 등소평은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후 등소평은 1989년 6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11월 공산당 13기 5중전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장쩌민 총서기에게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1980년] 한국-아랍에미레이트연합, 국교수립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는 아라비아 반도 동부에 있는 7개 에미리트[아랍 토후국(土侯國)]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1853년 실질적인 영국의 보호국이 된 이래 여러 토후국들이 흥망과 집산을 되풀이하다가 1971년 카타르·바레인을 제외한 토후국들이 에미리트 연합국으로 독립하였다.
아랍에미리트는 1980년 6월 한국과 정식으로 수교한 이래 경제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1987년에는 서울 주재 아랍에미리트 대사관이 개설되었고,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에는 18명의 선수단이 참여하는 등 문화 체육 교류도 활발하다. 1994년 6월에는 연방평의회 의장 아브둘라 무헤이르비, 2000년 6월에는 석유광물자원부 장관 알 나스리, 2001년 9월에는 교육청소년부 장관 알 샤라한이 우리나라를 방한하였다. 한국에서는 1981년 동력자원부 장관, 1982년 건설부 장관, 1999년에는 산업자원부 장관, 2001년에는 산업자원부 장관과 국무총리 등이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하였다. 2004년에는 과학기술부 차관이 방문하여 국내 원자력 기술 SMART 기술 협력 MOU를 체결하였으며, 2006년 5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하였다. 이는 중동지역과의 향후 활발한 경제 협력을 예고하고 있다.
양국간에 체결된 협정으로는 항공협정(1991년), 투자보장협정(2001년)이 있다. 2000년 현재 대(對) 한국 수출은 47억 달러이고, 수입은 19억 90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 화학제품, 철강, 금속제품 등이고, 수입품은 섬유류, 전자 및 전기기기, 1차상품, 기계류 등이다. 아랍에미리트는 한국 제2위의 원유 수입국이자 중동지역 최대의 수출시장이다. 한국에 대한 아랍에미리트의 총수출 중 원유는 약 80%를 차지한다. 2001년 12월 현재 교민은 444명이고, 체류자는 576명으로 기록되었다.
[1979년] 카터, 브레즈네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 서명
←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비엔나에서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에 조인했다.
1979년 6월 1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소련의 레오니드 L. 브레주네프가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II)에 조인했다.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I)은 1972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소련의 브레주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사이에 조인되었다. 곧 미국과 소련은 SALT II 협상에 들어갔다. SALT II는 진정한 의미의 조약과 합의성명 및 양해사항을 제시한 의정서, 백파이어의 항속거리와 생산을 제한하겠다는 브레주네프의 약속, 그리고 SALT III의 원칙에 관한 성명서 등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8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협상을 재개하며 이름을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으로 바꾸었다. 이 협상은 1983년 11월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조인된 SALT II도 1979년 12월말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 의회가 비준을 거부했다.
[1976년]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제 4차경제개발 5개년계획(1977∼81)의 기본목표는 <성장·형평·능률>의 이념하에 자력성장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① 철강·석유·기계 등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화 전략 ② 사회간접자본의 계속적인 확충 ③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한 능률향상과 기술개발 등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79년의 제 2 차 석유파동, 세계정세의 불안으로 인한 수출수요의 둔화, 국내정세의 불안정 등의 요인은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이래 최대의 난국을 가져왔다. 즉 성장률은 계획(3∼5%)에 훨씬 못미치는 -5.7%로 크게 떨어졌으며, 소비자물가는 22∼23%에서 34.6%로 크게 웃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마이너스성장은 기업경쟁력 약화에 따른 대외경쟁력의 저하에 그 근본 원인이 있었으며, 경제 전반에 대해 새로운 개편문제가 제기되었다.
[1812년] 러시아의 소설가, 기행작가 곤차로프(Goncharov, Ivan A., 1812~1891) 출생
← Ivan Aleksandrovich Goncharov
볼가강(江) 연안의 심비르스크(지금의 울랴노프스크) 출생. 모스크바대학교 문학부 졸업. 1835년부터 30년 동안 재무성·내무성 등의 관료생활을 하였다. 1952년에는 푸차친 제독의 비서로 전함(戰艦) 팔라다호를 타고 세계를 주항(周航)하였으며, 특히 1854년 4∼5월에는 한국의 거문도와 동해안 여러 곳에 상륙하였다.
그 여행기를 귀국 후에 출판한 《전함 팔라다 Fregat Pallada》(1858)에 자세히 담았는데, 특히 이 책에는 한·러 사이의 첫교섭을 빠짐없이 서술하였으며, 작가 특유의 유머와 페이소스로 당시 쇄국 체제하의 한국의 모습을 잘 그려내었다. 만년에는 창작을 그만두고,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을 논평한 《백만의 가책》(1872)과 자서전적 고백 《늦었지만》(1879) 등을 썼다.
《오블로모프 Oblomov》(1859)와 《단애(斷崖) Obryv》(1869)는 최초의 장편 《평범한 이야기 Obyknovennaya istoriya》(1847)와 더불어 3부작을 이룬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러시아 작가 중에서도 특이한데, 대표작 《오블로모프》의 주인공에 대한 성격묘사는 그 전형(典型)이다. 우수한 소질을 타고났으나, 농노제도(農奴制度)하에서 아무 어려움 없는 생활을 하는 동안에, 모든 결단력과 행동력을 빼앗긴 교양 있는 "무용자(無用者)"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 때문에 무기력하고 게으른 성격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오블로모프 기질"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장편 《단애》에서도 라이스키라는 주인공을 통하여 이 시대의 "무용자"의 한 변형을 추구하였으며, 또 러시아 생활의 부정적인 면을 그려내었다.
[1942년] 원폭 제조 ‘맨해튼 프로젝트’ 가동
← 원자폭탄 개념도. 야구공 사이즈의 플루토늄 구(球)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독일이 우라늄의 원자핵 분열을 성공시켰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헝가리에서 망명한 물리학자 질라드는 아인슈타인을 설득, 핵분열이 군사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리도록 했다.
지지부진하던 원자력 연구가 급물살을 탄 것은 1941년 12월 미국 과학연구개발청 장관 바네바 부시가 루스벨트로부터 최종승인을 얻어내면서였다. 전쟁 중인 데다가 실험실·제조시설 등을 비밀리에 건설하려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육군부가 실무책임을 떠맡았다.
1942년 6월 18일, 이를 위한 공병대가 발족됐고 9월에는 그로브스 공병대 준장이 최고 책임자로 임명됐다. 발족 당시의 이름은 ‘대용품개발연구소’였으나 8월에 ‘맨해튼 관구’로 바꿨다. 20억달러나 투입된 이른바 ‘맨해튼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초기 연구를 주로 컬럼비아대에서 진행해 이 대학이 위치한 맨해튼이 암호명으로 쓰였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폭 실험이 성공함으로써 ‘맨해튼 프로젝트’도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됐다.
[1917년] 법학자 황산덕(黃山德) 출생
1917. 6. 18 평남 양덕~1989. 10. 19 서울.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대를 졸업했고, 1960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1976년 중국 둥우대학교[東吳大學校]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8년 고려대학교 정법대 부교수, 1952~66년 서울대 법대 교수, 1952~89년 룸비니 불교학생회 총장, 1962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고, 1966년 변호사를 개업했다. 같은 해에 법철학회 회장이 되었다. 1966~74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1966~71년 동대학 법정대학장, 1973년 동대학 대학원장, 1974년 동대학 총장을 지냈다. 법무부장관, 1976년 문교부장관, 1980~89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및 불교진흥원 이사장, 1985년 학술원 회원(법학)이 되었다. 국민훈장 동백장, 중국 대수경성훈장(大綬景星勳章),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 법철학의 권위자로서의 역저 〈법철학〉을 비롯해 〈법학통론〉·〈형법총론〉·〈삼현학 三玄學〉·〈창조주의 복귀〉 등이 있다.
[1891년]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출생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년 6월 18일 ~ 1944년 3월 13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김진상(金眞常)이며, 김근포(金槿圃)라고도 하였다.
학창시절
황해도 장연에서 지주인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의 3녀로 태어났다. 김윤방은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운 선각자였는데, 김마리아가 어릴때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어머니도 곧 사망하여 김윤오, 김필순 등 숙부들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김마리아의 집안은 민족 의식이 투철한 명문가였다. 김마리아의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의 아들인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김규식의 부인이며 역시 독립 운동가인 김순애에게는 김마리아가 나이 어린 종고모가 된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졸업한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류동렬,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김마리아는 숙부의 집에서 연동여학교(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면서 민족정신을 갖고 있는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 시를 거쳐 도쿄 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독립운동
1919년 도쿄 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구금되었다. 이때 고문을 당해 몸을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난 사이,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의 진링(金陵)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3년 귀국하였으나,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교사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다. 그는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쓰다가, 1943년 오래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평양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고,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사후
2ㆍ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를 소재로 쓴 것이며, 안창호가 김마리아같은 여성이 열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고문을 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 등이 남아 있다. 그는 1938년을 전후하여 가톨릭, 장로교, 감리교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불굴의 의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
[68년] 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Galba) 즉위
← Coin featuring Galba
68년 6월 9일 5대 황제 네로가 자살하자 로마제국 원로원이 68년 6월 18일 에스파니아 속주 총독 갈바를 제6대 로마제국 황제(제일인자)로 인정했다. 에스파니아 주둔군이 황제로 옹립한 갈바와 함께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올 것이라는 소문에 황급히 결정된 것이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 출신의 명문 귀족 갈바를 당시로서는 황제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네로 타도의 선봉장이었던 갈리아 총독 빈덱스도 네로를 대신할 황제로 갈바를 천거했을 정도였다.
갈바는 공직에 나설 자격이 있는 30세부터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등용되어 갈리아(프랑스)의 아퀴타니아 속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라인강 방위군 사령관, 아프리카 속주 총독, 원로원 의원을 역임한 후 서기 60년에 황제 속주인 에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8년동안 속주총독으로 근무했으나 한번도 속주민에게 고발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조선
네로의 죽음으로 카이사르의 대가 끊기고 카이사르와 피한방울 섞이지않은 갈바가 황제에 즉위되고 8개월간 집권했다가 죽음을 당하고 베시파시아스누스황제가 역사속에 등장한다
그밖에
2004년 피아니스트 안수진씨, 한국인 첫 슈만콩쿠르 3위 입상
2004년 영생교주 조희성씨 사망
2002년 한국 월드컵 우승후보 이탈리아 2대1 승. 꿈의 8강 달성
1999년 1960년대 농구스타 박신자,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1998년 금감위, 55개사 퇴출대상 기업 발표
1989년 이효상 국회의장 사망
1981년 국제기능올림픽서 4연패
1981년 건설의 날 제정
1969년 신상옥-김지미, 제15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여우주연상 수상
1968년 서울서 제2차 세계대학총장회의
1964년 한국-버마 무역협정 체결
1964년 뉴욕시 할렘에서 흑인폭동
1962년 건설부 신설
1962년 박정희 내각수반 취임
1954년 과테말라 내란
1953년 나기브 이집트 초대 대통령 취임. 왕제에서 공화제로 변경
1952년 국회, 임시의장에 신익희, 부의장 조봉암 김동성 선출
1951년 프랑스 총선서 드골파 제1당 진출
1950년 북한군, 정찰명령 제1호 하달
1936년 프랑스 인민전선내각, 주40시간 노동제 가결
1935년 영국,독일 해군함선협정에 조인, 독일은 영국의 35%의 함대를 보유
1929년 제5차 공산당 사건
1923년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에트너 화산 폭발, 카스틸리오네 지방이 괴멸
1922년 이라크, 독립을 요구하는 반영국 무장봉기 발생
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1918년 미국의 경제학자 모딜리아니 출생 - 198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1845년 프랑스의 의사. 병리학자 라베랑 출생 - 1880년 말라리아 기생충 발견
1812년 영국, 미국 전쟁 개전
1769년 조선 영조, 난장형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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