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삶의 태도, 하라다교코
하라다 교코 선생의 '나와 한국'을 읽고
1. 들어가며
최근 하라다 교코(原田 京子) 선생이 책을 냈다면서 편지와 함께 작은 책을 부산으로 보내주셨다. 하라다 씨를 처음 만난 건 오류동집회에서였다. 아마도 꽃동네 봉사 준비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였던 것 같다. 이진구 선생님의 소개에 의하면, 자신의 시아버님이 조선총독부의 직원으로 일하며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일조하였기 때문에 한국에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려 봉사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존경의 눈으로 그분을 보았다. 체구도 작고 연약해 보이는데, 저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놀라웠다.
프로필을 보니, 도쿄도립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복지관 사례관리자로 일하다가 중등 사회과 교사, 양호학교 교사를 거쳐 2002년 정년 퇴임을 했다. 20대 초반에 무교회 그리스도교 신앙에 접하여 이미이(今井)관성서집회에서 신앙을 배웠다.
선생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압록강 수풍댐 건설 기사로 일했다. 그 덕분에 집이 부자가 되었지만 그때부터 왠지 조선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결혼하고 보니, 시아버지가 조선총독부 전기기사로 일해서 남편은 경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인 가정부를 두고 유복하게 살았다고 하면서, 남편은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그 당시는 어려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지배자 편이어서 죄송하기 그지없다. 조선과의 언젠가 화해를 위해서 무슨 역할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남편이 선생이 55세일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슬픔 속에서 한 가지를 결심했다. 바로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남편과 했던 말을 꼭 실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분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정년 퇴임 이후 더욱 열정적인 인생을 사셨다. 퇴직을 하자마자 자신이 계획한대로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그것이 끝나자 고려박물관 일을 시작했고, 일한우화회 임원으로 한일청년교류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등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굳이 소개하는 건 여러분에게 하라다 선생의 진실함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2. 꽃동네 봉사 활동(2002년 3월-2003년 5월, 15개월)
2002년 당시 무교회에서 한일관계를 전담하신 분은 이진구 선생님이었다. 일본무교회 B씨로부터 한국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은 이 선생님이 당시 꽃동네 고문변호사로 활동하던 최정일 법제처 국장을 통해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꽃동네는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춘 시설이다. 이진구 선생님과 미리 방문하고 담당수녀의 면접을 거쳐 중증 어린이들의 지도를 맡게 되었다. 차로 10분 거리의 개인 사택(원룸)을 배정받았고, 직원으로서 식당도 이용할 수 있었다.
워낙 중증인 아이들인지라 교육은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었는데, 하라다 선생이 오면서부터 개별학습 계획을 세워 한 명 한 명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시작하였다. 선생이 아이들 하나하나를 껴안고 노래를 불러주고, 대화해가며 노력한 결과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져 갔다. 말을 하지 못했던 아이가 ‘하라다 이모’를 부르고, 천장만 보던 아이는 하라다 이모가 오면 기어서 무릎으로 올라오곤 했다는 것이다. M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때의 광경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곳에 온 이후 가장 소통이 어려웠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실명, 자폐, 중증 지적장애의 15세 여아 숙이입니다. 몸에 손이 닿는 것조차 절대로 거절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홀로 앉아 15년을 살아온 것입니다. 매일 노래를 불러주며 손을 만지고 다리를 만지고 몸을 쓰다듬어 주다보니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10개월만에 내 무릎 위에서 30분 이상 앉아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후에는 특수학교 교실로 가는 바람에 못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가서 그 노래를 부르며 손발과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이름을 부르니 나를 보고 소리를 내어 우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나를 알아보고 기뻐서 울었던 것 같습니다. 곁에 있던 수녀님도 “운다고?”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이들의 죽음에 관한 글이었다. 아이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쓴 글이 두 번 있었다. 꽃동네에서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의 장례를 치러주고 있었다. 깨끗한 수의로 갈아입히고, 미사를 드려주고, 정해진 꽃동네 묘지에 묻는 절차를 담당수녀가 정성껏 해주는 모습이 상세하게 나와있어 참 다행이었다.
사실 나는 꽃동네를 매우 좋게 보고 있었는데, TV 고발프로그램에서 오웅진 신부의 재산 은닉을 밝혀낸 적이 있어, 자선사업가의 탈을 쓴 사기캐릭터가 아닌가 하고 실망하였었다. 그런데 하라다 선생이 쓴 기록을 보니, 아이들을 매일 깨끗이 씻기고 잘 먹이고 직원과 봉사자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하고 있었다. 오 신부는 곁길로 갔을지라도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의 진심이 살아있는 곳이라 인정하기로 했다.
꽃동네에서의 생활은 선생에게도 보람이 컸고,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3. 광명 사랑의 집 봉사(2003.9~2004.3, 6개월)
1년 남짓한 꽃동네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더 낮은 곳에서 봉사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배명수 선생님의 소개로 성인복지시설인 광명 사랑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목사님이 동생부부와 함께 운영하는 민간시설로 45명의 성인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다.
이곳 입소자들은 하루종일 아무 교육도 훈련도 없이, 아침이면 일어나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자는 수용생활 그 자체였다. 선생은 이번에도 일본의 지인들이 기부해준 교재와 교구를 가지고 와서 기능훈련을 시작했다. 덩치 큰 성인들인데도 어린아이같아서 하라다 선생의 공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꽃동네와 달리 봉사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입소자들과 한 방을 써야 했으며, 식사준비도 도와야 했고, 매일 막히는 화장실청소도 했다니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방의 여자분이 계속 중얼거리는 바람에 밤에 잠을 잘 수 없어 수면제를 먹었다는 대목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24시간 근무하는 시스템이어서 매우 힘드셨을 것이다.
그때 오류동집회에 꼭꼭 오셨는데 우리가 걱정을 참 많이 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럼에도 선생은 늘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걱정하지 마세요. 입소자 분들이 나를 기뻐해주니 보람이 있습니다. 행복한 하루하루입니다.”
오히려 입소자들의 순수함을 칭찬하고 있어 마음이 착잡했다.
4. 고려박물관 활동
1990년 한 재일코리안이 일본에 있는 조선문화재박물관과 강제동원 희생자의 위령탑을 세우라고 신문에 기고를 했다. 혐한의 분위기가 일본을 휩쓸고 있던 그때, 도쿄의 여성 3인이 모여 ‘고려박물관을 만드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인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 강연회, 학습회 등을 거쳐 10여년간 준비를 했다.
한국식품회사를 운영하는 성공한 재일한국인이 신오쿠보에 있는 건물 한 실을 내주어, 2001년 드디어 문을 열었다.
일본과 코리아(한국, 조선) 간의 유구한 교류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식민지 지배의 죄를 반성하며,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며 재일 코리안(한국인, 조선인)의 생활과 권리의 확립을 위해, 차별없는 공생사회의 실현을 지향한다.
이것이 고려박물관의 설립목적이다. 하라다 선생은 2012년부터 5년간 이사장직을 맡아 박물관을 책임지고 이끌어갔다. 지금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일본 내에 이렇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
고려박물관의 위치가 재일코리안의 동네이기 때문에 극우들의 헤이트스피치(Hatespeach)의 표적이 되는 등 위험한 상황도 종종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정의 실현에 용감한 사람들이다.
5. 맺으며
언젠가 하라다 선생이 근대조선의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물었다. 젊은 부인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짧은 저고리를 입어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참 민망한 모습이었다. 여성의 복식에 관한 건가 했는데, 뜻밖의 질문을 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아들을 낳은 부인들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드러냈다던데 알고 계시나요?”
헉!! 순간 깜놀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아주 어렸을 적 그런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아서라기보다는 옷을 갖춰입지 못해서였다고 생각되어, 아들 운운은 들어본 적 없으며 일반적인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정말 어쩌면 한국에 대해 나보다 아는 게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라다 선생의 일생을 보니, 그 삶의 태도가 시종일관 진실하다. 작은 일에도 충성을 다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꽃동네에서 같이 일하는 이모의 권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나서 ‘저런 황당무계한 일본의 미신이야기로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구나’ 한탄했다는 글에서 선생의 진지한 신앙도 볼 수 있었다.(나는 그저 재미있다고만 느꼈으니... 참 부끄럽다.)
하라다 선생은 1941년생이시니 벌써 82세이시다. 그러나 지금도 고려박물관, 이마이관 등에서 봉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사시는 하라다 선생에게 고마운 마음 가득하다. 나도 분발해야겠다.
ps. 고려박물관에서는 한복을 기증받아 30벌 정도를 갖춰두고, 한복체험코너를 운영한다고 한다. 최근 한류붐 덕분에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 한복체험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박물관 관계자들이 매우 기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쁜 한복들을 집에 쌓아두고만 있지 않나? 이런 걸 보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노리개나 머리장식, 댕기 이런 거라도 말이다. 혹시 마음이 있으신 분 댓글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이웃사랑을 실천하신 하라다쿄코 선생님에게 존경과 지지하는 마음을 보냅니다. 복례님의 번역(독후감)덕분에 그분의 삶을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려박물관에는 길광웅선생님이 생전에 한일청년교류회에서 일본방문시 한복을 기증하시고 직접 입는 방법을 시현하신적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한국고유 물품을 기증할 수 있다면 참 좋을것 같습니다.
거룩한 삶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