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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글나라 동화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凡草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집
김재원
- 우르르쾅! 콰쾅!
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졌다. 학원 숙제를 하다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번개가 치면서 불이 번쩍거렸다.
혼자 있으니 겁이 났다.
텔레비전에서는 태풍 소식을 계속 전하고 있었다.
“역사상 최대로 강한 태풍이 모레 오전에 불어올 전망입니다. 외출을 삼가하고 철저하게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올가을 들어 벌써 세 번째 올라오는 태풍이다. 하필 내 생일잔치를 하는 토요일에 태풍이 불어온다니
짜증이 났다.
‘에이씨, 별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떤담?’
얼마 전에도 역대급 태풍이라고 떠들더니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큰 피해가 예상된다고 해서
아빠 엄마는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칠 정도였는데 말이다.
곧 엄마가 돌아오고 아빠도 퇴근했다.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할아버지 걱정을 했다.
“연우야, 큰비만 보면 겁난다. 계곡물이 불어나면 위험한데 왜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그까짓 시골집이 뭐가 그리 좋다고…….”
아빠가 씻고 나오면서 엄마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요. 저번에 촌집을 사겠다고 임자가 나타났을 때 팔고 도시로 왔으면 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다음날에도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학교에 가자 선생님이 태풍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왜 이렇게 태풍이 자주 올라오는지 그 이유를 누가 말해보세요.”
선생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민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지구의 기후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서 바닷물이 늘어나면 증발하는 수증기 양도
많아지고요. 공장과 도시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늘어나서 기온이 점점 올라가는 것도
태풍이 심해지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대민이가 말하는 동안 선생님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말했어요. 대민이가 기후 위기에 대해 잘 알고 있네요. 그럼 기후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민이가 또 손을 들었지만 선생님은 경미에게 기회를 주었다.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일회용품 적게 쓰기, 전기 아껴 쓰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입니다.”
“잘 말했어요. 그 밖에도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자원 재활용하기, 차 대신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 타기,
냉난방기 적정 온도 유지하기 등을 실천하면 좋겠지요. 꼭 실천 하기 바랍니다!”
쉬는 시간에 생일 초대 카드를 돌렸다. 태풍이 부는데도 아이들이 오겠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내가 제일 기다리는 아이는 경미였다. 경미는 초대장을 받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연우야 어떡하지? 토요일 12시 30분이면 안 되겠네. 11시에 대민이와 아이돌 콘서트를 보러
가기로 했거든. 갔다 오면 1시도 넘을 거야.”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기분이 언짢아서 홱 돌아서 버렸다.
‘흥, 뭐든지 대민이 중심으로 돌아가는군. 그래 잘해 봐라.’
나는 애꿎은 의자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
경미는 4월 말에 전학을 왔다. 노래를 잘하고 예쁜데다 공부까지 잘해서 단박에 주목을 받았다.
나도 첫눈에 반했다. 이상하게 경미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경미하고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기회가 없었다. 숫기가 없어서 먼저 말을 걸지는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훔쳐보기만 했다.
그런 나에 비해 대민이는 인형을 주기도 하고 개그맨 흉내를 내며 관심을 끌었다. 대민이는 성적이 좋고
축구까지 잘해서 나하고는 완전히 비교가 된다. 대민이가 몹시 부러웠지만 경미에게 한마디 말조차
못 건네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그러다가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이 방학 계획을 발표해 보라고 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정승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서 물고기도 잡고 물놀이를 할 거라고 말했다.
대민이는 누나와 아이돌 콘서트에 간다고 했고, 어떤 아이는 바닷가에서 열리는 캠프에 간다고 했다.
그날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뜻밖에도 경미가 나한테 다가왔다.
“너희 할아버지 댁 옆에 계곡이 있니? 좋겠다. 어디쯤이야?”
“뭐, 조, 좋겠다고? 촌구석이 뭐가 좋니?”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내 얼굴이 약간 벌게지면서 말을 더듬었다.
“난 시골에 친척 있는 아이들이 제일 부럽더라. 방학 때는 자연 속에서 지내는 게 멋있잖아. 거기가 어딘데? ”
“어, 수영하기에 딱이지. 거, 거기가 어디냐면……. 음, 밀양 정승골이야.”
“이름이 특이하네. 옛날에 정승이 살았냐?”
“마, 맞아. 우리 할아버지 조상이 정승이랬어. 할아버지는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그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대.”
“우리 엄마한테 말해서 거기 놀러 가야겠다.”
난 경미가 그냥 해본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방학이 되자 경미네 가족이 진짜 정승골에 놀러왔다.
난 어릴 때는 정승골에 가는 것이 좋았다. 곤충을 잡을 수 있는데다 물놀이를 하면 신이 났다.
하지만 크면서부터 슬슬 정승골이 싫어졌다. 그 이유는 할아버지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어릴 때부터 데리고 다녔다. 한 번은 마을 뒤에 있는
정각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너무 힘들어서 다리에 쥐가 났다.
그 뒤부터는 ‘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겁이 났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나만 보면 산에 가자고 했다. 나는 슬슬 할아버지를 피하기 시작했다.
여름방학 때도 안 가고 싶었는데 경미가 놀러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갔다.
내가 할아버지한테 미리 말씀드려 놓았더니 뒷방을 깨끗하게 치워 놓았다.
경미 아빠는 할아버지 집을 둘러보더니 엄지척을 했다.
“와, 기와집이 펜션처럼 멋있네요. 정승이 살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짐 정리를 마친 뒤에 경미와 계곡에서 만났다. 경미는 수영복에 튜브까지 들고 있었다.
“야, 여기 진짜 좋다! 오길 잘했네!”
나는 여태까지 정승골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경미 말에 마음이 확 달라졌다. 여름에 물놀이하기에는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 같았다. 경미 아빠 엄마도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칭찬을 했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네. 참 멋진 계곡이다. 연우야, 고맙다!”
나는 칭찬을 들으니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언제 왔는지 할아버지가 바지를 걷고 물속으로 들어왔다.
“우리 연우 여자 친구냐? 참 이쁘게 생겼네. 여기 좋지? 우리 조상이 살던 곳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또 어떤 말을 할지 몰라 얼른 입을 막았다.
“여자 친구 아냐. 아니라고. 할아버지는 저리 가.”
“안녕하세요? 참 좋은 곳에 사시네요.”
경미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할아버지는 또 산을 들먹거렸다.
“물놀이하다가 싫증 나면 뒷산에 한 번 올라가 볼래? 경치가 좋은데…….”
나는 경미가 고생할까 봐 할아버지 등을 떠밀었다.
“도시 애들은 산 안 좋아해. 할아버지나 많이 올라가.”
그 순간, 경미가 뜻밖에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반가워하며 산에 갈 채비를 했다.
경미는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섰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몇 번이나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나도 할 수 없이 따라나섰는데 역시 산은 힘들었다. 산 정상까지 간신히 올라갔다가 파김치가 되어 내려왔다.
나와는 달리 경미는 헐떡거리면서도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거봐. 힘들잖아. 만만한 산이 아니라고.”
“그래도 좋았어. 새로운 산을 하나 올랐잖아. 피구 시합에서 이긴 것만큼이라 기쁘네.”
경미네가 2박3일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정승골 덕분에 경미와 가까워져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2학기가 시작되자 경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하고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틈만 나면 대민이
옆에 가서 시시덕거려서 괜히 언짢았다.
대민이는 아이돌 콘서트에 다녀온 뒤로는 쉬는 시간마다 가수 흉내를 내었다.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노래하기도 했고, 빗자루를 전자기타처럼 치며 교실을 누볐다. 경미를 비롯한 여학생들은 손뼉을 치며
열광하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아파트 옆을 지나고 있는 하천물이 불어나서
다리 위까지 찰랑거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자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엄마는 텔레비전 뉴스를 지켜보면서 할아버지 걱정을
또 하기 시작했다.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야 할 텐데. 혹시라도 피해가 있으면 어떡하지?”
아빠도 사뭇 긴장한 표정이었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요? 잘 지나가도록 빌어봅시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심상찮아요.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네요. 기후 변화로 해가 갈수록 태풍이
늘어나고 폭우가 심해지잖아요.”
“이번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어떻게든 설득해봅시다.”
콸콸콸! 하천물이 넘쳐서 아파트 마당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관리실에서 안내 방송을 했다.
“지하 주차장에 물이 가득 찼으니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지하 주차장에 출입을 금지합니다.
다시 한번 알리겠습니다 …….”
아침이 되자 태풍의 기세가 점점 세졌다. 아파트 창문이 흔들거리고 가로등이 기울어졌다.
이러다가 아파트가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엄마, 오늘 생일잔치 할 수 있겠어?”
내가 걱정하자 엄마가 눈을 흘기며 타박했다.
“넌 생일잔치밖에 모르냐? 지금 할아버지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인데, 에구 철없는 녀석!”
그제야 할아버지 집이 떠올랐다. 아파트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거기는 잘못하면 날아갈지도 모른다.
계곡 옆에 지었기 때문에 폭우가 오면 잠길 수도 있을 거고. 나도 모르게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할아버지 집이 제발 무사하게 해주세요. 할아버지만 무사하게 해주면 기후 위기를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할아버지가 산에 가자고 하면 언제든지 따라갈 거고요.”
오전 11시가 되자 태풍이 지나가는지 폭우가 쏟아지면서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바람이었다. 엄마는 가게로 나가면서 절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생일잔치는 꼭 할 수 있게 해주시고, 아이돌 콘서트는 제발 취소되게 해주세요.’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12시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잠잠해졌다. 시커멓던 하늘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파랗게 맑아졌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생일잔치를 치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예약해 둔 피자집으로 갔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12시 30분이 되자 대민이와
경미 빼놓고는 다 왔다. 생일잔치를 막 시작하려는 참인데 문이 활짝 열리며 경미가 뛰어 들어왔다.
대민이도 뒤를 이었다.
내가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고 있으니 경미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콘서트가 태풍 때문에 취소되었어.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뛰어왔어. 어때, 잘했지?”
경미가 와서 기분이 좋긴 했지만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좋지만 콘서트를 애타게 기다렸던
사람들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태풍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꽤 많을 텐데…….
생일잔치를 끝내고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연우야, 흐흑흑! 이 일을 어떡하니? 어흐…….”
엄마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 할아버지 집이 어떻게 되었어?”
“그래. 홍수로 집이 다 떠내려가고 할아버지는 병원에 실려갔대. 으흐흐!”
친구들과 헤어진 뒤에 허겁지겁 아빠 차를 타고 정승골로 달려갔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발을 다쳐서 깁스를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집이 떠내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다쳤단다. 이장님이 구조대를 부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를 보더니 억지로 일어났다.
“연우야,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했지? 조상님 혼이 남아 있는 집을 지키려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폭우가 점점 더 심해지니 이제는 나도 도시로 가야겠다.”
할아버지가 없는 정승골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얼른 나아서 나하고 산에 가. 경미도 부를게.”
“그래. 그러자. 너 경미 좋아하지?”
할아버지가 살짝 윙크를 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집이 사라지고
없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정승골 계곡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처럼. (*)
1986년 경향신문 동화 당선 (하느님 우산은 누가 고칠까?)
계몽사 아동문학상 동화 당선, 이주홍 문학상 수상
동화집 <천개줄 아저씨>, <도깨비 할매의 꽃물 편지>, <똥쟁이, 너도 진돗개니?>
글나라 동화창작교실 운영 ( cafe.daum.net/qwer3 글나라 )
첫댓글 3대 이야기와
아이들간의 우정이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졸작이라 부끄럽습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작품으로 문학도시 작품상 받았으니
여러분도 문인협회에 가입하여 작품도 싣고 자신의 실력을 펼쳐보기 바랍니다!
'생일 잔치는 꼭 하게 해주시고 아이돌 콘서트는 제발 취소되게 해주세요.'
연우의 간절한 기도에 피식 웃습니다.
한 편의 이야기속에 생각할 게 많습니다.
환경, 우정, 할아버지와 엄마아빠의 다른 가치관 등.
다시 한 번 작품상 수상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