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세종대왕 당시 문무를 겸전한 경북 울진 출신의 관료가 있었다. 그는 영양 남씨로 제주목사를 지내 '목사공'이라고 불렸는데, 이름은 회요 호는
정일재(精一齋)라고 했다.
필자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문헌 상으로 조선 초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독도(獨島)
를 거명했다는 점과, 둘째는 울진 원남면 금매리에 터를 잡은 이후 현 종손까지 20대 이상을 한곳에 정착하고 있다는 문중의 역사성 때문이다.
정일재 남회의 19대 종손인 남두열(南斗烈, 1935년생) 씨는 현재 경기도 안양시에 살고 있다. 울진 입향조는 남회의 부친인 득공(得恭, 단천군수를 지냄)이다. 그는 경주에서 울진의 소로리로 옮겨와 울진 영양 남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남회는 부친을 따라 울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정일재 자손들은 목사공에 대한 자긍심이 남다르다. 타성이나 객지 사람으로서는 그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입향한 이래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쭉 내려왔어요. 제 6대조 때 단 한 번 조카 양자를 한 것이 전부입니다." 종손의 말은 안동 지방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사례다. 입향조 이래로 종손까지 20대, 그리고 종손의 대학생 손자까지 22대에 걸친 유구한 시간 동안 터전을 떠나지 않고 반가의 명예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명문가에서 이루어졌던 잦은 양자와 그로 인해 파생되었던 불협화음이 집안의 문헌이나 종중 재산을 없애고 향중에서 명예를 실추시킨 예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그래서 종자종손으로 면면히 이어온 가문의 역사는 대단히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22대나 내려온 명문 영양 남씨 종손을 만나 우선 가문의 자랑거리부터 듣고 싶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슬픈 문중사를 먼저 말한다. 현 종손의 조부와 부친에 관련된 원통한 얘기다.
종손의 조부인 남계원(南啓源, 1894-1972)은 명문가의 종손으로 한학에 정통했지만 항일독립정신이 투철했던 애국선열이었다.
남계원은 3.1만세운동을 듣고 4월 11일 향리의 여러 유생들을 규합해 매화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 관헌들이 조부를 체포하기 위해 종가로 왔으나 마침 조부의 상중이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때 함께 의거한 이들은 대부분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으나 조부만은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훈에서 제외되었다.
종손의 부친
남정규(南精奎, 1916-1953)는 한국전쟁 중에 좌익으로 물려 비명횡사했다. 종손의 부친은 영민한 자질을 타고나 소학교를 졸업한 뒤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 신학을 접하고 일본으로 가서 묘목을 구해 영동 지방에서 묘목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에 비분강개하며 항일투쟁 전선에 몸을 던졌다. 준향계(準香契)와 창유계(暢幽契. 일명 黑頭巾 사건)를 결성해 일제에 투쟁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까지 치렀다. 2년 5개월간의 혹독한 감옥생활 끝에 광복과 함께 출옥했지만 8년 뒤 억울하게 숨졌다.
창유계원은 모두 22명으로, 1982년 집단항일운동의 공적이 뒤늦게 인정되어 19명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선친이 제외되는 아픔을 겪었다. 7개 마을에 산거한 이들은 의거 당시 16명이 옥사했고 남은 이들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이 살다 한 많은 삶을 마쳤다. 그런데 월북했거나 행방이 묘연한 2명과 종손의 선친만 사상적인 이유를 내세워 유공자에서 제외한 것이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지만 유공자 지정제도의 허점으로 말미암아 조부와 부친이 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종손에게는 두고두고 풀어야 할 깊은 한으로 남아 있다.
자식을 잃자 조부는 비탄에 빠졌고, 삭발을 한 채 평생 바깥출입을 삼갔다. 이제 남은 이는 조손(祖孫)이었다.
조부에게는 아들의 불행이 가슴에 맺혀 천금 같은 손자의 성취보다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을 최우선시했다. 많이 배운다거나 대처로 나가 유학하는 것을 몸으로 막았다. 치열하게 양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남은 건 손자가 공무원조차 될 수 없는 사회적 편견과 제도적 장애물뿐이라, 그 전철을 밟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울진 종가, 명당으로 유명
|
▲ 종손 남두열 씨 | |
종손은 성품이 낙천적이며 굳건하다는 인상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파란만장한 문중의 질곡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종손이 우거하고 있는 안양시 안양체육관 근처의 집은 이사온 지 한 달 정도 됐는데, 아들 직장을 따라 옮겨온 것이라 한다.
울진 금매리(金梅里)에 있는 종가는 20대 이상을 내려온 터전이라는 것 이외에도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수백평의 널찍한 터에 자리잡은 당당한 입구자의 와가는 근자에까지 대학 학술조사단에 의해 '울진지방의 다섯 가지 유형'의 대표적 형태의 집으로 소개됐다.
그러나 종가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지금은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다. 종가 뒤편에는 웅장한 형태의 정자가 있고 그 뒤로는 그윽한 대숲이 남아 있다. 문헌에 의하면 종가 앞에는 오래된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이 집과 관련된 역사 기록이 있는데, 점필재
김종직과 얽힌 이야기다.
점필재가 강원도 관찰사의 소임을 받아 이곳을 순찰하다가 평소 훌륭한 인품과 청렴하다는 평이 있던 정일재 남회를 찾았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그 집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제택(第宅) 갑어일읍(甲於一邑).' 집이 고을에서 최고라는 말이다. 들리는 말과 모순되는 모습에 점필재는 아연실색했다.
아전에게 물으니 "본래부터 이 집은 형편이 좋아서 그런 것이며, 벼슬을 하면서는 하나도 늘린 것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후 점필재는 자신이 크게 오해한 것을 자책하며 정일재를 만났다고 한다.
정일재는 지방 수령으로 다섯 고을을 살았지만 가는 곳마다 청렴함으로 이름났다. 그의 청렴함은 몸에 밴 것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증산현감을 마치고 돌아올 때의 일화 한토막.
'행탁이 소연(蕭然)하여 지유초리일쌍이이(自有草履一雙而已)니라 (이삿짐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짚신 한 켤레가 있을 뿐이었다).'
청백도 이쯤 되면 타고난 경지라는 생각이다. 다른 기록을 보면 여기에 하나가 더 보태져 있다. 수석 한 점이다. 이 기록은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를 그만두고 죽령을 넘으면서 단지 서책과 수석 한 점을 이삿짐으로 가져간 모습과 흡사하다.
종손은 매화리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이후 조부의 소망대로 한학을 수학했다. 이는 650여 년을 면면히 이어온 가문의 학문을 계승한 셈인데, 당시 어린 종손은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조부의 불행했던 삶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조부의 바람과는 달리 작은아버지가 자리를 잡고 있던 서울을 동경했다.
'공부 많이 하면 손이 끊어진다'는 생각이 확고했던 조부를 떠나 서울로 온 종손은 공군 제대 후 건설부에 들어가 기재과에 근무했다. 그러나 학벌도 없고 또 그 일이 체질에도 맞지 않아 그만두고 사회로 나와 타고난 친화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20세기'라는 회사를 설립, 번창시켜 종가 중건의 꿈도 가졌다.
"제가요 구상을 크게 했니더. 일본으로 가 노무라증권과 후지하건설을 방문해 한국의 각 도마다 대형 백화점을 만들라고 그랬어요. 전문가를 초청해 서울 반도호텔에 몇 달씩 묵게 하면서 같이 일도 했죠." "광화문에 본사가 있었는데 건설일 참 많이 했고 돈도 많이 벌었디랬니더. 돈 겁을 안 냈어요. 박스컵 당시 로열박스도 제가 공사한 것이예요."
그러나 사업으로 성공했던 종손은 무리한 확장경영과 여건 변화로 1983년에 부도를 냈다. 재기를 위해 종합건설회사를 다시 만들어 절치부심했으나 모두 여의치 못했다. 건설 분야에 35년간 종사해온 종손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다.
종손의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조부 밑에서 자랐던 종손은 10대 후반에 허락없이 집 주변의 대나무 두 트럭분을 팔아 그 돈을 들고 서울로 갔다. 얼마 후 돈을 다 쓴 뒤 돌아와 조부로부터 혹독한 꾸중을 들었다. 당시 대나무는 비싸서 판매대금은 상당액이었다. 전통 가문에서는 사소한 일이라도 어른들의 명을 기다려 행동에 옮기는 것이 규율이었다. 그런데 그는 큰일을 '저지른' 것이다. 종손에게는 '녹록함' 보다는 '거스르는(逆水) 기질'이 잠재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살아가는 형편을 보면 사업에 크게 성공한 적이 있다는 말이 얼른 믿기지 않는다. "제가요, 은행 공사를 도맡아서 했어요. 어렵던 시절에 이미 돈을 크게 벌어 그래도 자가용을 20년간 탔니더. 주접을 떤 게지요. 그리고 종가를 재건하려고 남겨둔 돈으로 강릉에 '경포회관'을 지었는데, 개업식을 할 때 가수를 부를 정도로 대단했니더. 광고도 크게 했지요." 이 사업도 결국은 여의치 못해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고향을 오가며 소일삼아 경영해서 얻은 이익금으로 종가를 유지하고자 한 종손의 소박한 계획마저 물거품이 된 것이다.
"1년에 고향을 열다섯 번 이상씩 다녀왔니더"라는 말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다. 노모가 살아계셨고, 종손이며, 600년 터전이 있다고 하지만 당시 울진은 비포장도로라 서울에서 지극 정성으로 들락날락할 형편이 못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고향이 있을 것이고, 노모도, 자신이 태어났던 옛집이 남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종손이 그 먼 고향을 1년에 몇 번씩 다녀갔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종손의 종가 수호에 대한 향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것 같다.
종부는 평해 황씨, 차종손은
남상균(南相均, 52세) 씨, 맏손자는 남기용(南起鏞, 25세) 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