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177 (5권 4. 김홍신. 펌글)
뉴오타이 호텔 지하 화식집에서 저녁 식사를 끝내자 이시하라 일행은 돌아갔다.
병규와 미사코가 끝까지 시중을 들기 위해 호텔에 남기로 했다.
내가 머무는 방 바로 옆방에 병규가 머물기로 했고, 미사코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미사코는 감사합니다와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정도의 서툰 한국 말만 할 줄 알았다.
답답한 게 있으면 옆방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나는 영어가 어두운 녀석이었지만 미사코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건 오기였다.
만약 미사코가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대답하면 내 무식함이 탄로날 판이었다.
일본 애들의 영어 실력이 짧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이 나서 물은 것이었다.
하긴 내가 제법 큰 소리로 할 수 있는 얘기는 캔 낫 스피크 잉글리시 정도였다.
길거리에서 코 큰 녀석들이 영어로 쏴라쏴라 거리면 나는 캔 낫 스피크 잉글리시를 제 발음으로 해대고 벼락 맞을 자식아,
한국 말로 물어라 하는 정도의 욕지거리나 하고 돌아서는 게 고작이었다.
"노."
미사코가 고개를 저으며 생긋 웃었다.
나는 옆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 기집애 영어도 못한단다. 얘기 나눌 방법 없냐?"
"내가 해 드릴까요?"
"이 자식아, 발가벗고 자는데 네가 앞에서 통역하고 있을 거냐?"
"그거야...."
"한자(漢字)로 적당히 넘어갈 수 없느냐고 물어봐라."
병규가 미사코가 한동안 통화를 하더니 내게 전화기를 넘겨 주었다.
"한자도 안 된답니다."
"빌어먹을. 여긴 무식해도 탤런트나 배우질 해먹는 나라냐?"
"그렇죠 머. 형님, 주무실 건데 적당히 넘기죠, 머. 만국공통어 있잖아요."
"썅, 옷 벗기는 게 만국공통어냐? 외국 갔다오면 태극기 꽂고 왔다고,
시시덕거리는 새끼들 보면 밸이 뒤틀리더니 내가 그 꼴이 되나보다."
"형님, 살살 다뤄 주십쇼. 귀한 애니까."
"임마, 진짜 애를 구워먹든 삶아먹든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냐. 유명한 탤런트라면서."
"이건 보통 대접이 아닙니다, 형님."
"알았다, 자거라. 해보다 안 되면 널 밤새 들볶는 수밖에 없겠지."
"재미 많이 보세요."
"보마. 악착같이."
나는 일본 여자만 보면 해치우고 싶었다.
우리 나라 여자들이 그동안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닥치는 대로 해치우고 싶었다.
더구나 정신대로 끌려간 우리 처녀들의 수기를 읽으면 피가 거꾸로 튀곤 했다.
그 참혹한 광경이 내 뇌리에서 씻겨 나갈 수 있을까?
"샤와?"
낮에처럼 미사코는 생글거리며 물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허벅지는 반쯤 나와 있는 차림이었다.
무릎을 꿇고 차를 따르거나 담뱃불을 붙여 줄 때면 알맞게 살이 오른 가슴이나 허벅지를 순간순간 훔쳐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자."
내가 일어섰다.
미사코가 무릎을 꿇고 내가 벗어주는 옷을 단정하게 옷걸이에 걸거나 개어놓았다.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더니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추어 놓고 나왔다.
작은 가방에서 화장품 세트 같은 것을 꺼내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힘없이 나신이 되었다.
가벼운 차림이어서 그런 건지, 옷 벗는 일에 익숙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낮에 느꼈던 몸이 아니었다.
일본의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젖가슴을 그대로 내놓는 정도는 허용하기 때문에,
몸매에 자신이 없으면 탤런트나 배우 되기가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 예쁘다."
미사코는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그냥 그래 보는 건지, 내 몸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가볍게 미사코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생각 같아서는 무자비하게 다루고 싶은 감정이 앞섰지만,
미사코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고 그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엔 원죄라는 게 있어서 태초에 조상이 지은 죄를 후손 모두가 짊어져야 하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나는 미사코의 사랑스런 교태와 생글거리는 웃음과 더할 수 없는 희생정신 때문에 원죄라는 걸 생각했다.
'하나님. 도대체 어찌된 겁니까.
미사코도 하나님 논법대로라면 우리 민족에게 원죄가 있는 여자겠죠?
그렇다면 가엾은 우리 나라 여인들의 수난사를 내가 복수극으로 치장해야 할까요?
귀엽고 예쁜 꼬마라면 적대국과 전쟁중이라도 구해 주고,
사랑스러워 해 주는 게 정상이 아닙니까?
하나님. 난 결코 하나님처럼 소갈머리가 좁아터지긴 싫습니다.
일본이 싫고 미운 건 내 감정으로 도저히 고칠 재간이 없습니다만,
사람 같은 사람이 일본에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사람 같은 사람까지 미워해 버리라곤 않겠죠.
하나님. 까놓고 말해서 한국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는 민족이었습니다.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미워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전세계를 미워해도 그만입니다.
미국 아니라 미국 할애비라도 미워해야 할 백성이지만,
한국은 언제나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이 알량한 미사코란 계집애 하나 때문에,
내 맘이 흔들렸다고 비웃을지 몰라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생존하는 동물입니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어쨌거나 난 이 계집애를 해치울 겁니다.
낄낄대지 마십쇼.'
특수한 향료로 몸을 마사지해 준 미사코가 젖가슴으로 내 전신을 부드럽게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가끔 한마디씩 일본 말로 물어 보았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케"
고작 미사코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이런식으로 좋으냐고 물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서로 알아듣거나 말할 재주가 없으면서,
손짓과 표정과 웃음과 엉터리 영어 한두 마디로 의사가 통용된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발가벗고 노닥거리면 금방 상대방의 표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진한 힘을 지녔는지 모른다.
향료를 씻어낸 미사코가 수건 한 장으로 나를 감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목욕탕에 들어가 샤워기로 머리를 감겨 주던 그녀의 서비스 정신이 새삼 예뻐보였다.
물기를 닦아내고 머릿결을 다듬기 시작했다.
머리 말리는 기계까지 준비한 걸 보면 꽤 치밀한 데가 있는 계집애 같았다.
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길게 누웠다.
침대에 눕자마자 미사코가 가슴에 안겼다.
따스했다. 향내가 은은하게 풍겨나왔다.
팽팽하게 긴장된 육체였다.
말이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오래 사귄 사람들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육체는 언어보다 분명히 앞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드라울 수 있을까.
미사코는 다듬어진 몸매였다.
선천적으로 보드라운 살결을 타고 났는지 모르지만 정성스럽게 가꾼 걸 느낄 수 있었다.
"너 처녀냐?"
나는 너무 간지러워하는 미사코에게 이렇게 물었다.
눈을 동그렇게 뜬 채 웃기만 했다.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표정과 웃음과 육체의 동작으로 충분한 대화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일본 년인데도 어째서 밉지 않은지 모르겠다.
내 감정 같아서는 일본 제일의 미녀라는 사실만 가지고도 무자비하게 다루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건 감정뿐이었다.
나는 미사코를 차라리 곱게 다루고 있었다.
미사코는 능숙한 여인이 아니었다.
서툴고 수줍은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보송보송한 땀방울이 그랬고 쉽게 습해지는 그녀의 깊은 곳이 그랬다.
가빠지는 호흡을 주체하지 못하고 매달려 응석부리듯 하는 것이 그랬다.
일본 여인들의 밤의 소리는 확실히 신비했다.
굴러다니는 카세트 테이프의 일본 계집 숨 넘어가는 소리는 간드러지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인데,
미사코의 숨소리도 다를 게 없었다.
한바탕 폭풍이 휘젓고 간 자리엔 땀과 수액과 목마른 갈증 같은 것들만이 남아 있었다.
미사코는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씻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미사코는 웃고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어 병규 녀석을 불렀다.
잠기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다.
"임마, 이 여자더러 행복하냐고 좀 물어봐라."
"형님두."
병규 녀석은 미사코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내게 전화를 바꾸었다.
"뭐라냐?"
"진짜 행복하답니다. 아주 좋대요."
"이 자식아, 꾸며대지 말고 말한 그대로 해 봐."
"형님, 내가 이렇게 물었어요. 형님이 이렇게 좋은 여자 처음 만났다면서 어땠느냐고, 행복하냐고 묻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미사코가 너무나 행복한 밤이었다고 전해 달라잖아요."
"속여도 내가 알것냐?"
"형님, 나도 좀 잡시다. 나도 젊은데 형님이 생각 좀 해 줘야죠."
"임마, 빌려 줄 순 없잖아."
"누구 죽이려고 이래요. 몸 생각해서 쬐끔만 사랑하고 푹 좀 주무세요."
"알았다. 자라."
전화를 끊고 나자 미사코는 대형수건을 들고 무릎 꿇은 채 욕실 바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물을 바닥에 흠씬 뿌려 바닥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미사코는 수건을 깔고 나를 눕게 했다.
들고 들어온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 아까처럼 향료 내음 짙은 비누거품을 내어 내 몸을 닦기 시작했다.
수증기 가득 찬 욕실에서 보는 미사코의 몸은 아름답고 더 탄력이 있어 보였다.
건들 때마다 습해지는 풋내기였지만 최선을 다하려는 육체의 몸부림으로,
한 사내를 기쁘게 하려는 여인의 열정은 쉽게 잊혀질 일이 아니었다.
미사코는 찬찬했다.
몸의 구석구석까지 놓치지 않고 향내를 담으려 했고 어느 한구석이라도 혀 끝을 대지 않고는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 열정이었다.
나는 미사코의 가슴을 잡고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일본 년이겠지만 밉지 않은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아니 어쩌면 이 계집애의 미운 면을 찾아보려고 분석해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오케?"
미사코가 할 수 있는 영어 가운데 비교적 발음이 정확한 이 낱말.
혓바닥으로 나를 간지럽히며 묻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이시하라 일당의 철저하게 계산된 음모라도 좋았다.
나를 기진맥진하게 하여 쓰러뜨릴 공작이라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샤워기의 물은 계속 바닥으로 흘러 욕실을 온통 수증기로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어떤 놈일까?
어떻게 만들어진 녀석이며 어떻게 되려는 사내일까?
척박한 시대에 태어나 사람다운 짓보다는 정글의 야수처럼 살아가는 내 몸 속엔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하나님. 장총찬이가 일본 땅에 왔습니다.
여유 있는 자식들처럼 여행하다가 계집애 배 위에 깃발을 꽂는 식의 여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본이란 나라를 얼마나 봐 주고 있는지 좀 보려고 왔습니다.
내 나라 한국 땅에서 속아서 팔려온 숱한 여인들의 수난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그렇게 못 살게 구는 자식들 모가지를 풍뎅이 비틀어 놓듯 하고 돌아갈 참입니다.
하나님. 제발 이번만은 내 편 좀 드십쇼.
하늘엔 역사책도 없소?
두렵지도 않단 말입니까?
땅의 역사를 보면 하늘의 역사도 빤하긴 할 겁니다만,
정신 차려서 하늘의 역사책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십쇼.
하늘엔 판검사도 없소?
혼자 해먹으려면 그런 게 뭐가 필요하겠소만,
그래도 엉터리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습니다.
아무튼 하나님. 올해는 우리 다같이 정신 차리는 해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