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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개요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도면상으로 정복한 후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그들에게 분배된 땅에 자리를 잡고 있던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는 정복전쟁을 계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각 지파들은 그 정복전쟁을 잘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외부적으로는 정복전쟁을 수행하기를 포기함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교회가 깊은 타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지도자들이 타락을 부채질합니다.
사사시대는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누가 주도권을 행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지금까지는 요셉 지파가 주도권을 행사해 왔습니다. 왕권의 도래를 위해서는 주도권이 유다에게로 넘어가야 됩니다(창 49:10).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타락하게 된 것은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삿 17:6, 21:25). 에브라임 지파는 스스로 지도자 지파라고 거들먹거렸지만 전쟁의 날에 물러갔기에(시 78:9-11)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유다를 내세우십니다. 따라서 사사시대는 유다 지파가 지도권을 확보해 다윗시대의 도래를 준비하는 시대입니다.
구조를 보면 두 가지 서론(1:1-2:5과 2:6-3:4)과 여러 사사들의 행적에 대한 본론(3:5-16:31)과 각각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두 가지 결론적인 이야기들(17-18장과 19-21장)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사기 1장
여호수아가 뚜렷한 지도자를 세우지 않고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절). 지금까지는 요셉지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정복전쟁에서 유다지파가 전면에 나섭니다. 유다는 같은 어머니의 자녀인 시므온, 유다지파 내에서 땅을 분배받은 시므온과 힘을 합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쳐 죽입니다. 유다는 아도니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립니다. 그가 70명의 왕들에게 행한 그대로 갚아 주었습니다(4-7절). 예루살렘과 헤브론도 점령했습니다(8-10절).
유다 지파였던 갈렙의 역사를 다시 한번 더 소개합니다. 한편, 늙은 갈렙을 이어 새로운 세대였던 그의 조카 옷니엘의 활약상도 그리고 있습니다(11-15절). 모세의 장인이 속한 겐 사람들도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정착합니다(16절). 유다는 시므온과 함께 블레셋지역을 공략했는데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 거민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유다지파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던 베냐민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여부스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21절). 요셉지파가 벧엘을 치러 갔는데 여리고성의 경우처럼 정탐꾼들이 그 성에서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칼날로 그 성을 점령했습니다(22-26절). 그런데 도움을 준 그 사람의 여리고성의 라합처럼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절).
이제부터는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기들의 할당받은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므낫세(27-28절), 에브라임(29절), 스불론(30절) 지파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이 눌러앉아 버립니다. 아셀(31-32절). 납달리(33절) 지파의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이들 지파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습니다”( 절).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고 이스라엘 자손은 빌붙어서 지내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이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단 지파가 살 곳을 정해주는 데까지 이릅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였으며”( 절). 급기야 단 지파는 자기들이 분배받은 땅에서조차 쫓겨나 남의 땅을 기웃거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삿 18장).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공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과감히 믿음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합니다.
기도문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제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저희에게 약속해 주신 것을 무시하고 저희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규정하려고 합니다. 저희는 겁을 집어먹고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고 세상이 저희를 규정하는 것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저희는 세상이 결코 규정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저희가 '세상이 나를 규정할 수 없다'고 외치며 살게 하옵서. 세상에서 가장 작고 힘없는 자로 살더라도 하나님이 저희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2장
정복전쟁시 이스라엘의 본진이 머물렀던 길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올라와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선언합니다(1-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쫓아내기를 싫어하였던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정치적으로 공존하였던 가나안 족속들이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종교적으로 공존하였던 그들의 신들이 올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절). 길갈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할례를 시행함으로 새롭게 한 언약을 돌아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저주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울고 그 곳을 보김(우는 자들)이라고 이름짓습니다. 이 울음은 회개의 울음이라기보다는 한탄과 탄식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을까요? 여호수아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여호수아가 죽자 그들의 마음이 돌아섭니다. 여호수아와 정복전쟁 제1세대가 다 죽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절). 한 세대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주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여행을 끝내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농경사회를 이루어야 했기 때문에 농사의 풍요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보김에서 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파십니다. 다급해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슬피 부르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사지도자인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출해 주십니다. 그러나 구출받은 후에는 이스라엘이 다시 더 큰 죄악에 빠져 들어갑니다. 이런 죄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에서의 정착과 적응에만 관심을 기울여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고 놓아두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절).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위협적이고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 두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지 시험하십니다.
기도문
저희가 왜 금방 하나님을 잊습니까? 기억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희가 하나님이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을 잊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저희가 서로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상기하는 이들이 되게 하소서. 또한, 교회가 다음 세대에게 창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3대 가는 부자 없다는 말이 있듯이 3대 가는 신앙 없다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대에 대를 이어서 하나님을 고백하며 살게 하소서.
사사기 3장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으시고 남겨두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1-6절). 그것은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세대로 하여금 전쟁을 연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맞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용사로 무장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절).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방인들과 결혼합니다( 절). 결혼은 인간관계 중에 제일 깊은 관계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불신결혼을 통해 가나안 땅에서 적응하려고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쫓겨날 위기에 처합니다.
이제 사사기의 본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십니다. 여섯 명의 대사사라고 할 수 있는 이들과 여섯 명의 소사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사사라기보다는 각 지파를 건진 사사들입니다. 아직까지 왕이 세워지기 전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로서는 타락, 징계, 회개, 구원의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 와중에 사사의 역할이 주어집니다. 주의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는 역할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북쪽)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다급해서 부르짓자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의 “옷니엘”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던 갈렙의 조카입니다. 태평 시절이 오자 이스라엘이 다시 범죄합니다. 이번에는 암몬과 아말렉과 동맹한 롯의 자손인 모압 왕 에글론(동쪽)이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염치없는 이스라엘이 다시 부르짓자 하나님께서는 막내 지파인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 지파의 왼손잡이 “에훗”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에글론에게 조공을 바치려는 척하면서 독대를 청하여 왼손으로 칼을 빼어 그 왕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소집하여 요단강 나루턱을 장악하고는 모압 사람들을 죽입니다. “나를 따르라. 어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절). 그는 이 전쟁이 여호와께로부터 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세번째는 함의 자손인 블레셋(서쪽)이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방인인 것 같은 아낫의 아들 “삼갈”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는 무기가 될 수 없는 소를 모는 막대기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절). 이스라엘의 죄는 눈덩이같이 불어나고, 이스라엘은 대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듣고 건져 내십니다.
기도문
기독교인이 적응력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자기 고집을 지나치게 부리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어디서든지 잘 적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무조건 적응해서는 안됩니다. 저희는 세상과 결코 하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하나되자고 해도 저희는 오직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는 주의 백성입니다. 저희가 적응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주의 말씀을 늘 적용하며 살게 하소서. 적응을 넘어 적용하는 이들로 살아갈 수 있게 하소서.
사사기 4장
사사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하나님께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사사 드보라를 세웁니다. 이렇게 여자가 사사가 되었다는 것은 여자도 목사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상한 말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의 한 형태입니다. 남자들 중에서는 정복전쟁에 나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자들이 모두 꽁무니를 빼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가나안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20년동안 괴롭힙니다.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900대로 이스라엘을 위협하면서 심히 학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통 중에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여선지자 드보라를 일으키십니다. 그녀는 바락이라는 사람을 불러서 승리를 약속하면서 야빈의 군사들과 전쟁하라고 독려합니다. 바락은 드보라가 전쟁에 같이 나가지 않으면 자기도 전쟁터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바락은 드보라가 함께 가야만이 승리할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드보라는 자신이 함께 갈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동시에 전쟁 승리의 영광이 한 여인에게 돌아갈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절).
이미 사사기 저자는 본 기사에 대한 복선으로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을 소개했습니다(1:16). 또한 사사기 저자는 바락이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전쟁하기 이전에 이 족속에 대해 언급합니다(11절). 이 겐 족속은 북쪽으로 이주해 야빈과 화평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헤벨의 아내 야엘은 하나님께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스라가 전쟁에 패해 도망쳐 오자 그를 숨겨주는 척 하면서 그가 잠든 사이에 장막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아 죽입니다( 절). 이 여인 야엘은 시스라를 추격해 온 바락에게 그 시체를 보여줍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대적들을 몰아내는 일에 미온적이었지만, 이방여인 야엘은 열성적이었습니다. 한 이방 여인이 이스라엘을 심히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도문
저희 시대는 성 대결이 극심합니다. 페미니즘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성의 목소리를 너무 억눌러 왔기 때문입니다. 유리천장이라는 말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세우셔서 남자를 부끄럽게 하실 때가 많습니다. 여성이 남성의 밥그릇을 빼앗아간다고 말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는 남녀가 차이가 없고, 또한 창조질서에 따른 남녀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남녀가 다투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협력하게 하소서.
사사기 5장
전쟁에서 승리한 후 드보라가 승리를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락도 여기에 동참합니다. 자기들의 능력으로 인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대적들과 싸우셨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저, 전쟁수행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성과 이스라엘의 소극성을 대조합니다(1-11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즐거이 헌신했다고 노래하기 시작하지만 이것은 패러디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열성을 낸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자연만물을 호령하실 정도로 이 전쟁을 수행하시려는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세일산, 에돔땅을 말하지만 강조점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주신 것을 말합니다( 절). 이스라엘은 드보라의 임직(남자들이 나서지 않기에 여자가 나섬)과 물긷는 여인들의 과거 회고(물긷는 여인들이 당시 남자들의 소극성을 안타까와 하면서 옛날 이스라엘 용사들의 용맹을 회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정복전쟁을 수행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정복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지파들과 그렇지 않은 지파들을 대조합니다(12-18절). 적극성을 보인 지파는 에브라임(에브라임과 같이 살았던 아멜렉 사람들이 주로 참여), 베냐민, 마길(요단 서편에 살았던 므낫세의 첫번째 아들로 용맹스러운 장군들이 많이 참여), 스불론(용맹스런 장군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싸움), 납달리(높은 곳에 거하면서도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 지파입니다. 소극적인 지파는 장자 르우벤지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 양이나 치고 피리나 불고 있었으므로 ‘큰 결심이 있었다’고 조롱을 받습니다( 절). 길르앗(므낫세의 한 자녀로 요단 저편에 산다고 해서 요단 이편의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함), 단(해변에 거한 단은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기에만 바쁨), 아셀(해변에 살면서 자기 기업의 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임)지파도 소극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라는 것과 이 전쟁에 대한 메로스와 야엘의 태도를 소개합니다(19-27절). 이스라엘이 힘써 싸웠지만 하나님께서 폭우를 내려서 기손 강에서 철병거를 쓸어 버리셨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용사들을 돕기를 거절한 메로스는 저주받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정복전쟁에 결정적으로 참여한 야엘이라는 이방여인이 영광을 누리고 복을 받습니다( 절).
이 시, 이 찬양은 시스라의 어머니의 독백과 언약의 기원으로 끝납니다(28-31절). 아들이 늦어지는 것을 염려하자 시녀들이 노략하고 여인들을 희롱하느라고 늦어진다는 말로 안심시키지만 이것도 패러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이들을 연약한 여인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이들은 철저하게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의 기원을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절).
기도문
저희가 왜 전쟁의 날에 물러납니까? 헌신을 요구하고, 투쟁을 요구하면 뒤로 물러서 버립니다. 결국은 나 잘 되자고 믿는 것입니까? 저희가 평화의 영성만이 아니라 전쟁의 영성을 가지도록 도와 주소서.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원합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니 저희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아무리 약해도 죄와 마귀와 대항하여 싸울 수 있다는 압니다. 거룩한 용사께서 저희를 위해 친히 싸워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사기 6장
이스라엘이 다시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자손)과 아말렉(에서의 후손) 자손들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들 유목민들은 추수 때만 되면 메뚜기 떼같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초토화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하여 구멍과 굴을 뚫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역사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손에서도 구원해 주셨는데 하찮은 아모리 족속들의 신들을 두려워하여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책망을 듣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자 마침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옵니다. 이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들이 무서워 몰래 숨어서 타작하던 중이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떻게 이렇게 압제를 당하는 일을 겪냐고 묻습니다( 절). 자기들이 왜 이방인들의 압제를 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요구합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예물을 가져올 때까지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십사 간구하고,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이 가져온 음식을 반석 위에 놓은 후 그 음식에 불을 놓습니다. 이것은 언약관계의 구체적인 표징인 제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신앙 무장을 위해 아세라 목상을 찍고 소를 잡아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밤에 몰래 이 일을 행합니다. 아침에 일어난 동네 사람들은 아세라 목상이 찍힌 것을 보고는 분개하면서 누구 짓인지 찾아 나섭니다. 기드온의 짓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를 죽이자고 난리를 칩니다. 이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 편에 섭니다. 요아스는 바울과 아세라가 참 신이라면 스스로 기드온과 싸우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절).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가족주의가 아닙니다. 이제 그도 드디어 하나님을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해마다 그렇게 했듯이 미디안과 아말렉 군사들이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기드온에게 임하시고, 기드온은 나팔을 불어 군사들을 모읍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듭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쟁에 나가기 전에 기드온은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에게 나타난 천사가 보여준 기적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는 자연 만물에 대한 기적을 요구합니다. 작은 양털 한 조각에만 이슬이 있고 마당 전체에는 이슬이 하나도 없게 해 달라고, 다음 날에는 거꾸로 되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절). 말도 안되는 일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알과 아세라가 자연 만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믿음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도문
하나님께서는 겁이 나서 숨어지내는 이를 찾아가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왜 저희가 이렇게 압제를 당하냐고 묻는 이에게 찾아가십니다. 주님이 찾아오시면 그때부터 저희가 주께서 함께 해 달라고. 그 증거를 주십사 담대히 구하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저희와 함께 하시냐고 하는 것과 주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를 달라고 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저희가 주님의 함께 하심을 기대하고 믿고 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7장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극적으로 변화시키셔서 이방 족속들과의 전쟁에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 군대는 이스라엘의 진영 북쪽,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처음에 33,000명이 모집되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숫자가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로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면 자기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교만을 부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절). 대적들의 숫자에 비교하면 형편없이 적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조차도 많다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겁내고 있던 22,000명을 돌려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많다고 하십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시냇가로 데려가 물 마시는 모습을 보고서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을 추리라고 하십니다. 적정을 잘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을 핥아 마시던 300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300명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하십니다( 절). 이스라엘 내에 전쟁을 위해 준비된 자들이 300명 뿐이었다는 말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로 과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의심하였던가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의 진으로 몰래 잠입하여 보초가 꾼 꿈을 듣게 하십니다. 그 꿈은 미디안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을 쳐서 무너뜨리는 보리떡 한 덩어리에 대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것을 듣고 있던 그의 동무가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념겨 주셨느니라”( 절)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말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그 꿈과 해몽을 듣고는 용기를 얻어 돌아옵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하나님께서 미디안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다고 외칩니다. 그는 100명씩 세 대로 나누어서 각각 나팔과 빈 항아리 속에 횃불을 감추게 해서 미디안 진영까지 은밀히 접근합니다. 미디안 군사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이스라엘 군대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면서 횃불을 치켜들면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외치며 급습합니다( 절). 미디안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에 바쁩니다. 추격전 거의 끝자락에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호출하여 요단강 수로를 점령하도록 부탁하고는 도강하려는 미디안 군을 섬멸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합세하여 대적을 물리칩니다.
기도문
숫자로 밀어붙이면 누구든 꼼짝하지 못합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숫자가 곧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숫자를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수여도 괜찮다고, 숫자를 계속해서 줄여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내가 일당백 할 수 있다고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소수라는 것 자체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소서. 숫자가 어떠하든지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단 한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사기 8장
기드온이 미디안을 치기 시작하자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 지파가 앞다투어 확보된 승리를 차지하려고 뒤늦게 전쟁에 참여합니다(7:23). 또한 므낫세 지파의 기드온이 큰 승리를 거두자 지금까지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던 에브라임 지파가 지도자의 비열한 허세를 부립니다. ‘전쟁이 시작될 때에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냐?’고 소리칩니다. 이에 기드온은 어이없어 하거나 그들을 대항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의 승리가 에브라임이 한 일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이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절). 그러자 그들은 화를 풀고는 에헴 하면서 돌아갑니다.
기드온은 이 전투에서 기진맥진했음에도 불구하고 300명을 이끌고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여 요단강마저 건넙니다. 지친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떡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왕들이 지금 네 손에 붙잡히지 않았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도와 주겠냐고 비웃습니다. 아마도 기드온이 미디안 왕들을 붙잡지 못하면 요단강 동편에 떨어져 사는 자기들이 큰 해를 입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왕을 붙잡아 와서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의 방백들의 살을 찢고, 브누엘의 망대를 헐어 버립니다( 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하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징계받아 마땅합니다.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를 심문했는데 자기 형제들을 죽인 것을 밝혀냅니다. 이에 기드온은 자기 장자 여델에게 그 두 왕을 죽이라고 했지만 너무 어려 겁이 나서 죽이지 못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죽이고 이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7년 속박에서 해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그의 가문이 대대로 자기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기드온은 그런 말에 마음이 들뜨지 않고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절)고 대답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진두지휘하여 승리를 얻었기에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이스라엘 군대가 빼앗은 탈취물, 금귀고리와 각종 패물을 요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에봇을 만들어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둡니다. 이 에봇은 제사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제사장이 겉옷 위에 입는 것이었습니다. 실로에 그 에봇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실로와 경쟁관계를 만들기 위해 자기 성읍에 모조품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기드온의 승리를 연상하면서 기드온의 성읍에 있는 에봇을 우상처럼 섬기기 시작합니다( 절).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분리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후 오직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짐짓 승리를 물신처럼 숭배하는 길로 나아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기도문
저희는 간절히 승리를 바랍니다. 늘 패배하다 보니 바르게 해서 승리하는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옳은 쪽이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던 승리 후가 문제입니다. 늘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가 한번 승리하고 나면 그 승리로 인해 자기숭배가 시작되고, 자기세력화가 심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말 뿐이고 능력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저희가 늘 실패하고 패배하더라도 주님 의지하며 살게 도와 주소서.
사사기 9장
사사 기드온이 세겜에 첩을 두었는데, 그렇게 해서 낳은 자식이 아비멜렉입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에 가서 ‘혈연’에 호소합니다( 절). 이에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드온에게 찾아와 왕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만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이방 나라와 같이 전쟁을 강력하게 수행할 절대 권력자로서의 왕을 구했습니다. 그 요구가 이제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 은 70을 내어주고,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경박한 이들을 사사 부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세겜 사람들의 환심을 산 아비멜렉은 배다른 형제들인 기드온의 70아들을 한 반석에서 쳐 죽입니다. 폭력적인 지도자의 비열함이 드러납니다.
기드온의 아들들이 학살당할 때 요담이라는 기드온의 아들이 겨우 살아남습니다. 그는 도망치듯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온 세겜 사람들을 향해 비유를 듭니다. 나무들이 왕을 세우려고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찾아왔는데 그 나무들은 다 거절합니다. 뭔가를 생산하는 나무들은 왕되기를 거부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나무가 왕이 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시나무는 자기에게 피하지 않는 이들은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폭력적인 왕을 구한 이스라엘은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요담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불을 내어 서로 태워 죽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절).
아비멜렉은 3년동안 다스렸지만 요담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셔서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절).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 대신에 가알이라는 사람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세겜의 장관 스불이 이것을 아비멜렉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아비멜렉은 불같이 달려들어 세겜을 공격했고, 세겜 망대로 도망간 사람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입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아비멜렉이 데베스 성 사람들도 죽이려고 성벽 가까이 접근하다가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윗짝에 맞아 두개골이 박살나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70아들들을 죽인 아비멜렉과 이들을 죽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세겜 사람의 죄악을 갚으셨습니다( 절). 폭력적인 지도자와 세상적인 교인들이 처음에는 서로 밀월관계를 유지하지만 결국에는 분열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겸손한 지도자를 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문
저희는 혈연 지연에 호소합니다. 심지어 학연에 호소합니다. 이렇게 끈끈하게 연결된 이들끼리 서로의 이익을 도모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말로 저희의 모든 불의를 다 묻어 버립니다. 우리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가 아닌 남을 지목하고 배척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패거리, 카르텔이라는 말로 상대방을 잔인하게 공격하기에 바쁩니다. 이렇게 늘 왕따를 지목하기에 바쁜 저희의 완악함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10장
아비멜렉이 죽은 후 돌라(잇사갈 족속)와 야일(길르앗 지파)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 두 사사들이 각각 23년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사사를 통해 23년동안의 평안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특이한 것은 야일에게 아들 30명이 있어서 어린 나귀 30필을 타고 성읍 30을 차지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 어린나귀를 타고 성읍을 차지했는 것은 아마도 그 아들들이 큰 위세를 부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사 야일은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방백으로 앉히는 족벌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아비멜렉의 폭력적인 통치에 한술 더 떠서 좀 더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합니다.
두 사사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금 이방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방 족속들에게 팔아 넘기시고, 18년동안 압제를 당하게 하십니다( 절). 요단 강 동편에는 블레셋 족속과 암몬 족속이, 요단 강 서편에는 암몬 족속이 점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고통가운데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과거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모세에 의한 출애굽), 아모리(요단 강 동편의 시혼과 옥에 대한 승리), 암몬(에훗이 모압과 암몬의 동맹군을 물리침), 블레셋(삼갈이 그들을 쳐부숨), 시돈(드보라와 바락이 야빈과 시스라 그리고 시돈의 연합군을 물리침), 아말렉(기드온이 미디안과 아말렉의 연합군을 물리침), 마온(미디안의 잘못된 오역인 것 같음)의 손아귀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7번의 승리를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보장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거듭 섬기니 하나님께서는 이제 절대 구원해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우상을 섬겼으니 이제부터는 이방 신들에게 부르짖으라고 핀잔을 주십니다.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절). 그제사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범죄했다고 토설하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처분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건져내 주십사 구합니다. 가로 늦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더 걱정하시고 마음 아파 하십니다. 늘 맞은 후에 돌아오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문
저희는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와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게 구하면 됩니다. 믿는 것과 구하는 것은 하나여야 하지만 저희는 믿는 것 따로, 구하는 것 따로입니다. 이렇게 저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아도 저희가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눈 질끈 감고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용기를 내어 구합니다.
사사기 11장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은 미스바에 진을 쳤습니다. 요단강 동편 땅에서 서로 맞붙었습니다.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누가 앞장서서 암몬 자손과 싸우러 나가겠냐고 말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만큼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르앗이 한 기생에게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가 입다입니다. 길르앗의 자식들은 입다를 서자라고 내어쫓았습니다. 전쟁이 벌어지자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에게 가서 자신들의 군대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절). 그만큼 이스라엘에는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은 처음에는 미워서 쫓아내었다가 다급하니까 불렀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태도입니다. 입다는 자신이 전쟁터로 나가서 승리를 거두면 그들의 우두머리로 삼겠는지 거듭 묻습니다.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길르앗 장로들은 그러겠다고 서약합니다( 절).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냅니다. 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넘보냐고 묻자 이스라엘이 자기들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입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압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형제 족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그들의 땅을 빙 둘러갔다고 말합니다( 절). 아모리 왕 시혼의 경우는 달랐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청하여 땅을 통과하게만 해 달라고 했는데 전쟁을 걸어와서 싸워 그들의 땅을 점령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바로 이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주했는데 왜 남의 땅을 기웃거리냐고 말합니다( 절). 너희들은 너희 신 그모스가 주는 땅에 거하라고 말합니다. 입다는 길르앗 땅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했습니다.
입다의 말에도 불구하고 암몬 왕이 수긍하지 않고 전쟁을 걸어옵니다.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입다가 서원합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절). 인신제사는 이방인들이 위기에 처할 때에 신을 자극하기 위해 종종 하던 극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조차 말씀에 대해 무지한 채 극단적인 헌신을 서약하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입다가 크게 승리한 후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무남독녀가 아버지를 맞이하기 위해 맨발로 뛰어나옵니다. 입다는 자신이 한 서원이 생각나서 옷을 찢으며 대성통곡합니다. 승리의 기쁨이 초상집의 통곡으로 변했습니다. 입다의 무남독녀는 순순히 죽겠다고 합니다. 두 달동안 시간을 주면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하겠다고 합니다. 입다가 서원한 대로 행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 그랬다면 이것이 옳은 것이었을까요? 서원할 때는 말씀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면서 서원하고 나서는 말씀대로 실행하려고 합니다. 말씀에 대해 무지하면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기도문
저희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합니다. 저희가 남다른 헌신을 하면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크게 보답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저희의 헌신에 감동하는 분이 아닙니다. 저희가 말씀을 떠나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 행하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저희가 떠벌리지 않고 조용히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감동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도 묵묵히 맡은 일을 잘 감당하는 저희가 되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12장
입다가 암몬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두자 요단강을 건너 함께 싸워준 에브라임 지파가 다시 한번 더 지도자의 허세를 부립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향해 왜 싸움에 나갈 때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집니다.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절). 자기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함께 싸워주었으니 전리품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들 가랑이로 기어나가라고 요구하는 꼴입니다. 너무나 비열합니다. 이에 불뚝 기질이 있는 입다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외칩니다. “웃기지도 않네. 내가 너희를 부르지 않았냐? 눈치보느라고 마지못해 싸움에 참여해 놓고는 승리하고 나니까 한몫 단단히 차지하려고 끼어드냐”고 면박을 줍니다. 예전에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의 비위를 맞추어 준 것(8:1-3)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를 향해 ‘너희들은 우리 중에서 도망한 자들이 아니었냐’고 무시하는 말마저 했습니다( 절). 아제 자존심 상한 이들끼리 전쟁이 벌어집니다. 교회가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피를 흘리는 일도 불사합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강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는 강을 건너 자기들의 유업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솎아냅니다. 그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발음하기 힘든 ‘십볼렛’이란 발음을 하도록 요구해 에브라임 사람을 감별해 42,000명이나 칼로 쳐 죽입니다. 이 일로 인해 요단강을 경계로 해서 동, 서 교회로 분리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심각한 이유는 여호수아 22장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했던 정신이 이제는 아예 사라져 버렸습니다. 교회가 자기 이름을 내세우려는 것으로 인해 분열되고 찢어져 버립니다.
입다가 사사가 되어 6년동안 다스리다가 죽습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세번째 소사사인 입산, 엘론, 압돈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소사사가 삼갈(3:31)이었고, 두번째 소사사가 돌라(10:1-2)와 야일(10:3-5)입니다. 이제 소소사가 3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소사사의 구성이 1명, 2명, 3명의 순으로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사 입산은 딸 30이 있었는데 타국에 시집보냈습니다( 절). 정략결혼을 추진했다는 말입니다.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 종교적인 순결을 양보한 것입니다. 사사 압돈은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에게 어린 나귀 70필을 태웠습니다( 절). 사사 야일이 한 것(10:3-4)처럼 족벌정치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만 직분자로 세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서로 높아지겠다고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분열되고 있고,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자들에게 직분을 나누어주면서 교회의 타락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기도문
궁핍한 이들이 속이고 허풍을 떨어대는 것은 그나마 수긍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이 거들먹거리는 것은 보아주기 힘듭니다. 하나님이 어떤 자리에 앉히신 것은 그 자리를 내세워 자기 욕망을 채우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리를 이용해 다른 이들이 수고한 것을 차지하려고 숫가락을 얹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크게 희생한 것처럼 생색내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것이 없습니다. 저희는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13장
이스라엘이 다시 범죄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중해를 마주하고 있는 땅에 살던 블레셋의 손에 붙이십니다. 이들 블레셋 사람들은 지중해를 마주하고 있는 비옥한 남쪽 해안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는데, 해마다 이스라엘 자손이 점령해 살고 있는 땅으로 쳐들어와 40년간이나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3:31; 10:7). 이에 하나님께서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하는 사람의 아내를 선택해서 그의 태를 열어주시고, 구원자를 보내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단 지파 사람인 마노아가 단 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쫓겨나 이리 저리 옮겨다니면서 남의 땅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삿 18장)에도 원래 분배받은 땅 ‘소라’에 외로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절).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주신 자리를 굳게 지키려고 하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그의 집에서 구원자를 일으키려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불임이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를 평생 나실인으로 키울 것을 명령합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땅의 소산물로 인해 방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은 죄와의 철저한 구별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것은 성령께서 주신 위대한 능력을 잘 보존할 것을 말합니다. 이런 요구는 그 구원자에게만 요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아이의 사역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절).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자 마노아는 그 사자를 다시 한번 더 보내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다시금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그녀가 급하게 달려가 남편에게 알립니다. 이번에는 마노아가 직접 태어날 아이에 대해 듣습니다. 마노아가 그 사자의 이름을 묻자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을 기묘자라”( 절)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영원전부터 로고스로서 활동하신 성자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 사자는 마노아가 가져온 번제물에 불꽃이 일어나게 하고는 그 불꽃과 함께 하늘로 사라집니다. 마노아는 자기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을 것이라고 벌벌 떨자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친히 알리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묵묵하게 자기 위치를 지킨 자에게 찾아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려는 계획을 보이십니다.
기도문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내가 선 자리가 너무나 작고 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형편없는 자리에 있어야 하냐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이곳 저곳 기웃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메뚜기처럼 펄쩍 펄쩍 뛰어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겸손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과 교만하게 더 좋은 자리를 구하는 것의 차이를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남이 평생 일구어 놓은 것을 나의 것으로 차지하려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14장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삼손의 부모가 말립니다. 부모가 말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국제결혼과 다릅니다. 이스라엘 남자가 이방여인과 결혼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한 것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을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절). 삼손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그 계획을 알았기 때문에 이방여인과 결혼하려고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블레셋의 손으로부터 구출하시기 위해 삼손의 욕망도 이용하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가장 세속적인 이 결혼이 삼손의 사명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삼손이 부모를 설득하여 블레셋 딤나로 내려갑니다. 삼손이 하도 결혼하고 싶다고 종용하자 부모가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상견례를 했습니다. 상견례를 위해 딤나로 내려가던 와중에 삼손이 혼자 떨어져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자기를 향해 울부짖는 사자를 만났습니다. 삼손은 성령에 크게 감동되어 맨 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 삼손이 단지 육체적인 힘 자랑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놀라운 힘을 주셨습니다. 딤나에서 돌아오는 길에 삼손은 사자의 시체, 그 썩어가는 살 속에서 꿀벌들이 꿀을 모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삼손이 사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꿀같이 달고 단 풍성함을 주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삼손은 그 꿀을 부모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지만 그 꿀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알리지 않았습니다( 절). 자기의 사명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함부로 자랑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혼식이 벌어집니다. 장인 집에서 블레셋 청년들을 불러 모아 삼손의 친구가 되게 합니다. 삼손인 이 흥겨운 잔치 와중에 30명의 블레셋 청년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이게 뭐냐?”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그것을 풀면 그들에게 베옷(평상복) 30벌과 겉옷(축제복) 30벌을 주겠다고 내기합니다. 그들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자기에게 그것들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흔쾌하게 동의합니다. 마지막 날이 되도록 답을 알지 못한 블레셋 친구들은 삼손의 아내를 위협하여 답을 알아냅니다. 답을 알려주지 않으면 삼손 아내의 아버지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삼손의 아내가 끈질기게 삼손을 괴롭혀서 답을 알아내고 친구들에게 알려줍니다. 이에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하여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30명을 쳐 죽이고 자기가 약속했던 옷을 구해 옵니다( 절). 삼손이 속았지만 이런 분노 자체가 옳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비로소 삼손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대적임을 깨달았습니다. 믿음은 교회를 핍박하는 대적들과 죄를 향한 적대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도문
저희는 저희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욕망마저 사용하셔서 구원의 일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치부조차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어떻게 행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 자기중심적이 아니냐, 사람이라면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하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저희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입니다. 욕망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선한 욕망을 가지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되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15장
블레셋 사람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마음이 멀어집니다. 아내를 버려두고 분노하면서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얼마 뒤 삼손은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염소 새끼 하나를 메고 딤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장인이 말하기를 ‘자네가 내 딸을 미워하는 줄 알고 친구에게 주었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동생이 있는데 그녀를 아내로 맞으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이제야말로 블레셋을 칠 명분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삼손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찌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절). 그는 여우 300마리를 붙잡아 꼬리에 홰를 매어서 불붙이고는 블레셋의 곡식밭에 풀어 놓습니다. 여우들이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온 곡식밭을 뛰어다니면서 다 불태워 버립니다.
삼손이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안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장인 가족과 집을 불태웁니다. 그러자 삼손은 블레셋을 적으로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너희가 이렇게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절).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한 삼손이 숨어 버리자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의 레히에 쳐들어 올라와 진을 치고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유다 사람들이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묻자 삼손을 잡아오라고 합니다. 이에 유다 사람들은 에담 바위 틈에 숨어있는 삼손을 찾아가 왜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냐고 꾸짖습니다. 그들은 삼손을 치지는 않고 결박해서 넘겨주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절). 온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블레셋 아래서 무리없이 살려고 합니다. 그들은 블레셋을 대적하는 삼손을 오히려 귀찮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새 밧줄 둘로 단단히 결박당한 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집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려는 순간 그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하여 결박한 줄을 불탄 삼처럼 쉽게 풀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근방에 있던 나귀의 새 턱뼈를 취하여 1,000명을 죽입니다. 삼손이 외칩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명을 죽였도다”( 절). 극도로 피곤해진 삼손이 목말라 죽을 것같자 하나님께서 샘을 터뜨리셔서 마시게 하십니다. 그 샘을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향해 적개심을 가진 삼손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큰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기도문
저희는 선과 악을 가르려고 합니다. 적과 아군을 명확하게 가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우리를 위한 이들일 때가 많고, 아군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우리를 해치는 이들일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이익 위주로 보니 그렇습니다. 적을 적으로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귀와 그에게 속한 이들을 대적 원수로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과 싸우게 하시고, 악인들과 타협하고는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악한 것임을 알게 하소서.
사사기 16장
삼손은 괴력이 있었지만 이방여인에게 빠져 들어갑니다. 삼손은 블레셋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가사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녀에게 들어갑니다. 가사 사람들은 삼손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밤새도록 성문을 지키고는 새벽에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한밤중에 일어난 삼손은 이것을 알고는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빗장을 빼 어깨에 둘러메고 유다 헤브론 앞산 꼭대기까지 갔습니다( 절). 성 문짝을 들고 거의 60킬로미터를 걸어 갔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가사의 성문이 헤브론에 온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만 하면 이처럼 적의 성문을 열게(승리를 의미함)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삼손은 다시 소렉 골짜기에 있는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탄은 하나님 백성의 가장 약한 점을 틈타 넘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그 여인은 삼손의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가르쳐 달라고 계속해서 조릅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주면 큰 돈을 주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로 결박하면, 둘째는 ‘새 밧줄들’로 결박하면, 셋째는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속이니 그 여인은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절).
결국 삼손은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자기의 소명을 놀이에 이용합니다. 자기가 평생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는데 그 머리카락에 자기 힘의 비결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직분을 소홀히 여긴 대가를 톡톡히 치루어야 했습니다. 들릴라는 자기 무릎을 베고 잠든 삼손의 머리카락을 싹둑 싹둑 잘라 버립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에 삼손이 힘을 떨치려고 하지만 자기 힘이 이미 다 빠져나간 뒤입니다. 그는 눈을 뽑히고 놋 줄에 매여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형편에 처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소명을 놀이감으로 생각할 때 세상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놀라운 힘을 주셔서 블레셋이 섬기는 다곤을 찬양하는 소리를 끝내셨습니다. 다곤을 섬기는 잔치자리에 삼손이 끌려 나와서 놀이감이 되었는데 삼손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절). 이 기도 후 삼손은 신전을 떠받치는 두 기둥 사이에 자기를 세워달라고 하고는 그 기둥을 껴안고는 넘어뜨립니다. 신전 기둥과 함께 지붕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덮쳐 다 죽습니다. 물론, 삼손도 죽습니다. 자살특공대처럼 행동했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이들이 살아있을 때에 죽인 이들보다 많았습니다. 무너진 다곤 신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는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이에 삼손의 가족들은 삼손의 시체를 잘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삼손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대적을 더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문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능력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약한 이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은사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스스로 개발하거나, 스스로 추구하여 얻은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주신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힘을 가지고 저희가 장난하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저희에게 주신 힘의 비밀을 잘 간직하게 하시고,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그 힘을 지혜롭게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17장
본 장부터는 사사기의 결론입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폐하고 완악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자손의 영적인 무지와 완악함의 이유를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17:6; 18:1; 19:1; 21:25)라고 해설합니다. 왕이 세워져야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사기는 이후 왕조의 관점에서 기록한 역사일까요? 사사시대를 왕조시대보다 못한 시대로 보는 것입니까? 이것은 장차 도래할 다윗 왕권을 미리 암시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사건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타락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미가는 자기 어먼의 은 1,100세겔을 훔칩니다. 삼손과 들릴라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금액은 엄청나게 큰 금액입니다(16:5). 그 어머니가 훔쳐간 사람을 저주하자 미가가 자기가 그 은을 훔쳤다고 털어 놓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책망하기는커녕 은을 찾은 기쁨 때문에 도리어 그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도, 저주도 하고 있지만 욕심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은 200을 도로 주면서 신상을 만들게 합니다. 미가는 자기 집에 그 신상을 들여놓고 제사장들이 제사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입던 에봇과 드라빔을 갖추고는 자기 아들 중 하나로 제사장을 삼습니다( 절). 즉, 개인적인 성소를 세웠습니다. 중앙성소인 실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가는 자기 마음대로 신당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과 교회를 분리시킨 행위입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서 한 레위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유다 지파가 내준 땅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땅을 떠나 방황하다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던 미가의 집에까지 이릅니다.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절). 유다지파 사람들이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가는 그 청년이 레위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고 쾌재를 부르면서 자기 신당의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청년이 좋아하자 그에게 1년에 은 10세겔과 의복이며 숙식을 제공하고 자기 아들처럼 대우합니다. 그 레위 청년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거짓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종교적인 격식을 잘 갖춘 미가는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절)고 하면서 행복에 겨워합니다. 종교적인 격식들을 잘 갖추고, 종교적인 행위들을 반복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는 미신에 빠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고, 어떻게 저희와 함께 하십니까? 저희는 자기만족, 자기 욕망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둘러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만들면 그것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담보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물질에 붙어계시는 분이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무조건적으로 함께 하시고, 저희 편이 될 수 있는 방법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회개하는 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길임을 알게 하소서.
사사기 18장
단지파는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인근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거저 주신 기업의 땅을 개척하고 지킬 힘이 없어 이방인들에게 빼앗겨 버리고 구석으로 내몰렸습니다. 이에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살고 있던 단 지파 사람들이 용맹한 다섯 명을 보내서 자기들이 살만한 땅을 찾게 합니다. 남이 살고 있는 땅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단 지파의 정탐군들이 이베르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러 하룻밤을 머뭅니다. 레위 청년을 알아보고는 어째서 여기 있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살 곳을 찾고 있는데 이 여정이 형통할지를 하나님께 물어봐 달라고 합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을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절). 아무 말이나 막 던지고 있습니다. 다섯 명은 용기를 얻어 이곳 저곳 살피다가 저 북쪽 헬몬산 아랫자락 라이스라는 성읍까지 갔는데 그 성읍 사람들이 지중해를 낀 시돈사람들과도 교류하지 않고 격리되어 편안히 사는 것을 보고 여기에 머물면 좋겠다고 결론내리고는 보고합니다.
단지파 사람들은 정탐군들의 보고를 받고는 당장 그 땅을 쳐서 자기들 소유로 삼자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기들에게 넘겨 주셨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600명이 무장을 하고 출동합니다. 라이스를 향해 올라가면서 다섯 명의 정탐군이 말한 미가의 집에 먼저 도착합니다. 그들은 미가의 집에 있던 신상과 드라빔과 에봇을 훔칩니다. 그 집에 있던 청년 제사장이 뭐라고 하자 입을 다물고 우리 지파의 제사장이 되면 후하게 대접하겠다고 말합니다( 절). 이번에도 좋다고 하면서 따라 나섭니다. 제사장이 자기들과 함께 있으면 무조건 안심이라는 생각과 물질적인 유익과 명성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마침 미가가 집에 없던 때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미가가 집에 도착하여 벌어진 일을 듣고는 이웃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행군하고 있던 단 지파 군인들에게 항의합니다. 대낮에 이렇게 강도질을 벌이냐고,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항의합니다. 단 지파는 입을 다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미가는 자기에게 단 지파를 이길 힘이 없음을 알고 합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절). 미가는 거룩한 항변을 한 것이 아니라 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항변했습니다. 위협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죽여버리는 비겁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숨마저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욕심에 의해 잠재워질 따름입니다.
제사장과 동행한 단 지파의 군대는 숫자의 힘, 즉 폭력으로 미가의 소리를 잠재운 후 라이스 성읍의 백성들을 칩니다. 편안히 잘 살고 있던 그 성읍 사람들을 칼로 치고 그 성읍을 불태웁니다. 그 성읍은 외딴 곳 골짜기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단 지파 사람들이 다 이주해와서 그곳에 거합니다. 이주해 온 단 지파 사람들은 그 레위청년을 제사장으로 삼고 미가의 집에서 훔쳐온 성물들을 가지고 그들의 성읍에다 성소를 마련하고 “단”이라고 불렀습니다. 단 지파를 따라나선 그 레위청년은 모세의 손자였습니다. 모세의 아들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이었습니다( 절). 당시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모세의 손자가 타락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 후 이 불법적인 예배의 중심지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번성합니다. 실로 성소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서 벗나간 새로운 종교, 즉 우상숭배가 번성하고 있습니다.
기도문
아직도 무력으로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이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함께하심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고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힘을 얻게 되는 것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약해도 되고, 약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복임을 알게 하소서.
사사기 19장
둘째 사건은 이스라엘의 도덕적인 타락을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고 하면서 이 사건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고 있었던 한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의 한 여인을 첩으로 삼았습니다. 그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요구되는 성결생활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했는데 자신이 오히려 율법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첩이 행음하고(행음했다는 이 단어는 분노했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임) 자기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레위인은 4달이나 지난 뒤에 그 여인을 데리러 갑니다. 첩장인은 사위가 오자 극진하게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절). 그 레위인은 3일동안 첩장인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이들간에 심각한 대화라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레위인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사랑이라고, 희생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첩장인은 아내를 데리고 돌아가려고 하는 사위를 나흘째에도 붙잡습니다. 그 날 밤을 보낸 후 닷새째날에 그 레위인이 가려고 하자 또 붙잡습니다. 오후가 되자 그 레위인은 붙잡는 첩장인을 뿌리치고는 길을 나섭니다. 장인집에서 하루 더 머물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레위인은 해가 질 무렵 여부스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종이 여부스 성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말합니다. 그 레위인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 유숙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길을 빙 둘러 가다가 해가 질 무렵에 베냐민 지파의 기업인 기브아에 들어갑니다.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서 자기를 맞이해 줄 사람이 있는지 기다렸지만 아무도 그를 영접해 주지 않습니다( 절). 하나님의 백성이 나그네 된 형제들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에브라임 출신의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저녁이 되어 베냐민의 기브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레위인을 봅니다. 어디 사람이냐고 묻자 그 레위인은 자초지종을 밝힙니다.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밝힙니다. 자기에게는 먹을 양식이 충분하니 잠자리만 빌려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 노인은 안심하라고 말하고는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 노인의 영접을 받아 쉬고 있을 때에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집 문을 거칠게 두드리면서 레위인을 내어 놓으라고 위협합니다.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는 말을 통해 그들이 동성애 행위를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 이스라엘 자손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똑같은 행태를 보입니다. 그 노인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자기 딸과 그 레위인의 첩이 있으니 내놓겠다고 말합니다. 그 레위인은 자기의 첩을 억지로 집 밖으로 밀어내자 불량배들이 밤새도록 욕보입니다. 그 레위인은 첩을 하나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첩을 찾아오려고만 했습니다. 아침에 나가 그 첩을 깨워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새벽녘까지 당한 레위인의 첩이 노인의 집 문에 엎드려 죽어 있었습니다. 그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시체를 12토막으로 쪼개어 12지파에게 보냅니다( 절). 원수를 갚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거룩한 분노를 터뜨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죄악에서 기인한 것임을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문
저희는 낯선 사람을 영접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 사람이 혹 나에게 해를 입히면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낯선 사람을 이용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을 건드려도 내가 아무런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하나님은 낯선 얼굴을 하고 다가오신다고 했는데 이것이 맞는 말입니다. 이웃은 불편할 수밖에 없고, 낯선 사람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사사기 20장
이스라엘 전체가 발칵 뒤집힙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악행을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분노하면서 다함께 미스바에 모입니다. 그들은 그 레위인의 입을 통해 직접 사건의 경위를 듣습니다. 그 레위인은 자기 첩을 내놓은 자신의 잘못과 죄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기브아 불량배들의 죄악만 성토합니다. 이런 이들을 가만히 두어서 되겠냐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불량배들과 기브아 성읍을 치자는 는 의견을 만장일치로 결의합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기브아가 속해 있었던 베냐민 사람들에게 악을 행한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절). 그들은 도리어 베냐민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군대를 모집합니다. 이스라엘 지파들과 결전을 벌이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불량배들의 죄를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를 옹호하기까지 했습니다. ‘너희들이 뭔데 감히 우리 지파 문제를 건드려?’ 하는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벧엘에 올라가 하나님께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기가 시작할 때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셨듯이(1:2) 이번에도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절). 이들은 교회공동체가 죄로 물든 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이 없이 단지 자기 의로움에 빠져 베냐민을 치러 올라갑니다. 40만명이나 동원한 이스라엘 지파가 베냐민에게 패합니다. 첫 전투에서 22,000명이나 죽습니다. 이스라엘은 대성통곡하면서 하나님께 다시금 묻습니다.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속과 싸우리이까?”( 절). 처음에는 ‘베냐민’알고 했다가 이번에는 ‘내 형제 베냐민’이라고 말합니다. 두번째 전투에서도 18,000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죽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금 대성통곡하면서 금식하고 하나님께 제사하고는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절). 두 번이나 참패한 백성들은 울며 금식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픈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해야 했습니다.
세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지는 체하면서 베냐민 군사들을 성에서 끌어냅니다. 이때 매복시켜 둔 군사들이 기브아에 쳐들어가 협공해 승리합니다. 기브아에 쳐들어간 이스라엘 군대는 성에 불을 지릅니다. 그 연기를 본 이스라엘 군대가 베냐민 군대를 향해 돌아서서 그들을 쳐 죽이기 시작합니다. 베냐민 군대가 광야로 내몰리고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22,000명이나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살육이 지나쳐 베냐민 군사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6백명 뿐이었습니다( 절). 이스라엘 군대가 나머지 베냐민 자손과 성읍을 무자비하게 쳐서 죽이고 불태웁니다. 형제인데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던 것처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분노를 자제할 줄 몰랐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복수하기에 바빴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심판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교만을 부렸습니다.
기도문
저희 손가락은 늘 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이것이라고 꼭 집어서 말하곤 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특별히 들이대는 잣대는 정의입니다. 정의의 칼날로 마음껏 난도질합니다. 세상적인 정의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도 칼날을 휘두릅니다. 이렇게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 너무나 잘 보입니다. 정의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복수심에 불타서 행할 때가 많습니다. 손가락질하는 저희는 어떤 모자란 사람보다도 하나도 낫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사기 21장
이스라엘 군대가 베냐민과 전쟁하려고 나가기 전에 미스바에 모여서 맹세한 것이 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게는 자기들의 딸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베냐민을 이방인들 취급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을 통해 육적인 분노를 자제하지 못해 베냐민 지파의 모든 비전투원들까지 다 죽여 베냐민 지파가 멸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전쟁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수의 열심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절).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다시피 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까? 아닙니다. 자기들의 복수심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숫자의 힘을 믿었고, 자신들의 맹세가 성급하고 무모한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겨우 살아남아 림몬 바위로 도망간 베냐민 사람들과 화친조약을 맺습니다. 이제는 그들을 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뒤늦게 이스라엘에서 한 지파가 거의 사라지게 된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는 조처를 취합니다. 베냐민 지파 중에 겨우 600명의 남자들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지파들은 자기들이 전쟁하러 나가기 전에 한 또 한 가지 맹세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베냐민 지파를 응징할 군사 모집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죽이겠다는 맹세입니다( 절). 이렇게 터무니없는 맹세마저 했는데 도리어 이 맹세로 인해 베냐민 지파를 살릴 길이 생겼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사해 보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군대는 길르앗 야베스 남자들을 진멸하고는 400명의 처녀를 납치하여 데리고 옵니다. 멸절시키고 처녀들만 남겨 남아있는 베냐민 사람들이 신부로 삼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사람을 납치하는 일이 결단코 있어서는 안되었지만(출 21:16) 자신들이 한 맹세로 인해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이르자 납치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래도 200명의 처녀가 모자랐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꾀를 냅니다. 절기가 되어 성소가 있던 실로의 무도회에서 춤추는 처녀들을 단체로 납치했습니다. 납치한 그 처녀들을 베냐민 남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이 처녀들의 부모나 형제가 얼마나 황당하고 분했겠습니까? 그 부모, 형제들이 항의하자 전쟁에서 패해 여인들이 노략거리가 된 것도 아니고, 당신들이 베냐민 사람에게 자기 딸들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스스로 깬 것이 아니니 괜찮다고 말합니다( 절). 이런 말 자체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잔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헛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유린당했습니다.
기도문
저희는 맹세를 잘 합니다. 맹세를 하면 다른 이들이 나를 믿을만하다고 여겨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면 예라고, 아니면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맹세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게 하소서. 또한 헛되이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말씀을 어기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잘못한 맹세로 인해 죄를 눈더미처럼 키우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저희가 맹세하지 않더라도 맹세한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룻기 개요
룻기는 단순히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룻기는 사사기의 결론에 나오는 두 사건과 너무나 대조됩니다. 즉, 룻기는 왕이 없으므로 각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시대의 그 짙은 어둠을 해결하기 위해 왕이 오는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 여자의 씨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묵하고 결단성있고 신의를 지키는 남은 자 보아스와 하나님 나라의 멍에를 기꺼이 맬 이방인 룻을 통해 다윗왕이 탄생할 준비를 끝내셨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살펴봅시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어둠이 해결될 것입니다.
룻기 1장
사사시대에 기근이 듭니다( 절). ‘떡 집’이라는 이름의 베들레헴까지 기근이 들 정도로 그 기근이 심했습니다. 이에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은 가족을 이끌고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도피합니다. 이 흉년은 흔히 일어나는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이 흉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신 28장). 본문의 흉년은 아마 기드온이 사사가 되기 바로 전에 미디안 족속들이 쳐들어와 가나안을 쑥밭으로 만든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자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멜렉의 이주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여 세상으로 도망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세적인 성공을 위해 교회를 떠난 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멕렉이 줄고, 그의 두 아들도 죽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압이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남편과 두 자식을 잃은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다시금 풍성케 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나오미는 따라오려고 하는 두 며느리를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자기를 따라와도 과부로 평생 수치 가운데 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두 며느리들이 그들의 백성과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이때 룻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립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절). 그녀는 모압여인이었지만, 모압이 이스라엘을 종종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처럼 놀라운 결단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마침 보리를 추수하는 4월경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오는 것을 본 고향 사람들은 “이이가 나오미냐!”하면서 깜짝 놀랍니다. 나오미는 자기를 나오미(‘즐거움’)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괴로움’)라고 부르라고 말합니다( 절). 자신이 남편과 두 자식을 잡아 먹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나간 자기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점차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징계를 통해 돌이키십니다.
룻기 2장
모압 여인 룻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세상적인 것들을 다 포기하고 나오미를 따라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냉담이었습니다. 보리 추수때가 되었는데 룻은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지 못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녀는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나오미에게 요청합니다( 절).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체 이삭을 주우러 갑니다. 놀랍게도 그는 우연히 자기 시아버지였던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 베들레헴이 좁았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입니다. 신자에게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와서 노동자들에게 인사합니다. 노동자들도 인사합니다. 그 인사를 보면 이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노사관계라고 할까요? 보아스는 처음 보는 여인을 발견하고 누구냐고 묻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큰 자비와 친절을 베풉니다. 보아스는 룻이 그녀의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혀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신앙의 결단이며, 언약백성들의 규범대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효성이 지극했던 것 등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이 보답하시고, 상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절). 보아스는 언약에 근거해서 그녀에서 자비를 베풉니다.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대로 축복을 받을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식사시간이 되자 룻을 불러서 함께 식사하게 합니다. 보아스가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당부합니다. 이삭 줍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오히려 추수하면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서 버려서 룻이 이삭을 많이 주워가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삭을 벨 때에 남은 것을 추수하려고 뒤돌아가지 말라고 하셨지 추수하면서 뽑아서 버리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위해 자기 것을 기꺼이 내어 놓습니다. 룻은 성도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영적인 축복이며, 일용할 양식을 풍족히 공급받는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나오미는 하루 종일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이방 며느리가 어쩔 수 없이 이삭을 주우러 나갔는데 무슨 헤꼬지를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했을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다는 말을 들은 나오미는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나오미는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떠나지 말라고 말합니다( 절). 다른 밭에 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남편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편의 기업을 무를 이를 붙여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룻기 3장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킬 계획을 추진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절). 나오미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누워 잘 때에 룻을 단장시켜 그 발치에 눕게 합니다. 지금 나오미는 보아스와 비교해 볼 때 전혀 수준이 맞지 않는 룻을 붙여주기 위해 교묘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무를 자입니다. 기업무를 자라는 것은 어떤 가문의 한 남자가 결혼한 후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그의 형제 중에 한 사람이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이어야 하는 율법을 말합니다(신 25:5-10).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 룻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 권리, 남편의 친족이 감당해야 하는 의무를 감당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룻은 주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자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대로 행합니다. 룻은 한 여성으로 매력적인 한 남자에게 끌린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 가운데 친족을 찾아갔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그가 자기의 기업 무를 자임을 확인시킵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절). 이에 보아스는 그녀가 매력적인 젊은 남성에게 끌리지 않은 것을 칭찬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보다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이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고 하면 자기가 당장 기업을 무르겠다고 약속합니다( 절). 보아스는 기업무를 자로서의 마땅한 의무를 인식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자기 곁에 누워있게 합니다. 밤새도록 보아스 곁에 누워있었던 룻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한 여성으로서의 자기 모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은혜를 생각하고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보아사는 새벽 동트기 전에 룻을 보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면 곤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 룻에게 짊어지워 보냅니다. 이번에 나오미는 밤새워서 룻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룻이 한 이야기를 듣고는 안심하면서 기다려 보자고 합니다. 그녀는 보아스가 기업무를 자의 의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룻기 4장
보아스는 이른 아침에 베들레헴 성문에 앉았습니다. 성문은 시장이 펼쳐지기도 했지만 재판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성읍 장로들이 앉아 있습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엘리멜렉의 친족이 지나가는 것이 보이자 보아스는 그를 불러 세웁니다. 보아스는 그에게 룻과 결혼하여 기업무를 자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요구합니다. 처음에 엘리멜렉의 기업을 사 들이라고 할 때는 좋다고 했지만 그 며느리 룻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서 그 자식을 엘리멜렉의 가문에 올리고 그 자식에게 자신이 산 땅을 주어야 한다면 엄청난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절). 그는 물질적인 유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에 보아스는 전날 밤에 룻이 약속한 대로 룻을 아내로 취하여 엘리멜렉의 둘째 말론의 기업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물질적인 손해를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였습니다.
그 기업무를 자가 자기는 못하겠다고 하면서 신을 벗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형제가 기업무르려고 하지 않으면 그이 신발을 벗기고 침을 뱉었습니다(신 25:7-10). 그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이번의 경우에는 형제가 아니었기에 기업무를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사서 돌려주고,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혈통을 잇겠다고 하자 수많은 증인들이 룻과 보아스와 그 자손을 축복합니다. 룻은 야곱의 아내였던 라헬, 레아처럼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합니다( 절). 이방인이 구약교회를 건설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보아스는 희생적인 사랑의 결과로 베들레헴에서 유명해지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유명해진 것입니다. 보아스의 가문은 베레스의 가문처럼 이스라엘에서 번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의 죄악(기업무를 자의 제도를 거부)이 보아스의 자발적인 순종에 의해 보상되어졌습니다.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동네 여인들이 나오미 앞에서 축복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종)으로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요, 노년의 봉양자가 됩니다( 절). 나오미는 그 아이를 받아 양육합니다. 나오미가 경험한 곤경은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한 것인데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실 것임을 보이십니다. 보아스와 룻에게서 태어난 그 아이는 나오미 개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회복하고 봉양할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베레스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그 끝이 다윗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통해 낳은 아들을 엘리멜렉의 가문에 올려야 하는데 자신이 가로챈 것이 아니라 아마도 에벳이 이중가계에 등록되었을 수 있습니다. 룻기가 기록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룻기는 사사기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사사기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으로 인해 이제 이스라엘은 참된 안식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