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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바닷가 동영상코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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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남녘 들길에 바람이 분다.
언덕배기 밭에는 파릇파릇 보리가 자라고, 그 보리밭을
꾸불꾸불 둘러치고 있는 얕은 돌담들이 정겨움 을 더한다.
이윽고 모시 잠방이 차림의 중늙은이 유봉이, 무명치마에 베 적삼을 받쳐입은 딸 소화와,
어깨에 북을 멘 고수 동호를 데리고 보리밭 돌담길을 걸어 내려온다. 고단한 방랑길이지만 그들에게는 '소리'가 있어 그 행로가 외롭지 않다.
아비와 딸이 주거니 받거니 소리를 한다. 진도아리랑이다. 삼거리 황톳길에 다다른 일행은 아예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 소화, 동호 등의 세 주인공이, 생계의 터전이었던 주막거리에서 쫓겨나, 득음을 위해 정처가 따로 없이 방랑하던 중에, 한 시골길을 걷고
있는 장면이다.
'서편제'를 감상했던 사람이라면, 이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보리 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던 그 장면을 좀처럼 잊지 못할
것이다.
무려 5분 여 동안 장면전환 한 번 없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걷는 주인공들의 모습에다 카메라를 고정시켜 두는 것이야 영화예술의
한 기법이라 치더라도, 구절양장 같은 황톳길에다, 끝간데 없이 이어지 는 보리밭, 그리고 그 보리밭을 경계짓는 남도 특유의 돌담들이, 그 대목을
영화 전체를 통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만들어주기에 충 분했던 것이다. 육지에서 연안여객선을 타고 한 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곳,
남해바다에 떠 있는 '청산도'라는 섬이 그 명 장면을 제공 했던 무대다.
남자1
: 그러니까, 그 서편제 주인공들이 저쪽으로 해서 왜 아리랑 부르면서 이리 걸어오잖아. 오정해하고 김명곤이하고….
여자 :
당신도 참, 서편제 봐놓고서 주인공 이름도 모르고... 오정해하고 김명곤이 뭐야. 소화하고 유봉이지.
남자1 :
허허허, 그런가?
우리도 저기 가서 진도 아리랑 부르면서 춤이나 한 바탕 춰볼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여자 :
아이고, 세 사람이 춤추던 데는 그쪽이 아니고
저쪽 삼거리길이네.
남자1 : 그건 그렇고, 야, 저 밭에 보리 자라는 것 좀 봐. 퍼렇게 우거진 것 이 영화에서 본 장면 보다 지금이 훨씬
더 멋지지?
여자 : 벌써 이삭이 팼어! 우리 여기서 사진 한 장만 찍자.
그래서, 영화를 찍었던 청산도의 보리밭길은
이제는 유명한 관광코스 가 되었다. 그 지역 자치단체에서도 아예 그 보리밭길을 '서편제 길' 이라 이름 붙여놓고 외지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밭에다 보리를 파종해서 가꾸고 있는 주민들의 생각은 어떨까?
"참말로 몰라준다-속도 몰라준다-즈그는 잘 상께-관광 많이 와-낚시 질도 하고-지게 지고 댕기제마는 부끄러울 때도 더러
있습니다"
청산도의 청계리 마을에 사는 지용민 할아버지의 생각이 이렇다.
물론 그 섬사람들도 지금은 보리농사에
온통 생계를 매달고 있지는 않다. 이 할아버지가 관광객들을 향해 내던진 '속도 몰라준다'는 원 망의 말_속에는, 지난 시절의 궁핍했던 민중의
애환이 한낱 구경거리 가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섭섭함이 절절히 배여 있다.
보릿고개 밑에서/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서/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황금찬의 '보릿고개'라는 시의 앞 부분이다.
기성세대의 보릿고개 타 령에, "그럼, 다음 주말에는 보릿고개로 등산 가자"고 얘기하는 요즘
아이들에게야 전설처럼 들리겠지만, 3-40년 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민 중에게 보릿고개는 '울며 넘는 박달재'보다, '구름도 쉬어 가는 추풍 령
고개'보다 더욱 힘에 겨운 험산준령(險山峻嶺)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울며 갔다/굶으며 넘었다/어떤 사람들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어의 보릿고개/안 넘을 수 없는 해발 9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하늘은 하나의 보리알/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허기져 풀밭에 누운 시골 소년에게는 보리알 하나가 하늘을 채웠을
것이다.
밀농사 보리농사를 짓던 시절 의 이야기, 그리고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그 한없이 궁핍했던 시절의 얘기를, 아직도 왕성하게 보리농사를 짓고
있는 청산도 노인들로부터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옛날로 치면 바로 지금이, 가을 곡식은 떨어졌고 보리수확은 아직 먼
춘궁기가 아닌가!
청산도의 청계리 노인회관에 십여 명의 노인들이 모여
앉았다.
취재팀이 보리농사 짓던 시절의 얘기를 주문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보리농사에 생계를 의지하던 옛 시절의 얘기들이 중구난방으로 쏟아
져 나오는데.
"소매 다 퍼서-쟁기질하고-소매도 동우로 푸고 장군으로
퍼서-금비가 없어서-바닷가에다 구덕을 만들아."
소매, 장군, 금비, 구덕…도회지 출신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난수표의
암호문자처럼 들릴지 모를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소매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퍼다가 거름으로 밭에 뿌리는 소마, 즉 오 줌을 일컫는
말이고, 장군은 그 소마를 담는 나무로 만든 통이며, 금 비는 돈을 주고 사는 화학비료를 말한다.
당시만 해도 화학비료는 그야말로
금싸라기 같은 '금비'였기 때문에, 다른 방편으로 작물을 살찌울 방법을 궁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바닷물을 비료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남자2 : (지게 등짐 지고 끙끙거리며 밭으로 걸어오며) 아이고
힘들어라.
요렇게 힘들게 바닷물을 짊어져 나를 바에야 차라리 바다에다 보리 를 파종해 부렀으면 좋겄구먼.
남자3 :
자, 자, 지게 이리
받쳐 보씨요이.
남자2 : (지게 내려놓으며) 으이차. 자, 이 물통 조깐 받어 봐.
남자3 :
(물통 받아들고 끙끙대며) 선거 때
고무신하고 비누만 줄 것이 아니 라, 비료나 한 푸대 씩 줬으면 좋겄구먼.
어촌 사람들은 보리밭 한 귀퉁이에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회를 바른 다음, 바닷물을 길어다 채워 넣었다. 그
바닷물이 증발하고 숙성하면 화학비료의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썰물 때 바닷 말 즉 해조류를 캐서 말렸다가 거름으로 쓰기도
했다. 물론 산에서 풀을 베어서 만든 퇴비를 함께 사용했다. 금비, 즉 화학비료를 사다 쓸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농작물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농민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남자2
: (방문 열고
들어가며) 야, 경준아, 방에 장판지 조깐 뜯어내 봐라.
지경준 : 아니, 아부지. 멀쩡한 장판지는 뭣땀새 뜯으라고 그라요?
남자2
: (퉁명스레) 방 구들장을 뜯었다 새로 놓을라고 그라제.
지경준 : 아니, 불도 잘 들이고 방이 따땃한디, 멀쩡한 구들장은 왜 뜯어낼라 고
그란디라우?
남자2 : 앗다, 그 자석 참. 요놈아, 보리농사 짓을라면 구들장을 뜯어내야 할 것 아녀!
지경준 :
보리…농사를…밭에다 짓제,
방바닥에다 짓는 거이 아닐 것인디….방구들을 뭣땀새 뜯으라고 그라는 것인지…
남자2 :
(종이 장판 벗기며) 허허허..
방구들 밑에다가, 애비가 비료를 감춰놨당께, 허허허.
보리를 파종하기 전에, 밭에 밑거름을 줘야 했는데, 뭐니뭐니 해도
보리밭 밑거름으로는 방고래를 긁어낸 재가 최고였다. 당시만 해도 장작보다는 소나무가지나 산에서 갈퀴로 긁어온 솔잎을 땔감으로 땠 기 때문에,
그것들이 불타면서 생긴 재가 구들 밑의 고랑인 방고래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쌓이기 마련이었고, 그 재를 긁어다가 보리밭 에 뿌리면 그 해
보리농사는 풍년을 기약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꼭 불이 잘 들지 않아 방구들을 뜯었던 게 아니라, 보리밭에 줄 거름 을 마련하기 위해 3년마다
한 번씩 일부러 구들을 뜯고 새 구들을 놓 았던 것이다.
음력 9월말이나 10월초, 고구마나 조를 수확하고 난 밭을 쟁기로 갈고, 그 곳에 밀이나 보리를 파종하게
되는데, 그 절차가 또한 간단한 게 아니었다. 굳은 땅을 쟁기질로 갈아엎어 놓으면, 사람들이 괭이나 쇠스랑으로 일일이 흙덩어리를 깨야 했다.
그런 다음, 다시 쟁기질로 두둑을 만들고, 그 위에다 보리씨앗을 뿌리고 나면, 사람들은 괭이로 두둑의 흙을 긁어내려서 씨앗 덮기 작업을 했던
것이다. 밭이야 흙이 잘 바스러지기 때문에 일이 한결 수월했으나, 논에다 밀이나 보리를 가는 경우, 흙덩어리를 괭이로 부스러뜨리는 작업이 여간
힘들고 까 탈스런 게 아니었다.
어쨌든 파종한지 보름쯤이 지나면 연한 보리 싹이 지표를 뚫고 돋아 나기 시작하고, 음력으로 정월달이 되면
제법 보리포기가 자리를 잡 기 시작한다.
(아이들, 보리밭에서 뛰어다니며 떠드는
소리)
남아1 : 야, 내가 연줄
붙잡고 보리밭으로 달려갈 것잉께, 니가 연을 높이 올려봐 잉?
남아2 : 야, 내 연 꼴랑지 누가 짤러부렀어!
남아1 :
(달려가며) 자
,달려간다! 야, 느그들 여그 봐라! 내 연이 젤 높이 올랐제!
남아2 : (달려가다 멈추고) 어, 내 고무신 한 짝 어디 갔지? 야,
보리밭에서 고무신이 벗겨져부렀는디 어디로 가뿔고 없당께!
남아1 : 어, 보리밭 주인 온다. 도망가자!
아이들이 연을
날리겠다고 뒷잔등 보리밭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지 만, 주인은 그다지 크게 나무라지는 않는다. 그 무렵에는 일부러 사 람을 사서라도 보리밭을
밟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보리 밟을 때는-짚새기 신고-옛날에는
짚으로 신을 삼아서.)
청산도는 남쪽의 해안지방이라 비교적 따뜻한 편이지만, 그래도 설날 을 전후해서는 동장군이 한바탕
기세를 올린다. 햇볕이 드는 양지쪽 이야 땅이 얼었다가도 금방 풀리지만, 음지쪽은 땅이 얼면서 얼음 층 아래쪽에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보리밭을
밟아주지 않으면 뿌리가 들떠서 말라죽고 만다. 따라서 보리밭은 아무 데나 밟는 게 아니라, 지표가 얼어붙은 음지쪽의 이랑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이면 어김없이 보리밭을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었다.
(꽹과리 마구 치는
소리)
:
(꽹과리 치며) 훠이! 훠이! 야, 이놈의 도야지야! 저리 가! 훠이! 훠이! 이놈의 멧도야지! 저리 안 가!
겨울에 이놈이--주둥이로 갈아엎어-고구마 못 묵제 보리 못
묵제....
멧돼지가 산에서 내려와 보리밭을 헤집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보리 를 파종하기 전에 그 자리에 고구마를
심었었는데, 땅 속 어딘가에 묻혀있을 바로 그 고구마 이삭을 찾아먹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귓불이 얼얼해지는 찬바람을 감내하면서, 멧돼지를
쫓기 위 해서 보리밭으로 나가 꽹과리를 쳐대야만 했다.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 들려오는 소리)
보릿대 마디가 둘 셋씩 올라오고, 드디어 이삭이 팬다.
밀은 보리보다 조금씩 생장이
더디기 때문에, 보리가 패고도 한참 있 다가 이삭을 내민다. 그 때쯤이면, 학교에 가거나, 소 먹이러 가는 아이들이 보리밭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남아1 : (걸어가다가) 야, 춘식아, 누구 소리가 더 멋지게 나는지 내기할까?
남아2 :
보리피리 말이여? 그것이라면 내가
도사제.
남아1 : 좋아. 내가 몬침 불어보께 응?
(한 사람 보리 피리 불고, 이어서 따라서
부는 소리)
보리이삭 부분을 붙잡고 당겨 올리면 보릿대가 뽑혀 나오는데, 끝 부 분을 잘근잘근 씹어서 부드럽게 만든 다음
입으로 불면 근사한 피리 소리가 났다. 시인 한하운도 어린 시절 보리밭 언덕에 올라 보리피리 를 즐겨 불었던 모양이다.
보리피리
불며/봄 언덕/고향이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어릴 때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눈물의 언덕을 지나 필 닐니리
한센병 즉 나병을 천형으로 가슴에
안고 소록도에 갇혀 살았던 시인 에게, 어린 시절 보리피리 불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 봄철이야말로 잔인한 계절이었을
것이다.
(여자, 보리밭 헤집고 걸어가는
소리)
여자1 : (보리 헤치며 걸어가며) 아이고, 이놈의 귀리는 어째서
이렇게 극성 인지 몰르겄네.
여자2 :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성님, 성님네 밭에도 귀리가 많소? 우리 밭에 는 보리 반 귀리
반이랑께라우.
여자1 : 말도 말어. 작년에 씨도 없이 뽑아냈는디.. 이놈의 귀리가 어디서 이렇게 날어왔는지 몰르겄당께.
여자2 :
우리는
금년 보리농사 포기해야겄소야. 귀리는 뽑아내면 되겄지마는 아, 이놈의 깻묵이 어떻게나 징하게 퍼져 있는지.
여자1
: 지난번에 왔을 때는 우리
밭에 깻묵이 하나도 없었는디 오늘 보니께 여그 저그 퍼져 있는 것이, 동상네 밭에서 옮겨온 모냥인디?
이 사람들이 '깻묵'이라고 하는 것은 보리이삭이 까맣게 병드는 깜부 기병을 이르는 말이다.
심한 경우에는
그 깜부기병이 보리밭 전체로 퍼져나가서 아예 보리농사를 망쳐버릴 때도 있었다. 보리밭의 불청객 중 또 하나가 귀리였다. 귀리는 처음에는 보리와
구분이 되지 않아서 솎아낼 수가 없다. 보리가 팰 무렵이면 보리보다 한두 뼘 정도 더 높 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때 귀리를 뽑아내는 작업을
하게되는 것이 다. 만일 귀리를 뽑지 않는 경우, 이듬해 농사 때에는 온통 밭 전체 가 귀리 밭이 돼버리기 때문에, 귀찮더라도 이삭이 익기 전에
솎아 주어야 했다.
남자4 : (걸어가다) 아이고, 최영감네 밭에는 뭔 놈의 귀리가 저렇게 징하게 많다냐?
남자5 :
글쎄 말이여. 그 집
며느리 게으른 건 알어 줘야겄구먼, 쯧쯧.
깜부기야 병의 일종이니 누구를 흉볼 수가 없지만, 귀리가 성한 밭을 지날
때면, 사람들은 덮어놓고 그 밭 안주인의 게으름을 탓했다. 하필이면 귀리가 보리보다 키가 월등하게 컸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라도 그냥 방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에농사를 짓는 마을의 처녀 총각들이 뽕밭에서 사랑을 나눈다면, 보리농사를 짓는 마을에서는
청춘 남녀의 은밀한 역사가 보리밭에서 이루어진다.
지경준
: (방문 두드리며)(작은 소리) 순심아, 순심이 있어?
순심이 :
(방문 열고)
누구요? 응? 경준이 아녀? 우리 아부지 알면 어짤라고 이 밤중에 집으로 찾어와서 이래?
지경준 :
이따가 달이 쩌그 팽나무 꼭대기에
솟아올랐을 때, 뒷잔등 보리밭에 서 만나장께.
순심이 : 알었어. 알었응께 들키기 전에 얼릉 가.
지경준 :
꼭 나와야 해 응?
순심이
: 알었당께 그라네.
마땅히 만나서 정을 나눌 장소가 따로 없던 시절, 그들에게 보리밭은 근사한 데이트 장소였다. 그런데,
하늘에 뜬 달을 빼놓고는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그 은밀한 데이트 역시 비밀이 될 수는 없었다.
지나가던
어른들일지라도 보리밭에서 이루어지는 처녀총각의 밀회를 일부러 방해하지는 않았으나,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뉘 집 아들딸이라는 것쯤이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이튿날 이면 아무개와 아무개가 연애를 걸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돼 있었다.
청계리 마을의 지용민 할아버지도,
소싯적에 보리밭에서 동네처녀와 연애를 하다 들켜 난감한 지경을 경험한 적이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어떤
때는 밭주인이 귀리를 뽑으러 밭에 갔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우도 있었다.
여자1 (보리밭 헤치고 걸어가다가) 어어? 그거 참 요상한
일이네이. 어째서 보리밭 한가운데 이렇게 보리가 쓰러져서 뭉개졌으까? 멧도야지가 여그서 자고 갔을 리는 없을 것이고, 틀림없이 사람의
짓인디…
보릿고개란, 지난 해 가을에 거두었던 묵은 곡식은 동이 나고, 아직
보리는 덜 여물어서, 끼니걱정을 해야 하는 춘궁기를 일컫는 말이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지금 이 시기가 바로 옛날로 치면 보릿고개인 셈이다.
그렇다면 청산도 주민들은 이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겼을까?
(바닷가, 파도 소리)
여자2 :
(바위에서 조개
따며) 성님, 보리쌀 있으면 서너 됫박만 꿔주실라우?
여자1 : 우리 집 보리쌀 떨어진 지가 언제라고.
여자2 :
그라면 뭣으로 묵구
살었소?
여자1 : 밀가루 조깐 있는 놈 갖고 나물죽도 쒀 묵고, 쑥 캐다가 버무려 묵 고, 굶어죽지 않을라고 안 한 짓거리가
없당께.
여자2 : 보리 걷어들일라면 보름은 더 있어야 할 것인디, 식구는 많고 큰일 이네….
그러나 그 시절 똑같이
보릿고개를 겪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바닷가에 살았기 때문에, 뭍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여러모로 유리했다. 썰물 때 바닷가에 나가면 조개며 해초 같은
먹을거리가 널려있었던 것이다.
"갯바탕에 가서 톳도 베다가 묵꼬-쑥도
뜯어다 묵고-둥그레미-보쌀 매이로 끓여서-담아놓고-시방 어치케 할 수가 없어요."
그 당시 보릿고개 넘던 사연들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고 그 들은 얘기한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보리가 다 익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놀짱놀짱 안 하요--풋보리 베어서 홀테에 훑어-물 붓고 쪄먹어-그 아홉 그릇을 다 챌라고 얼마나 하고
살았지요."
다 익기도 전에 풋보리를 베어다가 홀테로 흝어서 알곡를 낸 다음에, 멧돌에 갈아서 죽을 쑤어 먹었다는
얘기다. 일곱 식구 아홉 식구 열 식구가 보통이었으니, 그들의 끼니를 마련해야 했던 주부들의 애환이 오죽했겠는가.
(멀리서 뻐꾸기 소리,사람들, 보리 베는
소리)
드디어 보리를
베는 날. 달리 말하자면 적어도 이때부터는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마을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도 더 이상 배고프다고 하소연하는
서글픈 소리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남자2 :
(보릿단 날라다 지게에 얹고) 으이차. 자 거그 보릿단 빨리빨리 갖고 와! 요놈 다 져 나를라면
오능 하루해가 빠듯하겄는디.
여자1 : (보릿단 갖다 주며) 조심조심 지고 가야 쓰겄소. 보리가 원체 잘 말 라서 알곡이 쏟아져뿔 것 겉어서
걱정이랑께.
남자2 : 자, 지게 지고 일어날 것잉께 뒤에서 밀어봐!
여자1 :
알었소. 밀 것잉께, 힘 주씨요이.
남자2 : 걱정말고
밀기나 해. (지게 지고 일어서며) 으이쌰!(지고 걸어가며) 아이고, 요놈의 까시락이 어째서 이렇게 모가지로 달라붙는다냐!
여보! 여그
모가지에 보리까시락 조깐 치워줘 봐!
여자1 : (벼이삭 젖히며) 잠깐만 지달례 보씨요이. 안 되겄구먼. 내 수건을 벗어서 목에다 받쳐
주께라우.
"밭이 많이 떨어져 있어-까시락이 떨어져서-속옷
속으로 들어가-안 털어져.....
벗어서 뜯어내야 옷을 입어진다 이것이여!"
보리를 수확할 때 가장 힘든 일은, 멀리 떨어진
밭에서 집으로 보릿 단을 져 나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보릿단을 져 나를 때에는, 다른 작물을 운반할 때보다 훨씬 더 귀찮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 곳 청산도 사람들이 '까시락'이라고 부르는, 보리이삭에 붙어있는 까끄 라기였다. 등짐을 하다가 보리까끄라기가 목 언저리를 스치기만
해도 벌겋게 자국이 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보리까끄라기는 미세한 톱 니 같은 것이 한 쪽 방향으로 나 있어서, 털어도 잘 떨어지지 않고
자꾸만 옷 속으로 파고들어서 사람들을 귀찮게 만들었다.
남자2 :
(가시가 목구멍에 걸려서) 콜록, 콜록…카악!
여자1 :
(밥 먹다 숟가락
놓고) 아니, 점심 잡숫다 말고 뭔 놈의 기침을 그렇 게 해싼다우?
남자2 : (캑캑거리고) 아이고, 밭에서 상추 뜯어올 때 보리 까시락이
붙어있 었든 모냥이여.
여자1 : 아이고, 어째사 쓰까. 물에다 깨끗하게 씻쳤는디…
보리를 탈곡할 때면 보리
까끄라기가 사방으로 날아다니기 때문에, 채소에 붙어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배추나 상추에 고놈 이 붙어있는 줄 모르고 먹었다가는
여지없이 목구멍에 걸리기 때문에 한동안 고생할 각오를 해야 했다.
집으로 운반된 보릿단은 다시 풀어헤쳐져서, 마당에 보리이삭 부분이 서로
마주하도록 정렬해서 늘어놓는다. 나중에야 탈곡기로 탈곡을 했 지만 그 이전에는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남자3 :
자, 도리깨질 시작해
보드라고! 아니, 큰 마을 최영감 님이 도리깨 질 해주러 오기로 했는데 어째서 아직 안 나타나는지 몰르겄네.
남자6 :
(걸어가서) 우리끼리
몬침 하자고. 자, 자네는 저쪽으로 가서 나하고 마주보고 서보랑께.
여자2 : 우리 여자들도 한바탕 띠디레봅시다.
여자3 :
좋제. 이래봬도
내가 순심이 에미보담은 잘할 수 있제.
여자2 : 참말이여?
여자3 : 그라먼. 내가 이래봬도 우리 집 보리하고 서숙을 혼자서 도리깨질 해서
다 털어낸 사람이여.
최영감 : (들어오며) 자, 도리깨 품팔러 왔소.
남자3 :
아이고, 최영감 님이 인자 오시네.
남자6 : 그라먼
시작해봅시다! (여럿이서 도리깨질하는 소리)
쉬운 것 같아도 초보자들이 금방 따라할 수 없는
것이 또 도리깨질이 었다.
능숙한 사람이 작업하는 모양을 보면, 도리깨가 공중에 수평으 로 멈췄다가 내려오곤 하는데, 초보자의 경우는 '도리깻
열'이라고 부르는 휘추리(곧게 뻗은 가늘고 긴 나뭇가지)가 곤두선 채로 방아를 찧듯이 수직으로 땅바닥에 도끼질을 하기 십상이었다.
청산도의 청계리 노인들에게 옛 시절 도리깨질을 할 때 했던 소리를 들려달라고 했다. 노인정 방안에 둘러앉은 채로 그들은 어깨를 들먹
거리며 도리깨질 흉내를 냈다.
"에헤루 방애야/이 방애가 누 방애냐-쳐라, 쳐라-내라, 내라-휫휫휫"
도리깨질 장단에 맞춰 방아타령을 한다. 왜 하필 방아타령일까? 탈곡 을 하거나 곡식을 찧는 도구가 방아다. 도리깨야말로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방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도리깨질을 할 때 방아 타령은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인 것이다.
이들이 도리깨질을 하면서 내는 '쳐라,
쳐라' 혹은 '내라, 내라'하는 소리는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알곡이 다 털린 보릿대는 여러 사람이 도리깨질을 해서 밖으로 밀어내야 하고,
아직 털리지 않는 보 릿대는 한가운데로 쳐 넣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들의 '쳐라, 쳐라'나 '내라, 내라'는 상대방에게 내리는 작업지시인
셈이다.
도리깨질은 주로 남자들이 했지만 가끔은 여자들이 거들기도 했다.
"여자들하고-남자들은 남자들대로-막 그라고 때리고 그랬제라우."
노인정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은,
할아버지들이 들려주는 도리깨질 소 리가 영 맘에 안 찬다고 했다.
그렇다면 할머니들의 소리를 들어보기로 하자.
"에헤루 방애-이 방아가 누
방아냐-내라내라-(웃음소리)"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마당 가득 쌓인 보리를 순전히 수작업으로 두드려서 털어 내야하는
그 노역을 실제로 한다면, 한가롭게 웃음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도리깨질이 끝나면 알곡을 가마니에 담아야 하는데, 껍질이며 지푸라 기며
까끄라기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알곡만 따로 선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여자2
: (바가지로 곡식 담아 멍석에 떨어뜨리며) 아이고, 아까만
해도 바람 이 솔솔 잘 불더니…
여자3 : (곡식 떨어뜨리며) 글쎄 말이여. 이래 갖고 어디 저물기 전에 곡식 다 들이겄어?
여자2
: 순심이 아부지 보고, 이 덕석하고 우거지 곡식을 조깐, 쩌어그 뒷잔 등까지 짊어져다 주래야 쓰겄구먼.
도리깨로 털어낸
곡식을 삼태기에 담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들었다가 멍석 위에 떨어뜨리면, 지푸라기 따위는 바람에 날려가고 알곡만 따 로 떨어져 쌓이게 된다.
청산도 사람들은 그것을 '곡식을 바람에 들 인다'고 얘기했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주면 일이 한결 수월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멍석 째로
짊어지고 높은 지대로 옮겨가야 했다.
최영감 : (비틀거리며 걷는다)(취한 목소리로 ) 도라지,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딸꾹질) 어이구 취한다.
한편, 품팔이를 하러 왔던 이웃마을 최영감은
탈곡하는 집에서 얻어 마신 막걸리에 거나하게 취한 채, 자신의 도리깨를 어깨에 걸머지고 달밤에 산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는데.
최영감
: (방문 열고 뛰어들어가며)(숨 헐떡거리며) 할멈, 하, 할멈….
할머니 : 아니, 영감, 어째서 그라요. 음마, 허리띠는 어따 내뿔고 바지춤을
거머쥐고 이렇게…
최영감 : (한숨쉬고) 자칫했으면 할멈을 영 못 볼 뻔 했당께.
할머니 :
시방 그거이 뭔 소리다요? 아니, 도리깨질하러
간 양반이 도리깨는 엇다 내뿔고 빈손으로 달려와서 이러는지 몰르겄네.
최영감 :
시방 도리깨가 문제여? 쩌그 산길 걸어오다가 헛것을 만나서
죽을 뻔 했당께.
할머니 : 예? 귀신, 아니 도깨비를 만났다, 이 말이오?
최영감 :
그래. 아, 고놈이 나보고 씨름을 하자드라고. 그래서
왼발로 탁 걸 어서 짜빠뜨렸는디, 아, 한번 더 하자는 것이여. 아무리 자빠뜨려도 자꾸 일어나서 한 번만 더 붙자고 달라붙드랑께.
할머니
: 아이고메, 그래서 어쨌소?
최영감 : 그래서 호리띠를 풀어서 고놈의 도깨비를 나무에다 꽉 붙들어 매놓 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려와부렀당께.
그런데, 다음날 낮에 가보니, 도깨비하고
씨름하던 자리 바로 옆 소 나무에 도리깨가 묶여있더라는 얘기다.
도리깨에 얽힌 그 비슷한 얘기들이 다른 지방에서도 간혹 전해져 내려오는 걸로
봐서, 예전엔 꽤 떨어진 이웃마을까지 도리깨 품을 팔러 가거나, 품앗이를 다니는 일 이 흔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밀은 어떻게 탈곡을 했을까?
청산도 노인들은 보리완 달리, 밀은 도리깨를 쳐서 탈곡하지 않고 홀테로 일일이 이삭을 훑어냈다고 얘기한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옛날에는 밀대 그것이-중요해-
풍채를 치고
우장도 엮고-엮어서 여름 에는 손님들하고-모굿불 피워놓고....."
도리깨로 내려쳐 버리면 짚이 망가져 버리기 때문에, 밀짚을
다른 데 에 이용하기 위해서 일일이 홀테로 훑어냈다는 얘기다. 이삭을 털어 낸 밀짚으로, 비올 때 쓰는 우장도 만들고, 깔고 앉을 거적도 만들
고, 이엉으로 엮어 지붕도 덮고, 밀짚모자를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자,
이제 밀과 보리를 수확했으니 그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차례다.
(새벽, 첫닭 우는
소리)
여자1 : (방문열고
나오며) 으하암- (하품)
할머니 : (방안에서) 벌써 일어나는 것이여?
여자1 :
예. 첫닭 울었응께 보리 앉혀서
삶어야지라우.
아침밥을 짓기 위해서는 첫닭이 우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했다고 청 산도 할머니들은 얘기한다.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야 했을까?
"첫닭 울고 나면 일어나-보리쌀 찍어서-뜨물
받아놓고-뜨물 폭폭 끓 여서-그것이 참 만나-그래서 먹고살았어요"
잘 못 알아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겉보리를 절구통에 넣고 절구질을 한다. 절구질은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초벌방아를 찧은 다음에 물에 씻고 나서 다시 한번 절구 질로 껍질을 벗긴다.
절구방아 질을 두 번 혹은 세 번을 한 다음에는, 물로 씻게 되는데, 이 때, 나오는 뜨물을 버려서는 안
된다. 어쨌든 씻은 보리를 솥에 넣고 삶는데, 다 삶았다고 해서 보리밥 짓는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보리를 삶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 삶은 보리는 소쿠리에 담아 처마 밑에 걸어두고, 거기서 밥 지을 양만큼만 퍼서 다시 물을 붓고 안쳐서 밥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생보리를 솥에 넣고 바로 물을 부어 밥을 했던 게 아니고, 일차적으로 한 번 삶아낸 다음에, 그 삶은 보리를 다시
안쳐서 밥을 지었던 것이다.
"첨에는 겉보리를 디딜방아-막
찧어-재벌로 또 벗겨-쌀하고 조깐씩 넣고-솥에서 탁탁 쳐-떡밥-진짜제 그것은 하하하."
그렇게 공력을 들여 밥을 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보리밥은, 요즘 도 시에서 파는 보리밥과는 달리, 색깔도 훨씬 희고 찰기도 있었다.
물론 그 찰기 있는 보리밥은 어머니
혹은 며느리들의 피땀으로 지어 진 것이었다. 그러나, 밥짓는 데 들이는 고생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지만, 식구는 많은데 양식이 모자랄 때의
고통은 참기 어렵더 라고, 청산도 할머니들은 얘기하다.
"거기다가
고구마를 넣고...톳도-가포래도 넣어서 해묵고 쑥밥도 해묵꼬 그렇게 먹고 살았더라요"
양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보리밥 위에다 고구마를 깎아 올렸다가 주걱
으로 섞어 양을 늘리거나, 바닷가에서 나는 톳이나 파래를 섞어 부피 를 늘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남아1 :
(숟가락으로 빈 그릇 긁으며) 엄니, 배고파, 밥 더 줘.
남아2 :
나도.
양식은 모자란데
아이들은 또 왜 그렇게 많았던지.
무쇠라도 소화시 킬 한창 나이에 다 채우지도 못한 보리밥 한 그릇을 먹고 배부르다 할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1 : 쪼깐만 지달려라 이. 엄니가 금방 뜨물 끓여 갖고 올 것잉께.
그래서 보리뜨물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밥을 퍼낸 솥에다 보리뜨 물을 붓고 끓여서 아이들 밥그릇에 퍼 담아주면, 아이들은 그 뜨물로 덜 가신 허기를 채웠던
것이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아이들은 학교로 가고 어른들은 들이나 산으로 일하러 나간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가지고 가는 점심도시락도 가
난한 집 아이의 경우 언제나 꽁보리밥이다.
"옛날에는 인자 보리밥
한데다 쌀 한 주먹-밥그릇에 담아-누가 보까 싶어 쌀 조깐 얹어서-벤또 담아주고...그랬제라우"
아이들이야 그렇게 싸보냈으니
학교에서 점심을 먹으면 될 것이고, 어른들은 일터에서 돌아와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되는데, 아침에 해서 소쿠리에 담아 처마 밑에 매달아둔 식은
밥이 어른들의 점심이었다. 하지만 식은 꽁보리밥일지라도 된장에 풋고추만 있으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아침에 인자 밥을 넉넉히 해서 바구니에 퍼서-포리가 옥작옥작-제비 똥도 깔례놓고-
그래도
안 묵을 수가
있어야제, 다 묵제..."
점심을 먹으려고 처마 밑에 매달아 두었던 밥 소쿠리를 내려보면 식 은 보리밥 거죽 위에는 파리가
까맣게 붙어 있었다. 더러는 제비가 제 집을 드나들면서 싼 제비 똥이 얹혀있기도 했다. 물론 식은 밥의 거죽을 한 꺼풀 걷어내고 식구들 밥을
푼다. 그러다 밥이 모자라면, 한쪽으로 젖혀두었던 파리똥 투성이의 그것들을 결국은 다 먹게 되더 라는 얘기다.
(주룩주룩 비 내리는 소리)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모처럼 집안에 들어앉아 있으려니 입이 궁금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아1 : (부엌문 열고) 엄니, 우리 보리 볶아 묵자.
남아2 :
아니여, 밀이 더 맛있어. 밀 볶아 묵었으면
좋겄는디…
여자1 : 아, 점심 묵은지 얼마나 됐다고 주전부리여, 주전부리가!
그러나 어머니는 결국 아이들 성화를
이겨내지 못한다. 겉보리나 밀 을 한 됫박쯤 퍼다가 사카린 물을 부어 촉촉하게 갠 다음에, 솥뚜껑 을 뒤집어놓고 불을 때면 달고도 맛난
간식거리가 되었다.
어떤 아이들은 산에 소를 먹이러 갈 때, 집안에서 보리와 사카린을 훔쳐갖고 가서, 산에다 양철판을 걸어놓고 끼리끼리
어울려 볶아먹기 도 했다고 한다.
"산에 소를 뜯기러
갈 때 -양철
가지고-볶아서먹고-없으니까는 글로 먹고 산거여~"
우리나라에서 3-40년 전의
민중생활사를 얘기할 때, 거의 빠짐없이 거론되는 것이 바로 '가난'이다. 그리고 그 가난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 말이 바로 '보릿고개'다.
우리가
청산도에서 만난 그 사람들이 특 별나게 더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쌀 농사를 조까 씩 지었제마는-늙은 시어머니 시아버지 떠주고-생쌀 을 씹어서 뜨물로 만들어-젖 없는 사람들 많았으니까-뭘 묵어야
어미 가 젖이 나오지."
농어촌의 가난한 집에 태어난 상당수의 중 장년층이, 험한 보릿고개 를 그처럼 힘겹게 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고단한 세월을 이겨 나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작은 승리를 일궈낸 사람들이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든지 라면을
끓여먹으면 됐을 것 아니냐고 항변 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아버지 세대의 가난타령은 이제 더 이상 교훈 이 되지 못한다.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이, 배고픔을 참고 이겨낸 다는 의미로 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들여 살을 뺀다는 의미 로 통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 풍요의
시대에도, 보릿고개를 극복 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시절의 인내와 의지만은 여전히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까.
소화 일행이 소리를 찾아가는 길에 지났던
그 보리밭에는 지금 연초 록 보리이삭이 패어나고 있다.
혹 관광 삼아 그곳에 가더라도, 파란 보리밭과 정겨운 돌담길이 엮어내는 풍광에만 취하다
돌아올 게 아니 라, 우리들이나 우리들의 부모들이 운명처럼 넘어야 했던 보릿고개에 얽힌 사연도 한번쯤 더듬어볼 일이다.
2002년 봄,
남해안 청산도에는 밀과 보리가 자란다.
위 글은 4월 7일 KBS-1라디오 "이제는 그리운 사람들"에 방송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