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 전, 후편 - 이은상詩 - 김동진曲 - 테너 이인범外
노산 (鷺山) 이은상 (李殷相.1903~1982)
-가고파-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인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젖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던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 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1932. 1. 5................
노산 이은상
가고파
이은상 작사. 10절의 가사
<가고파〉의 바다는 노산이 태어나고 살았던 마산 앞바다 합포만으로,
이 시는 1932년 그가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할 때 씌어졌고,
그 다음해에 김동진이 평양 숭실전문대 문과에서 양주동에게 이 시를 배우면서 악상이 떠올라 단숨에 4장까지 작곡을 했다.
40년 후인 1973년에 나머지 6장을 완성하였다.
♣ 가고파 전, 후편 ♣ 이은상(李殷相) 詩 - 김동진 (金東振) 曲 - 테너 이인범(李仁範) 外
마산 무학산에서 ~ 마산 앞바다 가고파 (전편)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욕지도
가고파 (후편)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거이랑 달음질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 옛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녀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없는 몸이
그 바다 물 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키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샌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까나 살까나
돌아가 알몸으로 깨끗이 깨끗이
테너 이인범 (최초로 이곡을 노래함)
욕지도
이인범 (李仁範) (1914~1974)
평안북도 용1천에서 장로교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양 숭실 학교를 졸업 하고 193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음악과 없는 음악부에서 음악을 연구하며 연희전문음악대의 일원으로 봄,가을로 2회씩 전국을 순연 하였다.
졸업후 일본 고등음악학교에 입학, 기노시다(木下保)를 사사 하였고, 1939년 10월에 열린 전일본 성악 콩쿨대회에서 수석으로 입선되어 한국 성악의 기염을 토하였다.
1941년 졸업후 동경에서 독창회를 가졌고 1943년 5월에 귀국독창회를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열었다. 광복후 한국 오페라계에 투신, 현제명(玄濟明)작곡의 <춘향전>을 비롯하여 푸치니의 <토스카>,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지제의 <카르멘> 베르디의 <오셀로> 등에 주역으로 출연 하였다.
한국 오페라단 단장을 역임 하였으며 1953년 불의의 화상을 크게 입어 실의에 찬 생활을 계속 하다가 서울 대학교 음악대학, 이화 여자 대학교 음악대학 등을 거쳐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학장까지 지냈다.
1956년 5월 8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재기 독창회 (반주 : 부인 李貞子)를 성공리에 마쳤고, 2년후인 1958년 10월 15일 또다시 독창회를 열어 건재함을 과시 하였다. 피아니스트 이방숙(연세대 교수)의 선친이기도 한 ,1950년대 성악계의 대표적인 테너였던 이인범씨는 작곡가 김동진씨의 작품을 널리 알렸던 가곡 초창기 성악계의 선구자로 많이 거론 되었다.
욕지도
***선생이여, 고이 잠드소서! ***
故이인범 교수의 영전에 - 나운영
우리나라의 명 테너요,
음악계의 거성인 이인범 선생은 이제 가시고 말았다.
이베부터 다시는 그의 육성을 들을수 없게 되었으니 이 가을의 적막감을 더욱 느끼게 하는구나.
선생께서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에 이유선,김성태, 김생려, 정희석 제씨와 함께
현재명 박사의 지도아래 자라나 마침내 1939년 (전일본음악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일본 사람들을 물리치고 당당 수석으로 입상 하였으니
그의 실력은 이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증명 되었다고 말 할수 있으리라.
선생은 참으로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 였으니
선생이 1941년 일본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1942년부터 현재명 박사가 주재하던 <경성후생 실내악단>의 주동멤버가 되어
삼천리 방방곡은 물론 만주까지 순회 하면서
"가곡파.내 마음. 희망의 나라로, 고향생각, 산들바람"등 우리 가곡과
수 많은 이타리 오페라의 아리아를 불렀을때
선생의 인기는 김천애씨와 함게 절정에 달했었으니
이제 선생이 떠나신 지금 메어지는 가슴은 더욱 아플뿐...
8. 15 해방후 서울 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6. 25사변중에는 김생려, 김천애씨와 함께 <해군 정훈 음악대>에서 여전히 연주 활동을 하시다가
1953년 얼굴에 불의의 중화상을 입어 선생의 치명상에 대해 동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때
선생은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1956년에 <재기 독창회>를 가져 팬들의 기도와 성원에 보답 했었으니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랴~!
뿐만 아니라
1960년부터 모교인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수차례 독창회와 오페라 주연, 레코드 취입등 눈부신 활동을 계속 했었으니
그야말로 우리나라에 있어서 가장 수명이 긴 연주가 이셨다.
그러나 불행 하게도 수년 전부터 건강을 해쳐 오로지 음악대학 학장으로서
대학 오페라 운동에만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라트라비아타"와
특히 우리나라 초연인 모짜르트 작곡 "마적"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나
불행 하게도 "마적" 초연의 날에는 참석초차 못하시고
병원 침대에서 병마와 싸우게 되었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돌아 보건대 연세음악은 이 해로 55주년을 맞이하게 되며
1918년 김영환 선생이 음악과 없는 음악부 교수로 취임 했고,
1928년에 현제명 박사가 이어받은 이후 박태준 박사의 바톤을 다시 선생이 이어받아서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했으니
선생의 공로와 업적은 이 하나 만으로도 높이 찬양받을 만한일이 어찌 아니랴?
다만 음악대학 신축에 대한 꿈의 실현을 보지 못하시고 영면 하셨으니
이 정신적 고민이 그이 건강을 더욱 해쳤던 것이나 아닐까?
우리 나라를 대표할수 있는 성악가, 우리 음악계의 또 하나의 별을 우리는 잃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성경 말씀대로
후학들은 선생이 남기고 가신 뜻을 받들어 나아갈 것이니
선생이여 고이 잠드소서...
1973, 9, 17 연세 춘추>
마산 저도 용두산 정상에서 내려본 남해바다
***가고파의 배경과 해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노래의 첫구절만 들어도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가슴이 시려오며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는
작곡가 김동진님이 20代에 작곡하여 발표한 <가고파>는
그만큼 우리가 이 노래에 친숙해 있고 이 노래에 정이 들어 있는것일 테다.
이 노래가 이렇게 널리 알려지고 사랑을 받게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필시 있었으리라.
故 테너 이인범씨가 일제 시대 <전 일본 성악 콩쿨>에서 우승하여
전 일본 도시를 순회 공연을 할때 어느 공연장에서나 그 당시 신곡으로 처음 선을 보인 이곡을
레파토리에 꼭 넣어 부르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고 우리의 민족혼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그래서 이 노래의 작곡자 김동진씨는 이인범씨 때문에 자기 노래가 유명 해지고
자기가 이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음으로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분은 바로 이 분이라고
故이인범씨 장례식장에서 弔辭를 읽을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고 한다.
<가고파>는 이은상이 실제 고향인 경남 마산 앞바다를 그리며 지은 노래이다.
파랗고 잔잔한 고향 마산항 바닷물과 그 위를 날고 있는 물새들
그리고 같이 뛰어 놀던 어릴적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운 향수를 구구절절 그려내고 있다.
鷺山 李殷相의 10절의 시에 金東振이 곡을 붙인 通節形式의 이 노래는
1933년 김동진씨가 평양숭실전문학교에 다니던 학생시절에 작곡, 광복후 널리 알려졌다.
한국 가곡의 형태가 아직 정립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던 당시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타는 심정을 낭만적인 상념에 기대어 잘 그려내고 있는 시가 지닌
무한한 향수를 잘 표현해낸 이곡은 노랫말과 선율이 맑고 아름다워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불리워지는 한국가곡 가운데 하나이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젊은 시절의 김동진씨가 작곡한 이 가곡은
한국 가곡의 역사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통영 앞바다에서
김동진씨가 20代 시절에 작곡하여 발표한 "가고파"가 이렇게 많이 불리고 사랑 받는것에 비해
환갑날에 내놓은 제2의 가고파인 "가고파 후편"은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것 같다.
그것은 "가고파 後篇이 나온 1970년대만 하여도 우리 나라 문화, 음악등이 다양하고 복잡해 졌기 때문에
가곡 말고도 다른 노래. 다른 문화등 즐길만한 것이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김동진씨가 경희대학고 音大 교수로 재직할 때 그 분으로부터 직접 배운 한 음악도의 말에 의하면
김동진씨가 처음 이은상씨의 "가고파"라는 시를 가지고 작곡을 하려 할때 그 시가 너무 길어서
먼저 앞부분 절반만을 가지고 곡을 만들고 나머지 부분은 또 다른곡으로 바로 이어서 작곡할 계획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고파"가 나온지 얼마 안되어 그 곡이 이인범씨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고 유명해지니까
김동진씨로서는 나머지 詩로 제2의 곡을 만드는것이 더 어려워 졌다고 한다.
먼저 나온 곡과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먼저 곡보다 더 좋은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 했기에 마음의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악상이 떠 오를때마다 메모해 놓았던 것을 찢어버리고 다시 쓰기를 60세가 되기까지 되풀이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김동진씨는 1973년 노산 기념 사업회에서 이은상 가곡의 밤을 준비함에 이르러
그때까지 10편 가운데 나머지 후편 6편을 작곡 하기로 결심하고 41년 전의 영광을 되살리려
2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모두 음률로 옮겼다고 한다.
전, 후편을 모두 이어서 부르면 12분쯤 걸리는데.
후편 첫부분은 전편과 전혀 다른 주제가 나오고
뒷 부분은 다시 전편과 같은 리듬으로 구성되어
전체가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통영 앞바다에서
가고파 (전후편) - 김화용
https://www.youtube.com/watch?v=K6DqbyM98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