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란을 위한, 내란의 정치 ◈
퀴즈 하나.
다음 중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대통령은?
⓵김영삼 ⓶김대중 ⓷전두환 ⓸노무현.
정답은 ⓷번, 전두환 대통령이지요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을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를 무려 22번 사용했어요
연설문만 보면 그가 최초의 문민 대통령 같았지요
그의 뒤를 이은 노태우 대통령 역시 ‘민주주의’를 21번 언급해,
두 사람이 민주주의를 자주 언급한 대통령으로 기록돼 있어요
‘민주 투사’ 출신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6번,
김대중 대통령은 11번 언급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3번 언급하는 데 그쳤지요
레토릭은 종종 현실의 역설을 드러내고 있어요
사람들은 말을 통해 아직 실현되지 않은 희망이나
약점을 보완하려 하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이재명도 계엄 1주년 연설에서
가장 정의롭지 못한 정권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했다며,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구현’을 예로 들었어요
맞는 말이지요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권력을 이용하여 수십억 또는 수백억 원의 재산을
긁어모은 정치인이 있고” 운운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道)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소득 격차를 비롯한 계층 간 격차를 좁히기 위해...
개선을 강구하겠다”고 했어요
전두환 대통령은 훗날 수백억 원대 비자금 혐의로 법정에 섰고,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아들에게 ‘무슨 도’ 국회의원 공천을 주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사회 양극화로 비판받았지요
같은 잣대로 이재명 정권 들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단어는 ‘내란’이지요
취임사부터 ‘내란 재발 방지’를 말한 대통령은
“내란 청산에 신상필벌은 기본”이라며 내년 2월까지
모든 부처 공무원의 내란 가담 여부를 조사하기로 했어요
총리실과 각 부처에 ‘내란행위제보센터’를 두는 등
49개 중앙행정기관에 661명을 투입해 공무원 75만명을 조사하고
휴대전화까지 들여다보겠다고 하지요
또 국무회의에서 “국가 권력 범죄는 나치 전범을 처리하듯이
영원히, 살아 있는 한 처벌하고... 국가 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특례법 입법에 속도를 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어요
계엄 1주년을 맞은 시점에도 “빛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고
내란 사태는 현재도 진행 중”이라며 내란 청산을
“몸속 깊숙이 박힌 치명적인 암을 제거하는 것”에 빗댔지요
대통령은 ‘입법부’라고 하지만 사실상 여당 단독으로
내란 특검에 이어 내란 전담 재판부 신설을 추진하고 있어요
당대표에 따르면 2차 종합 특검에서는
법원도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하고 있지요
사법 개혁을 명분으로 법 왜곡죄와 헌법재판소법도 만들 기세이지요
전국법원장회의에 모인 법원장들은 내란 전담 재판부와
판사 처벌법에 대해 위헌성이 크다는 우려를 표했어요
그런데 취임 6개월 메시지로 대통령실은
“내란으로 무너진 일상 회복”을 말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상은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지요
“내란은 현재 진행 중”이라는 대통령의 말에도 동의하기 어려워요
한 사람의 그릇된 판단에 따른 계엄이 있었고,
자고 일어나니 그 계엄이 해제되었고, 그 사람은 지금 감옥에 있어요
새로 선거가 열려 대통령이 바뀌었을 뿐이지요
그 몇 시간 안에 무슨 일상이 무너졌으며,
측근도 몰랐다는 계엄 선언에 공무원 75만명이
무슨 수로 가담할 수 있었을까요?
실체도 없는 유령 같은 단어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꼴이지요
무엇보다 이런 그림을 끌고 나가는 건 대통령과 여당이지요
그래서 ‘내란’이 무슨 뜻인지 새삼 궁금해졌어요
네이버 어학사전에 물어보니 ‘명사: 나라 안에서 정권을 차지할 목적으로
벌어지는 큰 싸움’이라는 답이 돌아왔지요
우리는 여기서 ‘정권을 차지할 목적’이라는 어구에 유의해야 하지요
계엄사태 때 누가 ‘정권을 차지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나요?
혹 내란죄의 당사자가 뒤 바뀐건 아닌가요?
맞아요
그러니 ‘내란’이라고 불리는 행위들은 옳음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위력을 과시하는 행위이고, 사법 정의나 개혁 같은,
옳음의 편에서 바로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힘이 센지를
겨루는 투쟁에 불과하지요
그런 투쟁은 종종 정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야당은 힘이 없으면 결사항전 해야 할 텐데,
이런 중대한 권력 놀음을 ‘내란몰이’라는 유약한 레토릭으로 대응하고 있어요
‘내란몰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스스로 내란 프레임에
갇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요
아무리 저항해도 그 정도 수준의 상황 인식과 레토릭으로는
사냥꾼에 쫓기는 토끼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지요
사실 야당보다 더 걱정되는 건 따로 있어요
지금 대통령과 여당은 세상 끝까지 내란 청산을 하려 할 것이지요
대통령은 “내란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고,
당대표는 “내란 티끌까지 법적으로 처벌하겠다”고 했어요
이른바 ‘내란’이 청산된 후,
그 끝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처럼 생각조차 미리 알아내
처벌하는 미래형 국가?
아니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싹이 나기도 전에 잘라버리는(nip it in the bud)’ 17세기 유럽?
아니면 칼 포퍼가 일찍이 경고한 ‘닫힌 사회’?
그것이 무엇이든, 상상조차 하기 싫어요
어느 정도 혼란을 품고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게 민주사회이지요
그런 혼란조차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그러고도 남을 힘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지요
그 무시무시한 결말을 야당이, 사법부가,
그리고 국민은 얼마나 짐작하고 있을까요?
-* 언제나 변함없는 조동렬(一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