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5월24일(월)새벽 비, 점차 쾌청
Vanappagumbe yathā phussitagge
Gimhānamāse paṭhamasmiṃ gimhe,
Tathūpamaṃ dhammavaraṃ adesayi
Nibbānagāmiṃ paramaṃ hitāya,
Idampi buddhe ratanaṃ paṇītaṃ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여름날의 첫 더위가 오면,
숲의 총림이 가지 끝마다 꽃을 피워내듯,
이와같이 열반에 이르는 위 없는 묘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 안에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Stn.233)
초여름 빛깔과 냄새가 나는 쌍계사의 아침. 북으로 팔상전, 남에는 청학루, 동쪽엔 蓬萊堂봉래당, 서쪽엔 瀛州堂영주당 사이에 살짝 트인 네모난 공간은 포행하기에 알맞다. 특히나 비 내리는 저녁무렵이나 달 밝은 밤에는 그윽한 운치가 깃들어 그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경계 아닌가 싶다. 봉래당 기둥엔 부대사(傅大士, 497~569)의 禪偈인 橋流水不流가 새겨 걸려있다. 도량을 오가는 무수한 수좌들의 눈에 밟혔을 글귀에 대해 혀를 끊는 한 마디를 뱉어본다.
橋水流不流, 교수류불류
笑殺口臭偈; 소쇄구취게
日照雙溪明, 일조쌍계명
淸風吹三際. 청풍취삼제
다리와 물, 흐르고 흐르지 않는다는 말이여
입 냄새 나서 웃어죽겠네
해 비추어 쌍계곡 밝고
맑은 바람 불어와 끝이 없구나
해 저물자 범종소리 떨어지고 팔상전에 저녁예불 드린다. 예불 뒤엔 무슨 일이 있는가? 아무 일 없다. 生死去來가 本無一物이라, 인적이 끊어지니 山寂寂산적적 樹寂寂수적적 心自閑심자한 沒蹤跡몰종적이다.
이틀 만에 화장실 가다. 배가 더부룩한 증상이 좋아지려나.
2021년5월25일(화)맑음
새벽에 올빼미 우는 소리 들리다. 보름달이 서쪽 왕실봉 위에 환하게 비치니 하늘이 미소짓는다. 아침 공양 시간마다 영담 주지스님은 사중에서 생산하는 농산물로 자급자족한다는 것을 자랑한다. 오늘은 비트 담가 묵힌 것과 들기름에 구운 김을 들먹이며 쌍계사에 오신 스님들은 건강한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준다.
8시에 대중 운력 목탁 울리다. 겨우내 선방 외벽 창문에 쳐놓았던 바람막이 비닐을 떼어내는 작업을 한다. 쌍계사 선방은 세 군데를 쓴다. 가운데 金堂, 여기엔 육조정상을 모신 곳이다. 그리고 그 좌우로 날개를 펴서 동쪽에는 東方丈, 서쪽에는 西方丈이 있다. 금당에 두 분 앉고, 동방장에 다섯 분, 서방장에 일곱 분이 앉는다. 울력이 끝날 무렵 말끔히 깎은 머리에 찬비가 떨어져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린다. 슬슬슬 내리는 빗방울이 돌계단에 물방울 자국을 찍으며 번져간다. 온 도량이 초록색으로 흥건하다. 쌍계사 경내에 있는 수목과 화초는 함부로 손대지 말고 잘 가꾸라 했던 전 방장 고산스님의 평소 願이 녹색도량으로 物化되었다. 처마에 걸린 낙숫물 줄기에도, 도량에 듣는 빗소리에도,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도 청록의 혼이 깃들인 것 같다. 청학루 앞마당에 뒹구는 빗방울이 은구슬 금구슬 유리알인 듯 굴러다닌다. 여기는 슈퍼스트링superstring이 튕기면서 뛰노는 우주적 유희의 場이다.
10:40 대웅전에서 하안거 결제법요식 거행하다. 杲山방장스님이 생전에 하셨던 법문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신식 결제법문 행태이다. 산자가 죽은 자의 설법을 듣다니 삶과 죽음이 꿈인 듯하다. 칠불사 선원대중도 참석했던 터라 도응 주지스님과 대오스님과 인사 나누다. 오후에 불일폭포 가는 길 근처에 있는 死關院사관원에 편액을 거는 행사를 한다고 대중은 산으로 가고 나는 혼자 빨래하고 쉰다.
2021년5월26일(수)맑음
아직 빛을 낸 적이 없는 아주 많은 아침놀이 있다. -니체
누군가가 바라봐 줄 때까지 아침놀은 無明 속에 침묵한다. 아침놀이 빛을 발하려면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의 시선이 필요하다. 내가 동쪽 하늘을 바라봐 줄 때 비로소 아침놀은 빛나게 된다. 아침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나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침놀을 빛나게 하여 새날을 만들어간다.
쌍계사엔 주련이 많아 다 읽어보려면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뜻도 좋고 글씨도 좋은 것으로 방장실에 붙은 주련이 최고이다. 방장실은 杲山慧圓(1933~2021)스님이 주석하셨던 도량이다.
方丈室 방장실
萬里江山毘盧臥, 만리강산비로와
百草頭上觀音舞; 백초두상관음무
山山水水說無生, 산산수수설무생
花花草草放自光; 화화초초방자광
元來妙道體虛然, 원래묘도체허연
無聞無說無住處; 무문무설무주처
會得此境能事畢. 회득차경능사필
만리의 강산은 누워계신 부처님이요
온갖 풀 잎새마다 관음보살 춤을 추니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불생불멸을 설하고
꽃은 꽃대로 풀은 풀대로 제빛을 발하네
원래로 미묘한 도는 실체가 비었거늘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음이여
이 경지에 알았다면 일 마쳤다 하리라
여기에 뒷소리를 덧붙인다면,
만리강산은 한 소쿠리 흙더미요
온갖 풀 잎새마다 독이 묻었다,
산은 산 물은 물 말길이 끊어져
꽃은 꽃이 아니고 풀은 풀이 아니다
원래 道라 할 게 전혀 없는데
말할 것도 들을 것도 없으니 머무를 수 있겠나?
이걸 알았다 해도 십만 팔천리, 펫!
<말로써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서론]
자신이 말하면서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가?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이나 혼자 주절거리는 것은 의도를 띠지 않은 것이기에 말이라 할 수도 없어 거저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의도한 바를 어떻게 음성으로 표현하는가와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전달되었는가가 문제이다. 말하는 의도, 발성, 말을 담는 표현과 표정, 전달과 반응이 개인의 언어생활이다. 아울러 개인 간의 언어소통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본론]
1. 여기서 문제가 되는 두 가지 간격과 모순이 있다.
①말하려는 의도에 맞게 제대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의도한 바를 음성으로 완전히 표현 가능한가? 마음먹은 것을 말로 다할 수 있는가? 의도와 말과의 간격이 발생한다. 자기 마음을 말로 다하지 못하는 모순이 있다.
②話者가 말로 표현한 것을 상대가 듣고 화자의 의도한 바를 이해할 수 있는가? 화자가 의도한 것이 상대에게 어느 정도까지 전달될 수 있는가? 여기에는 화자의 말하는 의도와 말을 듣는 聽者의 이해 사이에는 간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말로는 자기 마음을 다 이해시키지 못하는 모순이다.
마치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듯이 그런 식으로 정확한 발성과 어휘와 문장을 구성해서 주제를 적중시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었다 치더라도 말을 듣는 상대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이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무엇을 말하려고 했지만 다 말하지 못해 미진한 것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대개의 사람은 자기가 무엇에 관해 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어림잡아 말한다. 그러니 아직 말로 다하지 못한 미진함이 늘 남아 있음을 느끼지 않는가? 한편 말을 듣는 사람도 상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대충 짐작하며 나름대로 생각을 맞춘다. 이렇게 보면 대화란 오해를 동반한 이해이며, 두 사람이 짜깁기하는 정교한 허구이니, 사실은 공감하는 대화가 아니라 공감하는 척하는 대화, 類似-대화이다.
2.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음을 전하려고 말을 건넸지만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린 격이지 않은가? 사람은 말로 자기 마음을 다 전하지 못한다. 사람 사이엔 마음을 다 전하지 못한 허전함과 서운함, 섭섭함, 그래서 고독과 고립감이 깃든다. 과연 사람은 자기에게 갇힌 채 흐릿한 막에 싸여 타자에게서 주어지는 한 조각 공감을 기다리는 고독한 존재인가? 우리 앞에 선 타자는 마음으로 영원히 연결되지 못해,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는 불가능한가?
그러나 여기에 다른 관점이 있다. 사람이란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별에 함께 사는 공동거주자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원자화되어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세계내적 존재 In-der-Welt-Sein이다. 세계라는 공동거주공간에 함께 처해 있음이다. 그리고 대화하는 두 사람은 그 대화가 벌어지는 상황에 함께 처해 있는 것이다. ‘함께-처해-있음’이야말로 개인과 개인을 근원적으로 맺어주는 존재-기반이다. 말하자면 사람끼리 말을 주고받음은 ‘존재의 바다에 잠겨서 함께 물장난을 치는 유희’이다. 그러니 마음을 전하기 위해 꼭 말로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짓이나 몸짓으로도 가능하다. 음성이란 도구를 사용하여 전해지지 않은 부분은 ‘함께-처해-있음’의 기분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대화란 음성으로 이뤄지는 부분과 ‘거기에-함께-있음’으로 채워지는 부분이 통합되는 화학반응이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가 이뤄지는 생활세계는 만남의 장(會域)이다. 이런 만남 가운데 최상은 음성과 제스처를 매개로 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통하는 以心傳心이심전심 mind-to-mind transmission이다.
3.
이심전심에서 말하는 心, 즉 마음이란 중생의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타, 인간-자연이 분열하기 이전의 원초적 조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禪 용어로 一念未生前 혹은 天地未分前이다. 그것은 인지적 장애(所知障)와 정서적 장애(煩惱障)가 사라져 나와 남, 인간과 세계가 걸림이 없이 넘나들며 공감하고 공유하는 화해和諧의 바다이다. ‘나에 갇힌 나’를 버리고 만남의 장, 조화의 바다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펼쳐 드러내는(開顯개현) 것’이며, ‘개방된 場 안으로 자신을 화현(化現)하는 것’이다. 세계는 단순히 자연환경이나 사물들의 집합이나 존재자의 합계가 아니라, 각각의 사물을 사물로서 자리 잡아주는 한마당으로서, 모든 것을 결집하여 상호 귀속시키면서도 그것에게 각자의 고유한 머무름을 부여하는 회역(만남의 장소, 會域, Gegnet)과도 같은 것이다. 회역이란 이렇게 일자가 타자를 통섭하면서도 타자를 타자로서 허용하면서 ‘개개의 物을 物로서 용인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존재의 열린 장(會域)은 참다운 생명이 움터 오르는 시원적인 바탕이 된다.
4.
대승불교는 좁은 나에 갇힌 존재가 자아집착을 버리고 화엄의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보현보살의 행원의 바다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망각한 존재자를 회역으로 내맡긴다(Gelassenheit zur Gegnet)고 말했다. 회역으로 내맡김에는 두 가지의 단념이 요구된다. 첫째, 대상을 향해 나아가 달려드는 표상(相, samjna)은 곧 의욕이기에, 내맡긴다는 것은 의욕하기를 단념하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존재자를 자기 앞에 세워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자 의욕하는 표상적인 사유(das vorstellende Denken), 모든 존재자를 오직 자기 욕구에 맞춰서 해달라고 하는 요구(주문가능)하고 마음대로 사용하다가 일방적으로 버리는(소비가능) 것의 형태로 만드는 계산적인 사유(das rechnende Denken)를 포기함이다. 그래서 회역에로의 내맡김은 평균적 세인의 마음이 아닌 초세간적인 숭고한 마음(Edelmut)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유의 극점에서 하이데거의 철학-함과 화엄법계연기가 서로 만난다고 할 만하나, 언어문자를 살활자재로 활용하는 선종으로 나아가자면 그 둘은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해야 하리라.
[결론]
말로써 마음을 다 말할 수 있을까, 사람끼리 마음을 주고받음에 말의 한계가 있지 않을까? 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발화(發話)하기 이전, 대화가 일어나는 상황에 함께 처한 그곳에 개별화 되지 않은 ‘마음’이라는 존재Sein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만남의 장(會域)이며 참다운 생명이 발현하는 바탕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어울린 생명의 삶을 살고 있다.
첫댓글 우리는 감각이 실재라고 보이게 하는 것들이 실은 꿈과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음을 깨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감각이 지배하는 ‘잠 깬 상태’가 실은 꿈의 연장이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치는 것이다.
깊이 잠들었을 때는 ‘나’도 ‘사람’도 없지만, 잠에서 깨는 순간 ‘나’와 ‘사람’이 되살아나 활동을 시작한다.
바로 이때가 우리가 깨닫고 나서도 눈을 뜬 채 환영(幻影)에 빠지는 지점이다.
法에는 본시 돈점(頓漸)이 없지만 끄달림이 있다면 '無修之修'로 通해야 한다.
바다는 한 번도 파도가 멈춘 적이 없다. 이것이 생명 현상이고 바다의 본성이다.
자연스런 생멸(生滅)하는 그대로 진여 본성이다.
전 생애(生涯)에 걸쳐 우리는 우리 內面에서 돌고 도는 이러한 움직임이 허상이며 동시에 실상임을 ‘깨치는' 것이다.
에고의 세계가 허상(虛相)임을 알때, 그대로 실상(實相)이다[知幻卽覺]. 震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