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중공만주성위는 혁명의용군 2대를 1200명으로 조직하고 왕덕태 위증민 이학충이 지휘하는데 8월에는 정치주임 이학충은 150명으로 망강현(지금의 정우현북부)에서 회합하여 남북동만군이 만나 공동투쟁으로 고립행동에서 벗어나 흑룡강성 남부의 빈현은 송화강 남안으로 하얼빈에서 60공리로 빈주현이라 하고 일군은 이곳에 합동구를 건립하고 행정을 강화하는데 군사시설을 설치하는데 조상지의 공격목표가 된다
1934년 5월 13일 1500여 의용군은 조상지의 지휘로 빈주남문을 공격하여 북문에 매복하고 승리하여 1935년 1월 동북혁명군 제3군이 설립되고 500명으로 3월초 연합총지휘부가 결성되고 1934년 9월 오평을 공산국제대표로 파견하여 만주성 순시원 길동성서기로 공작한다
길림특위와 의용군 제4군을 설립하고 길동의 삼림지역에서 활동하고 302명이 이연록의 지휘를 받는다
1935년 2월 항일의용군 제5군이 설립되는데, 2개사 900명으로 군장 주보중이 지휘하고 시세영이 부군장 장건동이 참모장이 된다
1936년 1월 30일 동북인민 혁명군 제6군이 발족하는데 탕원의 유격대를 개편하여 하운걸 이조린 풍치강이 영도가 된다
4개단 1000여명으로구성되는데, 1935년 10월부터 1936년 5월사이 일군은 길동과 북만의 대토벌로 2 5군의 공동 유격활동으로 일군의 토벌을 극복하고 일군 1500명을 살해한다
1938년 3월 31일 양정우는 500명을 인솔하여 노령터널 서구를 습격하고 동아토목주식회사와 12도구 발전소 양식창고를 타격한다..........................
1938년 5월 일군의 대토벌로 곳곳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관동군의 증원으로 수만에서 70만으로 격증하여 경찰 특무 헌병이 점차 증원된다
동북병력은 77사변전 4개사단에서 1938년 7월에는 8개사단으로 항일유격구를 봉쇄하려 하는데 삼강대토벌을 대대적으로 실행하는데 탕원근거지에 집중하여 23일간 무인구로 만든다
대대적으로 주민과 혁명연군의 관계를 단절하여 심산밀영으로 이전하여 투쟁하는데 유격근거지는 섬멸되고 유격전쟁은 고난의 단계로 이행한다
이후 장백산과 소흥안령의 심산으로 숨어들고 밀영지와 후방기지를 세우고 간고한 유격전을 견지하게 된다
영하 40도가 넘는 동북삼림에서 이조린부대는 밀영유격대를 세우고 투쟁하는데 김일성부대도 그의 하속으로 활동한다
대토벌로 3개사는 서란 오상일대로 서진하여 신유격구를 세우고 삼강구의 핵심구에서 흑룡강 서부로 이동하여 양식을 확보한다
1939년 가을이후 몽강경내에서 25000명을 동원하여 양정우부대 격멸전으로 1000명미만의 양정우부대는 열세에 몰려 11월 22일 400여잔여 양정우부대는 몽강복격전으로 일군 30여명을 몰살시킨다
동계의 도래로 보급의 어려움으로 유격대는 점차 곤경으로 들고 노숙을 하게되어 1940년 40도의 혹한으로 불을 피울수 없어 동사자가 늘어 투쟁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즈음 김일성부대는 소련의 연해주로 철수하여 소련군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국내유격전을 하는데 기본상 거의 소멸하게 된다
1940년 양정우는 몽강현 용천진을 습격하고 물자를 획득하는데 일군은 철저한 추격을 하여 1월 6일 양정우 한인화부대는 청강강북방의 서강지구에서 정빈 최주봉의 투항군과 격전으로 분산되어 연변을 거쳐 북만으로 철수후 소련으로 건너간다
남만지구유격대는 1940년초 최후의 일인이 완전히 섬멸되는 비극으로 와해되고 만다
잔여부대를 이끌고 소련해부대와 헤어진 양정우는 1940년 2월 2일 27명을 이끌고 2월 15일 6명으로 몽강현에서 발견되고 600명이 양정우 체포작전으로 격전을 벌여 4명을 보내는데,혼자남은 양정우는 2월 18일 포위되고 2월 22일 산아래 목옥리로 내려가고 하남의 고향에서 출향 12년만에 몽강현 보안촌에서 주민들이 발견하고 투항을 권유하는데 거절하고 왕사홍의 출동으로 포위후 투항을 권유하나 장렬히 전사하는데 35세였다
길림성 정우현은 몽강현이 개명되어 백두산 서록으로 송화강 상유좌안인데 1946년 2월 14일 정우현으로 개칭하여 양장군을 기념한다
2013년 청명절에 정우능원으로 동북의 혁명열사릉이 되어 영웅으로 추앙한다
양정우 사후 해부하여 위를 조사하는데 풀과 나무껍질만 들어있어 모두가 놀랐다 한다.....
14년의 투쟁은 끝나는데 조직을 중공중앙에 이교하고 임무를 완성하고 주보중은 길림성 성장이 된다
이후 동북인민자치군에 편입되고 조선부대는 김일성과 목단강 입성이후 조선인들에 연설후 소련으로 돌아가 소련함정을 타고 청진항으로 입국한다
당중앙과 연락없이 생존이 투쟁인 14년간의 고난의 세월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래없는 전사들이다
조선병사들은 25년간의 투쟁으로 수많은 희생후 일부는 남으로 일부는 북으로 일부는 중국에 소련에 남겨지고 또다른 고난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투쟁중간에 노선투쟁과 레닌이 준 자금을 두고 자유시 참변을 당하고 민생회사건으로 중국동지들에 살해되는 비극을 겪으며 슬픈세월을 보내는데 북한정권에 참여한다
https://cafe.naver.com/chinaenc/86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kn_011_0040_0040
이홍광 부대의 동흥전투는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만주에서 발간된 대동보(大同報)등의 신문에 며칠간 대서특필돼 국내외에 상당한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홍광은 18세 미녀장군으로 오인하게 해 동아일보 등에서는 “이홍광은 약관의 여비적”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0373
https://www.unamwiki.org/w/%EC%9D%B4%ED%99%8D%EA%B4%91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에 대한 소문은 1920년경부터 나돌았다고 1920년대 소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증언하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金日成)의 활동에 대한 신문 보도가 다수 있었다. 당시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1936년 가을 ~ 1937년말 기간에는 보천보 사건 주역인 6사장 김일성에 대한 보도인데, 1937년 11월 그가 전사했다는 보도 이후
https://www.unamwiki.org/w/%EA%B9%80%EC%9D%BC%EC%84%B1_%EA%B0%80%EC%A7%9C%EC%84%A4
https://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41693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0123439?sid=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