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이 은총입니다
성복동 성당 조 계 환 사도요한
주일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였다.
“우리도 한 번 나가봐요. 성경암송대회에.”
“다음 주잖아. 무슨 재주로 다 외워? 난 못 해.”
아내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하고 싶으면 자기나 하지.’
두 달 간격으로 맞는 암 표적치료제 주사 날이 다가오면 내 말투가 이렇게 까칠해진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 수요일 저녁이었다. 아내와 아들, 며느리 셋이서 식탁에 둘러앉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대화하고 있었다. 50구절의 성경암송 카드였다.
‘어라, 아직도 포기 안했네. 나흘밖에 안 남았는데.’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신명기 5,11ㄴ)
작년에 우리 집에 시련이 연이어 닥쳤다.
1월에 내가 임파선암 진단을 받은데 이어 4월에는 베트남에서 근무하던 아들이 또 직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아들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갔다. 창백하고 부석부석한 얼굴로 두 딸의 손을 잡고 장승처럼 서 있었다. 의기양양 하노이로 출국하던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들에게 다가갔다.
“너는 패잔병이 아니다. 더구나 난민도 아니야. 이겨 낼 수 있어.”
아들네는 그렇게 합류했다. 두 내외만 살다가 식구가 많아지자 풀방구리에 쥐 설치는 고방처럼 시끌시끌했다. 어수선한 우리 집을 두고 사람 사는 집 같다고 부러워하는 이웃도 있지만 공부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50구절을 셋이 나누면 각자 20구절씩 돌아간다. 서로 겹쳐 외워야하기 때문이다. 넷이 되면 15구절, 부담이 훨씬 준다. 내가 같이 하겠다고 하자 다들 희색만면이다.
성경 암송에서 먼저 알아둬야 할 일은 ‘저’와 ‘저희’, ‘주님’과 ‘하느님’을 혼돈해서는 안 되고 ‘이’ ‘가’ 같은 토씨도 멋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자도 틀리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우기가 만만치 않다. 열심히 외워 머릿속에 저장한 말씀들은 외우는 속도보다 더 빨리 증발되었다.
방법을 바꾸었다. 무작정 외우기에서 쓰기로 했다. 한 구절을 백 번 이상 쓰리라 작정하고 잠을 줄여가며 써나가기 시작했다. 입으로 되뇌며 계속 쓰다 보니 쉰 번 정도에서 말씀의 구절들이 입을 통해 국수 가락처럼 나오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네 돌이 채 안 된 둘째손녀 레베카가 따라 외운다는 사실이었다. 기역 니은도 모르는 아이가 또박또박 암송했다. 둘째가 하는 것을 보고 유치원에 다니는 큰손녀 마틸다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세 구절 외우면 언니는 네 구절, 동생이 네 구절하면 언니는 다섯 구절, 이렇게 해서 아마 일곱 구절은 외우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경쟁심은 어른들에게 강한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부진한 내가 열심히 해야 했다.
대회 날이었다. 3분 내에 많은 구절을 외워야 하는 시험이 끝나고 다음은 온 가족이 함께하는 암송 시험이었다. 레위기를 외운 아내가 먼저 시작했다. 술술 외우는 데 훌륭했다. 다음 차례는 나. 자신만만 장담하던 내가 은근히 불안했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 마신 다음 암송을 시작했다. 민수기, 신명기 순으로 잘 넘어가는 듯이 보이던 나의 암송은 신명기 29장 4절에서 막히고 말았다.
“주님께서는……” 하고는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깜깜했다. 고개를 외로 꼬기도 하고 눈을 깜빡거려보기도 했다. 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마이크를 다음 순번인 며느리에게 넘기고 말았다. 배턴 터치하자 며느리는 기다렸다는 듯 암송했다. 집에서 예행연습 때 며느리는 50개 모두를 외워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탈출기는 아들에게 양보하여 아들이 무난히 마무리했다. 번외로 출전한 두 손녀도 실력대로 암송을 했다.
결과는 우리 가족이 사랑상, 즉 대상을 수상했다. 부상으로 나온 상금을 아내에게 넘겼다. 아내는 며느리에게, 며느리는 아들과 상의하여 상금 전액을 다시 시아버지인 내 이름으로 본당에 감사헌금으로 내 놓았다. 두 삼식이를 봉양한다고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체면치레했는데 며느리가 마음을 예쁘게 써주었다. 참으로 고맙다.
지금 나는 신명기 5장7절에서 22절까지 십계명 본문도 외우고 있다. 불교신자와 개신교 신자 지인들 앞에서 실력을 테스트 한 적도 있었다.
성경 구절을 외우고 또 서로 문답연습을 하다 보니 가족 간의 대화가 풍성해지고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성령의 빛과 생명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해졌고 시련도 은총임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흉내 내고 그를 본 어른들이 웃고 하는 환경이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이 아니겠는가. 아직 돌이 채 안 된 막내손녀 수민이도 손을 모아 ‘아멘’ 한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평화와 기쁨의 은총을 주신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2014. 9. 21.
첫댓글 '시련도 은총'이라는 말씀이 신새벽 소생 가슴에 와 닿네요. 명심해 간직하겠습니다.
성경잔치 기간 중에도 ME댄스동아리의 선봉에서 대리구 체육대회 초청 공연까지 소화하시고…
모든 주어진 일에 정진하시는 두 분 모습은 많은 교우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좋은 글 읽게 해주시어 감사하며 다시 한번 대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큰 바위 얼굴 피터선생님을 열심히 따르겠습니다. 과분한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냥 묵묵히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올리신글 아주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
그날 교중미사에 참석 못하신 분들이 궁금할것 같았는데 이렇게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 본당에 문재가 훌륭한 교우님이 많이 계실터인데 칠십 다 된 노인이 앞에 나선 일이 온당한지 되물어 봅니다. 구월 시월은 저희 가정에 너무 스폿라이터를 받은 달인 것 같아 부담 스럽긴 하지만 오직 주님의 뜻이라 감사드립니다. 기억해 주시는 가정에도 주님께서 가득 은총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수원교구 성경 암송대회, 가족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으셨고, 암송 체험 수기상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우리 본당 교우님의 특별한 기도의 힘이고 특히 교육분과와 제분과장님의 각별한 정성과 배려의 결과였습니다. 저희 가족이 뛰어나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부님을 비롯 저희 본당 모두의 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리도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님과 아드님이 빨리 회복하시어 주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날이 오길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