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을 가지고 6개월 이상 놀았는데 여전히 어렵고 신비한 책입니다.
어제 잔나비와 예정에 없는 난상토론을 하고 상당히 고무되어 있습니다.
책가방끈이 길지 않은 녀석이 저랑 2시간 넘는 토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봅니다. 젊은 날 날을 새며 바울을 논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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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천호진이 조인성을 픽업하면서 때렸던 맨트처럼
요샌 건달도 ‘문무를 사유해야' 한다고 봅니다.’감정에 이끌려 사는 놈‘과
’이성을 사유한 인간‘의 장래는 물어보나 마나가 아닙니까?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꼬랑지를 바짝 낮추고 세월을 낚을 것을 주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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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은 주나라에서 성립한 역’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역’(易)은 일차로
변화를 뜻해요. 그래서 서양에서는 ‘주역’을 ‘변화의 책’(The Book of
Changes)이라고 번역합니다. 동시에 ‘주역’은 점치는 책입니다. 주희가
“대저 ‘역’이란 복서(점) 책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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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은 제게 ‘명리학’이 신들의 담론이라면 ‘주역’은 신들의 담론을 도통한
신들의 세계라고 하더이다. 뭔지 모르지만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결국 ‘주역’
은 변화의 책이자 변화를 점치는 책입니다. 천변만화하는 우주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 ‘주역’은 동양철학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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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도 주역을 ‘변혁의 철학’으로 선포하고, 주역의 지혜로 이 격변의 시대를
돌파하길 조언합니다. 주역의 심오한 사유는 중용과 노자, 장자 등 모든
동양사상의 뿌리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동방인, 특히 우리 한국인의 심성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한 주역이 현대인에게는 잘못 이해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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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는데 도올은 미신적 요인에 침윤된 주역을 해방 시킵니다. 주역은
주어진 운명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숙명론적 생각에 대항하여
자기 운명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척하고 새롭게 창조해 나가기를 가르쳐
주는 사상이며, 사람과 사회를 변혁시키려 탄생한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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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잔나비는 제게 말띠로 살아 액을 피해 가라고 했어요. 애굽재앙
때처럼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Passover (유월, 죽음을 피해가라)
하라는 뜻으로 이해했어요.(앗싸) ‘주역’은 ‘역경’과 ‘역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특히 ‘역경’은 주역을 구성하는 핵심 텍스트이며 주역 성립의 역사상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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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문헌입니다. ‘역전’은 공자 이후 이 ‘역경’을 해설한 권위 있는 논문
들을 가리킵니다. ‘단전’ ‘상전’ ‘문언 전’ ‘계사전’ ‘설괘 전’ ‘서괘 전’ ‘잡괘
전’ 7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희가 ‘역’이라고 부른 것은 이 문헌들
가운데 핵의 자리에 놓인 ‘역경’을 가리키고 이 ‘역경’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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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한 논문들이 ‘역전’으로 덧붙여져 현재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주역’은 ‘우주 만물’과 ‘인간 세계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 변화를
설명하는 데 쓰이는 범주가 ‘음과 양’입니다. ‘주역’은 이 두 범주를 조합해
천지의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주목할 것은 이 두 범주가 절대적으로 구별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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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양 속에 음이 있고 음 속에 양이 있다고 해요.
양이 음으로 바뀌고 음이 양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음양이 서로 바뀌어 감으로써
세상 모든 게 변화 속에 있게 돼요. 그러나 이 변화는 일직선의 변화가 아니라
순환하는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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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끝이 있으므로 그 한계 안에서 모든 것이 무수한 변화를 거쳐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은 양으로 한번은 음으로 바뀌는 이 ‘일양 일음’의 변화는 우주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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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양론은 17세기 중국에 온 서방 선교사를 통해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에게
알려졌고, 라이프니츠는 이 음양론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 컴퓨터 이진법의
기원이 되는 수의 체계를 창안했답니다. 주역의 ‘역경’은 이 음양의 변화 양상을
점으로써 알아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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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경’을 구성하는 기초 단위가 ‘괘’와 ‘효’입니다. 효는 음효(- -)와 양효(―)
로 나뉘는데, 도올은 이 음효와 양효가 각각 남녀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이 두 효가 여섯 개 쌓여 하나의 괘를 이루고, 이 괘가 64개 모여 전체를 이루죠.
가령, 양효만 여섯 개 쌓이면 ‘건괘’(첫번째 괘)가 되고, 음효만 여섯개 쌓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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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 괘’(두번째 괘)가 됩니다. 이렇게 쌓여 이룬 ‘괘’의 모양을 ‘괘상’이라 한 대요.
이 괘상 마다 괘의 이름인 ‘괘명’이 있고, 그 괘를 설명하는 말씀 곧 ‘괘사’가
따릅니다. 각각의 괘에는 여섯 개의 효가 있으므로 전체 64괘는 384효로 이루어
집니다. 이 384개의 효마다 효사가 달려 있어요. 특정한 절차를 통해 효를 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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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 그 효에 달린 효사를 읽어 길흉을 알아보는 것이 바로 역점입니다.
그렇다면 점을 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역’은 ‘기복의 대상’이 아님을
강조합디다. “인간의 운명이나 운세라는 것은 내 실존의 문제이지 점으로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점을 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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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력이나 노력으로 선택의 기로가 열리지 않는 극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 점을 치는 이유일 것입니다. 점이 가리키는 효사는 하느님이
내려주는 말씀입니다. 이때의 하느님은 어떤 초월적 절대자가 아니라 음양의
기운 속에 운행하는 우주 만물에 깃든 하느님이라고 하더이다.
'동학'에선 인간이 곧 하나님이면, 주역은 범신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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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점'입니다. 주역이 발흥한 시기는 동주 시대
(기원전 770~256)의 혼란기였어요. 세상이 끝없이 어지러웠기에 주역에는 깊은
‘우환 의식’이 배어 있습니다.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기대는 것이 점이라는 방식의 ‘물음’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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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점은 실존의 한계상황, 시대의 한계상황에서 하늘에 뜻을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사로움을 넘어선 물음과 응답이었기에, 후대에 역에 대한 해석을
통해 철학적·윤리학적·형이상학적 사유가 자라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64괘 가운데
63번째에 놓인 괘가 ‘기제’이고 64번째에 놓인 괘가 ‘미제’입니다. 기제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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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넜다는 뜻’이고 미제란 ‘아직 건너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역경’의
마지막 괘가 ‘완료’를 뜻하는 기제가 아니라 ‘미완’을 뜻하는 미제일까? 역의 세계
에는 완전한 종결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도 끝은 항상 시작을 품고 있는 것
이기에 미제가 마지막에 놓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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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논리에 즉 해서 생각하면 기제 다음에 미제라는 것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즉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 미제는 그
표면의 뜻만 보면 긍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효의 효사는 ‘정흉(征凶), 이섭
대천(利涉大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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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함의를 풀어보면 ‘흉 운을 감수해야만 하는 시대를 만났지만(정흉), 이런 때일수록
큰물을 건너는 모험을 감행해야 이로움이 있다는(이섭대천)’뜻이 됩니다. “정흉은
객관적 판단이고 이섭대천은 주체적 결단이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모험을 감행
해야만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얘기같습니다. 잔나비! 무심하게 살고있냐?
2023.8.3.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