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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이 주시는 메세지
231225 성탄절 (눅2:1-7)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아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성탄절하면 제일 생각나는 게 무엇이죠?>
<산타클로스요>
무려 64%가 성탄절이 산타크로스 생일인줄 압니다.
기독교인들이 아니면 성인들도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에 산타크로스를 떠올립니다.
산타크로스가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마귀의 장난질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 생일인데... 정작 주인공 예수님은 없습니다.
성탄절은 산타크로스한테 자기가 갖고 싶어 하는 선물 받는 날... 어른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탄절이면 술집과 호텔이나 모텔 등 숙박업소는 방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들딸을 잘 기르고 결혼을 시켜서 손자, 손녀까지 둔, 홀로 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생일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다 모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딸, 손자, 손녀가 다 온다고 하니까 아침부터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자녀들이 찾아와서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TV를 보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났는데도 그 많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 가운데 상을 치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70이 가까운 어머니 상을 치우고, 혼자 부엌에서 덜거덕거리며 설거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으면서도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고, 어머니에게 설거지까지 시켰습니다. 누구 생일입니까? 누가 누구를 축하해 준 것입니까? 오늘 날 성탄절이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선물 받는 날이긴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인류가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날 입니다. 인류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우리를 구원할 자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니 성탄절은 당연 우리 인간이 사모할 자, 영접할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에는 오직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통치하는 이스라엘을 파악하려고 호적신고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호적 신고는 본적지에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지금 나사렛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으로부터 만삭이 된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호적 신고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여관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굿간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에 예수님을 해산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뉘일 곳이 없어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번 누우신 곳이 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천하가 다 예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실수 있으며, 소유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신 예수님이 하필이면 짐승의 여물통(밥그릇)인 구유에 누우셨을까요?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이 우리 인류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은 인류의 떡으로 오셨음을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밥그릇입니다. 여물통이라고 하죠. 예수님이 나시자마자 밥그릇에 누우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6:35절입니다.
<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생명이신 참된 양식이라 선언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시절 광야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와 비교하셨습니다.
요6:4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으나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특별히 경험한 만나(양식)를 40년 동안 먹었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즉 그들이 먹은 만나는 참된 양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양식의 모형, 즉 그림자였습니다. 즉 만나가 진짜 양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 참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는 다시 주리지 아니하며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 하신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실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셔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육신이 양식이 없으면 죽습니다. 양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영의 양식인 생명의 양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I need you.”)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42:1-2)
시편기자처럼, 우리도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겸손의 본으로 오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신 것은 우리에게 겸손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나시고, 누유에 누우셨습니다.
믿음의 핵심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29)
이 세상에 자기 제자 발을 닦으신 스승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시면서 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전 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빌딩은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에 있는 <버즈 칼리파>라고 합니다. 높이가 828미터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롯데월드타워로 555미터가 된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다섯 번 째 높은 건물이라고 합니다. 현대판 바벨탑 같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만입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늘을 찌릅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유에 나신 분이십니다. 겸손의 표상입니다. 성탄절에 구유에서 나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할 메시지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으로 오실 때 마굿간에 오신 것은, 마굿간에 오실 때 구유에 누우신 것은 겸손 중에 겸손이요, 낮아짐 중에 낮아짐이요, 작아짐 중에 작아짐입니다.
천사가 세 친구를 찾아와 소원을 물었습니다. 하나씩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물은 것입니다. 천사가 첫 번째 사람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스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약속대로 스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킹, 왕이 되고 싶습니다> 천사는 약속대로 그 사람을 킹, 왕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두 친구위에 있고 싶었습니다. 천사가 무엇을 들어 주었으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둘 다 되고 싶었습니다. 스타도 되고 킹도 되고 싶습니다> 천사는 그의 소원도 들어 주었습니다. 스타킹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스타킹이 되어 양말신세가 되었습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은 너무나 교만해집니다. 망할 때가 되면 그렇게 됩니다. 바벨탑을 쌓습니다. 너무나 올라가려고 합니다.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겸손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기독교 영성가 C.S. Louise는 이런 진지한 말을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겸손해지고자 한다면, 내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겸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마굿간에서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하루에 한 번씩 바라보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해도 겸손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농구 코치로 유명했던 John Wooden은 선수들에게 이런 훌륭한 조언을 하였습니다.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겸손하라. 명성은 인간이 주는 것이니 감사하라. 자만은 자아가 주는 것이니 조심하라>
예수님처럼 겸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께서 희생의 제물로 오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신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인류의 희생 제물로 오셨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우신 것은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희생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마20:28절입니다.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삽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대속물이 소, 양, 염소 그리고 비둘기였습니다. 짐승의 죽음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짐승의 피는 일시적인 피 이기에 일 년에 한번 씩 꼭 반복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피 이기에 단번에 죄 사함을 해결하셨습니다.
히9:12절입니다.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26절입니다.
<26)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9:28절입니다.
<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희생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희생을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겨 지듯이 우리의 희생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지난 주 월요일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사는 동생네 모셔다 드렸습니다. 병원 검사가 예약되어 있어서요... 손을 붙잡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조금 가다가 쉬었다 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내려서 버스를 타고 계류장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버스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자리에는 이미 사람들이 다 앉았고요. 서 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버스에 오르자마자 서너 명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얼마나 감사하고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직은 마음이 따뜻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옛날 페르시아에 사이러스(Cyrus) 왕이 전쟁 중에 적국 왕자와 그 부인과 아이들을 생포해 왔습니다. 사이러스는 그들을 죽이기 전에 물었습니다.
<만일에 내가 왕자인 당신을 살려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겠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아내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왕은 이 말 한 마디에 감동이 되어 그들을 다 풀어주었습니다. 살려 주었습니다. 그 날 밤늦게 집에 돌아온 왕자는 살아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기뻐서 축하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사이러스 왕이 적국의 왕이지만 참 훌륭한 분이더군요. 내가 보니 정말 잘생긴 미남이더군. 의젓하고 늠름하고, 장수답고, 사나이답더군>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아내의 대답이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 합니다>
<그럼 뭘 봤어요?>
<나를 위해서 대신 죽겠다고 늠름하게 말하는 한 남자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에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위해 하늘의 보좌와 영광을 버리고, 희생하러 마굿간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되지 않을까요?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보면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 겸손과 희생의 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보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