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남산/靑石 전성훈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집안에서 서성거리며 그냥 지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2월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가는 어느 토요일,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봄을 찾아 집을 나선다. 약속 장소인 동국대학교 입구 남산 올라 가는 길, 날이 풀린다는 소식에 장갑도 끼지 않고 내복도 벗은 채 나섰더니 조금 쌀쌀하다. 역시 완연히 봄이 오기 전까지는 섣불리 옷차림을 바꾸면 안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사람마다 추위에 대한 반응이 다르기에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하면 그만인 것을. 사람은 타인의 행동이나 옷차림에 대하여 본인이 생각하는 만큼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간혹 쓸데없이 남의 일에 신경 쓰는 묘한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에 주변을 둘러보니, 그동안 무심히 지나친 수표교가 눈에 들어온다. 자료를 보니, “1441년(세종 23) 수표(水標)를 만들어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세워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였다. 수표가 세워지기 이전 이곳에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었는데, 그 뒤 수표교라 바뀌었고 이 일대 동네를 수표동이라 하였다. 길이 27m, 너비 7m인 수표교는 197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원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하였다가 1965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았다. 이때 다리의 서쪽에 있었던 수표석(水標石)은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졌다. 2003년 6월 청계천 복원 공사의 일환으로 청계천 위에 원래의 수표교를 본떠서 만든 새로운 수표교가 생겨났다”라고 한다.
수표교를 둘러보고 나서 장충단비로 향한다. “장충단공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 영조 임금 때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군영(軍營)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던 곳이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의 난군(亂軍)과 자객(刺客)들이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건청궁(乾淸宮)을 습격하는,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고종 임금은 1900년(광무 4) 옛 남소영 터에 제단을 꾸며 명성황후시해사건 당시 순사한 충신과 군인들의 혼을 받들고 이 제단의 이름을 장충단”이라고 하였다. (인터넷 자료 참조)
본격적으로 남산길을 올라가는 계단에 들어서니 왼쪽에 커다란 탑이 보인다. 한글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던 외솔 최현배 선생을 기리는 탑이다.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시던 외솔 선생님 이야기가 생각난다. 힘들지 않게 계단을 올라가니 평편한 시멘트 길이 나온다. 남산 숲길은 누구나 편하게 걸을 만한 길이라고 친구가 말한다. 편한 복장으로 남산 숲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조깅을 즐기는 이들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얼핏 나이를 가름해보니 대부분 20~40대로 보이는 젊은이다. 나이 든 사람은 대부분 천천히 혹은 조금 빠르게 자신에게 알맞은 보폭으로 걷고 있다. 주위 경치를 살펴보니 재선충에 병든 소나무를 베어 놓은 곳이 여기저기 보인다. 숲에는 여전히 잔설이 쌓여있다. 봄이 오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조금 더 세월이 익어야 할 것 같다. 숲길을 벗어나 한국의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접어드니 한 시절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건물이 보인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어두움의 상징인 옛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이다. 그 길을 지나가니, ‘서울정도 6백년 기념’ 조형물이 있고, 커다란 비석에 ‘서울천년 타임캡술광장’이라 새긴 안내 글이 보인다. 앞으로 몇백 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존재한다면, 타임캡슐을 꺼내서 조상들의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때가 무르익으면 세월 따라 사람도 변하고 조물주의 바람대로 새로운 세계의 꽃을 피울까? 아무리 눈앞이 컴컴하고 어두워 견딜 수 없다 하더라도, 밝은 내일이 온다는 믿음을 갖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 저 먼 곳에서 봄이 찾아오리라. (2025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