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의 남편 성 요셉 -
☆ 2014년 가해 3월19일 (자) 수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수도회] 정주(定住)의 대가(大家) -성(聖) 요셉 예찬(禮讚)-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2사무엘 7, 4 - 5ㄴ. 12 - 14ㄱ. 16
† 제2독서 : 로마 4, 13. 16 - 18. 22
† 복음 : 마태 1, 16. 18 - 21. 24ㄱ(또는 루카 2,41-51ㄱ)
다윗 가문의 요셉은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했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기도 한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다.
오늘 전례
▦ 오늘은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 성인은 성모님과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요셉 성인이, 우리나라가 여러 갈등과 반목을 이겨 내고
화합과 일치의 길로 나아가는 데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전구해 주기를 청합시다.
★ 주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신다. 다윗이 죽은 뒤
주 하느님께서는 그의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키시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게 하실 것이며, 그 집안과 나라가 영원히 굳건해질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가 믿음을 통하여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진다(제2독서).
★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일이 드러났을 때 그녀를 배려하여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며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주님의 천사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셉 성인을 기억하며 그의 삶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신 성인을 떠올리면 저 자신의 안위에
먼저 관심을 쏟는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려고
안달하는, 이른바 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련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성인을 바라보면 시끄럽게 달려가는 세상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경은 성인의 마음의 상태를 자세하게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인간적 고뇌의 시간이 있었으리라는 점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천사의 명령을 따르며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보호자로서 자신의
삶을 헌신하기로 마음을 굳히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요? 아마도
깊디깊은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침묵과 관련해서 언젠가 독일의 세계적인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뮌헨 부근의 호숫가에 살았던 그는
주일에는 꼭 작은 성당의 새벽 미사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 미사에는
사람이 적어 음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음악가가 음악을 피했다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은
오히려 침묵의 순간을 갈구하는 마음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참으로 성실한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성가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어쩌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침묵과 인내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과도 같은 삶이
순간순간 피어나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한 삶은 침묵과 인내의
시간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요셉 성인에게서 배웁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믿음의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19일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마태1,16.18-21.24)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 1,16.18-21.24ㄱ<또는 루카 2,41-51ㄱ>
믿음의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
“의로운 사람”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2014년 가해 3월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 1,16.18-21.24ㄱ<또는 루카 2,41-51ㄱ>
며칠 전에 저와 매우 친한 후배 신부 한 명을 만났는데,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형! 우리 성당 신자들이 형에 대해 말하는데, 형 못생겼데.”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말도 하네요.
“그런데 내가 아무리 봐도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아닌데, 신자들은 왜
그렇게 말하지?”
만약 이런 말을 젊었을 때 들었다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40대 중반의 나이에 듣는 이 말은 저를 그리 기분 나쁘게 하지
않더군요. 왜냐하면 얼굴의 잘 생기고 못 생기고로 제 삶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이곳저곳으로 강의를 많이
다니는데, 단순히 저의 외모만을 보고서 강의를 거부하시는 분을 이제까지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강의를 하느냐, 즉 어떤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강의를 하느냐는 것이지
결코 외적인 모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긴 모든 배우들이 다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 잘 생기지도 또 아름답지는 않지만 개성이 넘치는
배우들이 더 많은 사랑을 받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외모를 비롯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지요. 그보다는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내적인 마음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 성인은 과연 어떤 분일까요? 사실 요셉 성인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삶을 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했고, 세상의 관점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관점으로 보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자신의 배필인 성모님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시의 율법대로 한다면 의회에 고발해서 공개 처형을 받게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성인께서는 이 세상의 원칙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처벌하여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
들이라는 계시를 받게 된 것이지요. 요셉 성인은 이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뒤로도 철저하게 숨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세상의 원칙만을
강조하는 우리들, 외적인 모습만을 가장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는 우리들.
이런 모습 안에서 주님의 뜻은 철저하게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요셉 성인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찾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이 세상에 환하게
드러나, 우리 모두가 진정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딱 맞는 신발이라도 다른 사람의 발은 아프게 할 수 있다.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되는 삶의 비결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칼 융).
예수님과 성모님 곁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요셉성인.
급하다 급해
여러분은 혹시 이런 사람이 아닙니까?
1. 상대방이 통화 중인데 전화 안 받는다고 3번 이상 전화하는 사람
2. 커피 자판기 동작 완료되기 전에 미리 컵을 꺼내려고 준비하는 사람
3. 지하철 환승역의 빠른 이동 경로를 줄줄 외는 사람
4. 전자레인지 앞에서 돌아가는 접시 들여다 보는 사람
5. 고기 다 익었는지 쉴 새 없이 뒤집어 확인하는 사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급하다 급해’를 외치면서 여유 없이 서둘러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빠르게 지나가면 볼 수 있는 것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행복을 채 맞이하기도 전에 그냥 그 앞을 지나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쁘고 할 일 많은 세상이지만, 잠시 여유를 가지고 내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여유가 행복을 잡아채서 내 옆에
둘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니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정주(定住)의 대가(大家) -성(聖) 요셉 예찬(禮讚)-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19일 수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사무엘 하7,4-5ㄴ.12-14ㄱ.16 로마4,13.16-18.22 마태1,16.18-21.24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 1,16.18-21.24ㄱ<또는 루카 2,41-51ㄱ>
정주(定住)의 대가(大家) -성(聖) 요셉 예찬(禮讚)-
2014년 3월19일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은 참 특별한 날입니다.
우리 요셉수도원이 원장좌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는 교령이 발표되는
승격기념 미사가 거행되는 날입니다.
교령 발표를 위해 멀리 오딜리아 연합회 총재이신 예레미야 총아빠스와
왜관수도원의 박블라시오 아빠스가 미사에 참석하실 것이며
미사는 박블라시오 아빠스가 주례와 강론을 할 것입니다.
수도원 약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1987년3월19일, 왜관 수도원에서 6명의
수도형제가 파견되어 당일 수도원 개원 미사를 봉헌했고, 이어 1998년 3.19일,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으며, 2012년 3월19일,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그해 9월15일에는 '수도원 설립25주년 감사미사'를 이
시몬 아빠스 주례로 봉헌했고,마침내 수도원 설립 만 27년 째인 2014년
3월19일, 원장좌 자치수도원 승격미사를 박블라시오 아빠스 주례로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감회가 깊습니다. 대구가대를 졸업하던, 수도원 설립 다음 해인
1988년7월11일 사부 성 베네딕도 대축일 날, 요셉수도원에 파견되어 만 26년
째 여기서 살고 있으며, 특히 올해는 제가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을 맞는
해이기에 오늘의 경사가 참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꼭 26년 동안 주님은 물론 요셉 성인과도 함께 살아 온 느낌입니다.
알게 모르게 성인의 전구 은총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받았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저는 정주의 대가 성 요셉에 대한 자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을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참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교회는 물론 요셉 수도원의 든든한 배경, 산같은 배경의 참 크고 깊고 고요한
성 요셉입니다. 오늘은 다음 세 부분에 걸쳐 성 요셉의 위대함에 대해
나눕니다. 결국은 성 요셉 예찬입니다.
첫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침묵의 사람이자 들음의 사람이고, 순종의 사람이자 믿음의
사람입니다. 바로 성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늘 마음의 귀를 열고 침묵 중에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 요셉의 기도의
진면목이 잘 들어납니다.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지만 마음 속 고뇌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즉시 밤샘 침묵 기도에 돌입한 성 요셉임이 분명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마침내 깊은 침묵의 밤에 주님의 천사를 통해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의 천사의 응답이 참 통쾌하고 명쾌합니다. 성 요셉의 의문은 안개
걷히듯 말끔히 걷혔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순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문제는 요셉 안에 있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었습니다.
목숨을 내건 기도로 주님 안에서 답을 찾아 낸 성 요셉입니다.
2독서의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했던' 좌절할 줄 모르는 희망의
사람, 믿음의 사람, 성 요셉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성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 대한 성경주석이 좋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성경의 의로움
또는 정의는 근본적으로 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충실함을
뜻한다. 그래서 요셉의 의로움은 일차적으로 마리아와의 인간관계에
충실함으로써, 마리아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셉의 의로움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함, 곧 그분의 뜻에 순종함을 뜻한다.'(성경주석;신약42쪽).
하느님과의 관계에, 인간과의 관계에 지극히 충실했던 의로운 사람,
성요셉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웃을 깊이 사랑했던 성 요셉입니다.
하여 마리아의 곤궁한 처지를 충분히 배려하여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이었고 이에 주님은 즉각적으로 해결사로 등장합니다.
바로 항구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깊은 신뢰가 이웃과의 관계에 까지
파급됨을 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는 이웃을 사랑하고
아낄 수 뿐이 없고, 진정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는 이웃을 신뢰할 수 뿐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주님과의 관계에 지극히 충실했던 의로운
사람 성 요셉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 흡사 산 같은 배경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생애는 사실 거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철저히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마리아-예수의 성가정의 산 같은 배경의
요셉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횟수나 축일의 수를 봐도 마리아에 비해
너무 적습니다. 마태복음, 루가복음 초반부에 잠시 언급되고 영원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아, 바로 이게 요셉의 겸손이요 매력임을 깨닫습니다..
성가정의 산 같은 든든한 배경이 되셨던 분, 성가정의 비옥한 모판이 되셨던
분입니다. 얼핏 보면 보이지 않지만 잘 들여다보면 거대한 산같은 배경으로,
비옥한 흙의 모판으로 들어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겸손한 사람, 성
요셉입니다. 이런 성 요셉이 있었기에 나탄의 예언도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성 요셉의 영성을 흠모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가는
것입니다. 부권이 실추되어 가는 시대에 성 요셉은 영원히 참된 아버지상을
보여줍니다. 하여 성 요셉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고,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공동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광야의 사순시기, 오아시스와 같은 참 좋은 성 요셉대축일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닮은 기도의 사람, 의로운 사람, 겸손한 사람 성 요셉입니다.
늘 하느님 불러주신 제자리에서 우리 성 가정과 성 교회의 산 같은 배경으로
영원히 자리잡고 계신 정주의 대가 성 요셉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 요셉의 위대한 영성을
닮게 하십니다.
아멘.
* 2014년 성 요셉 대축일 및 자치 수도원 승격 감사 미사시간 공고
*2014.3.19일(수). 성 요셉 대축일 미사 시간: 오전 10시
*2014.3.22일(토). 자치 수도원 승격 감사미사. 미사시간:오후2-3:30.
축하연:오후3:30-4:30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2014년 가해 3월19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 1,16.18-21.24ㄱ<또는 루카 2,41-51ㄱ>
가톨릭 신문 3월 16일 기사에 ‘가정은 교회의 길’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정연정 신부님께서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정 공동체’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 해 주셨습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계획이 드러나는 곳이라고 합니다.
가정은 성화되어야 하고, 세상을 성화시키는 곳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는 특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정을 지원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 병약자, 노인, 장애자, 고아, 과부, 버림받은 배우자, 미혼모’를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한번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기사입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고 결심을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쓸모없는 인간이 쓸모 있는 인간
2014년 가해 3월19일 성 요셉 대축일
<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복음 : 마태오 1,16.18-21.24ㄱ
< 쓸모없는 인간이 쓸모 있는 인간 >
가수 이적과 함께 활동하며, 우리말로만 된 랩 음반을 발매한 랩퍼
김진표(27)씨. 무려 62개 단어를 9초 안에 끝내는 그의 랩은 감히 따라할
엄두를 못 낼 만큼 빠르고 발음도 정확합니다. 그런데 그런 김진표씨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심각한 말더듬 증세로 고생을 했던 것을 아십니까?
급기야 그의 말더듬이 장애는 친구들과 대화하다 말이 잘 나오지 않게 되어
답답해지면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문제아로 전락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담임선생님과 상의했고, 선생님은 종례 시간마다 급우들
앞에서 가정 통신 문을 낭독하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말을 더듬으며
읽자 친구들이 웃기도 했지만 몇 달이 지나자 말 더듬을 고칠 수 있었고,
결국 말을 한 번도 더듬지 않고 가정 통신문을 ek 읽자 친구들이 박수를
쳐줬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더듬 증세는 점점 사라졌고 어느덧 말을
잘할뿐더러 랩퍼까지 되게 된 것입니다.
만약 김진표씨가 보통 아이들처럼 말하며 살아가는 아이였다면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단점이 있었기에 도움을 받아 보통 아이들보다도 더 뛰어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GE사의 대표인 잭 웰치도 어릴 적 심한 말더듬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하게 더듬었는지 식당에서 참치 샌드위치 한 개를 주문하면
종업원은 항상 참치 샌드위치 두 개를 줬다고 합니다. 영어로 참치를 뜻하는
튜나(tuna)를 잭 웰치는 ‘튜-튜나’라고 더듬어 말했기 때문에, 종업원이 ‘투
튜나(two tuna)’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준 것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잭이
말을 더듬을 때면 그에게 “너는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너처럼
똑똑한 아이의 머리를 너의 혀가 따라 오지 못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해줬다고 합니다. 말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 빨리 생각할 수 있는 똑똑한
아이이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이라는 설명한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어쨌든 어머니의 설명을 믿고 받아들인 까닭에 웰치는 자신이
말을 더듬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잴 웰치는 말을 더듬는 덕분으로 자신의 머리가 남들보다 똑똑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멀쩡한 아이였다면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해
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젊고 예쁘고 능력 있던 이지선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보기 흉한 얼굴을 하고 게다가 손가락까지 절단해야 했을 때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닙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백만분의 일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얼굴도 이름도 없는
초라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 기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요.”
하느님은 그녀에게 당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가슴’을 선물하기 위해 예쁜
‘얼굴’을 빼앗아 가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언가 빼앗으셨다면 그것으로
절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빼앗아 가신 그 공간에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불쌍한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돈이
많았던 것도, 많이 배운 것도, 힘이나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마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는 했지만, 친척 집에
몇 달 다녀오더니 임신한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내 사람’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 약혼녀를 보는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임신시켜놓고 파혼해 버린다면 그 비난은 자신이 다
받아내야 합니다. 요셉은 세상의 모든 비난을 대신 받아도 상관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어차피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삭인 아내를 추운 겨울 베들레헴에서 방도 구하지 못하고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게 해야 하는 가장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또한 아무런
힘도 없어서 몇 년 동안 이집트라는 생소한 나라에서 피해지내야 하는 마음
또한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아기를 잉태하여 돌아온 마리아를 보며, ‘저 사람에게도 아픔을
주어야겠다. 법대로 내 아기가 아니라고 사실을 밝혀야지.’, 혹은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피하라는 천사의 말에, ‘내가 왜 도망쳐야 돼?’라고 했다면
예수님의 생명까지도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과연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당신 가장 큰 도구로 선택하십니다.
노아 때에 하느님은 이 세상을 멸하고 싶으셨습니다. 누구하나 당신 뜻에
마음을 두는 이가 없었습니다. 각기 세상에서 높아지고 성공하기만을 바라지
당신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단 한 사람 ‘노아’
만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은 노아에게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일을 시킵니다. 어마어마한 배를 육지에서 몇 백 년이
걸리더라도 지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고 바보스럽고
멸시받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이신 것입니다.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인물,
그러나 그런 인물을 통해 하느님은 세상에 인류를 존속시키는 위대한
구원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시는 이유는 그래야만 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빵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알곡을 으깨야 하는
것처럼, 자신이 쓸모 있다고 부서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 무엇을
하려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의 삶을 통해 역사하실 틈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아무리 세상에서 무가치하고 멸시받는 존재가 되더라도 당신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마리아요,
요셉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내고 싶은 자신의 뜻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과 그 아드님의 어머니를
요셉에게 마음 놓고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구원
도구가 되기 위해서 먼저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은 요셉을 보면서도
아주 자명해집니다. 바로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하느님께 의탁한다는 것.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께 의탁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 드릴 수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2014년3월19일 수요일 복음묵상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오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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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을 떠올리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남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슨 팔자가 그리도 기막힌가요?
자신과 약혼한 처녀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고,
오늘 복음말씀이 서술하고 있듯이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
그의 충격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내 파혼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만류로 그의 구원사의 동참은 계속 진행됩니다.
한 여자의 남자로 평생 동정이어야 했던 아내 마리아와
그 미래가 어떻게 진행될 지도 모르는 범상치 않은 아들 예수를 데리고 가장으로서 살아야 했던 남자.
얼마나 부담이 컷을 것이고 얼마나 많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했을까요?
성모님과 아들 예수님의 현실적인 울타리가 되어야 했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요셉.
한마디로 결코 쉽지 않았을 그분의 삶.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대역사에 자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십자가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에 대한 이야기는 적지 않게 나오는데,
희한하리만치 요셉 성인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침묵 속에 그 삶이 더욱 선명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분명 복음서에서 요셉 성인이 맡은 역할은 조역이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띄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우리의 신앙적 성찰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신앙 역시 보다 깊은 성숙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알 수 없는 것,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두려움은 때로는 막연하게
때로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옳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더욱이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의한 두려움이라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가장 큰 태도는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마음임을 믿습니다.
요셉 성인의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각자의 삶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작으나마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결혼? 그거 쉽지 않죠.
2014년 가해 3월18일 성 요셉 대축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 1,16.18-21.24ㄱ<또는 루카 2,41-51ㄱ>
결혼? 그거 쉽지 않죠.
결혼? 그거 쉽지 않죠. 인간관계 재산관계 성격 취향 학벌 생각만 해도
어휴! 간신히 결혼했어도 세월, 성격, 여건변화 같은 걸로 역시 생각만 해도
휴~! 자녀교육, 어른들 모시기, 노후문제 등 암튼 어느 한 가지 쉬운 게
없지요.
이런 모든 걸 마음과 눈이 희미해지게 해서 밀어붙이는 게 진한 사랑입니다.
진한 사랑은 얼이 나가 불타는 애정보다 의리 의로움 걱정 염려라야 하지요.
준비된 평소심리가 바로 그랬고 꿈을 받들 정도로 요셉성인은 순수했잖아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태오 1,1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희망의 사람(성 요셉 대축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요셉 대축일(2014년 3월 19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 1,16.18-21.24ㄱ<또는 루카 2,41-51ㄱ>
희망의 사람
요즘 저는 기도 중에 희망이 없는 이들을 많이 생각합니다. 특히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명을 버린 이들을 기도합니다. 또 절망의 암흑 속에서 자살의
악한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이들을 더 많이 기억합니다.
우리가 경축하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절망과 실망 속에서 임신한 마리아와 파혼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와 우리를 둘러싼 모진 환경에 너무나도 심하게
흔들립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생명까지도 그만 내려놓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가리켜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습니다”(로마 4,18)고 증언합니다. 우린 현재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 덕분에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요셉 성인은 현실의 어둠 속에도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요셉 성인이 꾼
꿈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희망의 사람은,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둠은 미래의 어느 때에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잘 사용되기 위한 인고의 시간임을 믿습니다.
“성 요셉이시여, 지금 절망의 어둠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보호하여
주소서. 희망을 꿈꾸는 이들이 되게 하소서.”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수도회] 인간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느님
2014년 가해 3월19일 한국교회의 공동수호자 동정마리아의 배필
성요셉 대축일
마태 1,16.18-21.24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인간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느님>
인간적인 시각으로 요셉을 바라보니 참으로 억울하고도 난감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결혼식이 바로
코앞이었겠지요.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차근차근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씩이나 걸리는 결혼잔치에 소요될 물품들도 구입하고, 청첩장도
돌리고, 신혼부부에게 필요한 살림살이들을 하나하나 장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 입장에서 정말이지 가슴 설레는 나날이었는데 난데없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리아가
갑자기 아기를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약혼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또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인한 잉태 사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요셉 입장에서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습니다. 이 난감한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요셉의 마음은 마리아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밤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입니다. 뭐라 변명도 못하는 마리아의 애매한
태도에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착한 요셉이었기에 마리아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내리
누릅니다. 정말이지 순교자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끝에 선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바닥체험을 톡톡히 하고 있던 요셉,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요셉에게 하느님께서 접근하십니다. 때가 이르렀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남달리 겸손하고 순종적이었던 요셉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잠시 후부터
시작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데 함께 하자고 초대하십니다. 이제 요셉의
상처는 영광으로 변화됩니다. 요셉의 좌절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희망으로 변화됩니다. 요셉 인생의 끝은 하느님 측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끝은 하느님에게는 시작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육화강생 사건 앞에서 요셉이 취한 태도는 정말 의연하고
대범했습니다.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거나 호기심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마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
놀라운 대 사건 앞에 경외하는 마음을 지녔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육화강생 사건이었지만 한결같이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경청과 침묵의 달인이자 순명과 기도의 전문가였던 요셉의 협조로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은 무리 없이 진행되어나갔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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