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오늘은 어린이날, 어린 시절에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를 떠올릴 것입니다. 1920년대,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어린이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소파 방정환 선생을 비롯한 색동회가 제정한 이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그 희망의 싹을 키워 주려는 간절한 마음의 결실이었습니다. '조선소년운동협회'가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을 맞아 발표한 선전문의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대목에는 참으로 인상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이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당신께 어린이를 다가오게 하시고,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보고 배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을 때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고 그 안에서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태 19,13-15 참조). 독일의 신학자 하인리히 슈페만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어린이의 어떤 모습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서는 길을 보여 주는지 여러 편의 아름다운 묵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다음의 짧은 구절이 가슴 깊이 와 닿습니다. "어린이는 우러러본다. 어린이의 가장 어린이다운 특징은 바로 그 눈길의 방향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밝은 미래를 위한 노력을 다지는 날이겠지만, 우리 스스로가 어린이처럼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 다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활짝 열려 있는 삶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사람으로 사는 길일 것입니다.
삶은 매 순간 기회다
-김대열 신부-
삶은 기회일 수밖에 없다. 순간마다 모든 시간은 우리에게 기회로 주어진다. 어떤 기회일까? 오늘 복음 말씀으로 기준을 잡는다면,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다.
우 리는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았는가? 기회라는 것을 의식하고 살았는가? 의식했다면 시간을 어떤 기회로 바라보고 살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위해 살았다. 그 무엇 중에 영원한 생명은 얼마나 있을까?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날마다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살 수는 없다.
영 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으려고 힘썼냐는 질문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아름답게 살려고 주어진 기회를 얼마나 잘 사용했느냐는 질문이다. 얼마나 용서하며, 얼마나 사랑하며, 얼마나 이웃을 살리는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우리가 어떤 양식을 위해 지금까지 걸어왔는지가 분명히 보일 수밖에 없다.
뒤 를 한번 돌아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살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시간 곧, 기회는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그 기회를 살리느냐 마느냐는 철저하게 자신의 몫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한없는 하느님의 관대하심과 인내심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 동안만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조명연신부-
해 외성지 순례에서는 쇼핑 할 시간이 거의 나지 않습니다. 쇼핑이 목적이 아닌 것도 있지만, 성지가 위치하는 곳이 대체적으로 시골이고 한적한 곳이다 보니 물건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지 순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왔어도 많은 분들이 한국과 다른 문화와 환경을 갖춘 곳에서 특별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더군요. 한 번은 화장실 때문에 어느 시골의 슈퍼마켓 같은 곳에서 잠시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분들이 물건을 사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마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때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신부님, 한국보다 절반 가격밖에 되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한국보다 훨씬 쌀 수는 있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순히 싸다는 말에 필요하지 않은데도 충동구매 식으로 구입하십니다. 언젠가는 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말입니다.
하 긴 저 역시도 여기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남들 초콜릿 산다고 저 역시 초콜릿을 샀으니까요. 사실 저는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단 음식을 전혀 먹지 않거든요. 그래서 바로 이 때 하는 말,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하려고요.”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제 주변에서도 그렇게 단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남들 사니까 저 역시도 따라서 구입한 충동구매였습니다.
한 국 보다 싼 것 같다고 구입하지만, 가장 돈을 아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예 구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보다 싸다고 구입해야 돈을 아끼는 것 같지만, 구입하지 않을 때 더 돈을 아낄 수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관점은 비교 판단하게 하여 우리가 끊임없이 물질적인 욕심을 간직하게 유혹하지요. 하지만 주님의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썩어 없어질 양식만을 얻으려고 힘썼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양식만을 보려 하다 보니 정작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전혀 못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내게 없어도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욕심을 가득 안고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내게 꼭 필요한 것을 꼭 움켜잡을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님께 청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각오. 결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다카하시 아유무).
예비신학생과의 만남을 하면서...
어제는 예비신학교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예비신학생이 제게 이런 말을 물어봅니다.
“신부님, 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신부도 되고 싶거든요. 어떻게 해야지요?”
효심 가득한 학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물어 보았지요.
“엄마가 돈 많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하니? 그래서 너에게 지금 나가서 돈 벌어 오라고 해?”
아 니라고 대답합니다. 그저 이 학생은 돈이 있어야 엄마가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돈이 많이 모여진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돈의 용도는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왜 돈이 생겼을까요? 계속해서 집에 모아 놓으라고 생겼을까요? 아닙니다. 쓰라고 생긴 것이 돈입니다. 필요한 곳에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돈을 모으려고만 하고 있으며, 그래서 돈의 용도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가치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가치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행복을 찾겠습니까?
삶은 기회일 수밖에 없다.
-김대열신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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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회일 수밖에 없다. 매 순간 모든 시간은 우리에게 기회로 주어진다. 어떤 기회일까?
오늘 복음 말씀으로 기준을 잡는다면, 썩어 없어질 양식과 영원한 생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왔는가?
기회라는 것은 의식하고 살아왔는가?
의식하였다면 어떤 기회로 시간을 바라보고 살아왔는가?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왔다.
그 무엇 안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애를 썼던 시간은 얼마나 들어있을까?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매일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늘 가슴에 담고 걸어야 할 길이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으려고 힘썼냐는 질문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아름답게 살려고 얼마나 주어진 기회를 잘 사용하였느냐는 질문이다.
얼마나 용서하며, 얼마나 사랑하며, 얼마나 이웃을 살리는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우리가 어떤 양식을 위해 지금까지 걸어왔는지가 분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뒤를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살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시간 즉 기회는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
그 기회를 살리느냐 마냐는 철저하게 자신의 몫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한없는 하느님의 관대하심과 인내심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 동안만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 백사와 산삼의 관계 >
-전삼용신부-
저 와 함께 공부했던 한 신부가 해 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백사를 잡으러 산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백사는 예나 지금이나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사를 잡지는 못했고 그냥 뱀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을 흰 페인트 통에 넣어 빨래 줄에 널어놓았다고 합니다.
밭 에서 일을 하다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이 백사를 잡아왔다고 지나가던 동네 사람까지 불러 세워 자랑했습니다. 아들은 뱀을 잡느라 고단했는지 마루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혀가 검은 색이더랍니다. 옆에 있던 흰 페인트 통을 보시고 상황을 파악하신 아버지는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잠자던 아이를 매우 혼냈다는 것입니다.
뱀 에 흰 페인트를 칠하면 백사가 될까요? 백사는 일반적으로 산삼을 먹고 사는 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백사가 발견된 곳에는 산삼 밭도 함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강원도 정선에서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이 산삼을 갉아먹고 있는 백사를 발견해 산삼과 백사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산삼에 있는 성분이 뱀의 색소를 눈만 빼 놓고 다 빠져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뱀도 몸에 좋다고 하는데 산삼을 먹은 뱀이니 얼마나 몸에 좋겠습니까? 그러나 페인트칠을 한 뱀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겉만이 아니라 자신의 온 존재를 송두리째 변하게 하는 양식을 먹어야 내가 진정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많은 이들에게 그들이 당신을 찾아온 것은 기적의 의미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빵은 육체를 배불리고 육체를 살리는 양식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변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렇다면 예수님께서 말한 빵의 기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기적의 의미는 바로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변화시켜 나갔던 것처럼, 성체와 성혈을 영하며 우리 영혼을 변화시켜야만 가나안 땅인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말씀이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육체에만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 수님은 육체가 아닌 영혼이 변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만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페인트를 칠한다고 뱀이 백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빵만 먹는다고 영혼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우리 존재가 변화되지 못한다는 것을 믿는 것에 있습니다.
남편을 빨리 죽게 하는 방법이랍니다.
첫째, 남편을 화나게 하라.
둘째, 과식하게 하라.
셋째, 과음하게 하라.
넷째, 담배를 많이 피우게 하라.
다섯째, 커피를 탈 때 설탕을 듬뿍 넣어라.
사 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건강에 좋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건강에 좋은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네 개가 다 먹는 것이지만 가장 처음 것은 영혼에 관련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남편을 빨리 죽게 만드는 방법일 것입니다.
먹는 것에 따라 그냥 뱀도 되고 귀한 백사도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즉 말씀과 성체를 자주 영한다는 것, 이것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가장 좋은 준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8-50).
나는 싸구려 인생?
-김찬선신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
오늘 복음을 보면 티베리아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애써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써 찾아 온 것이 주님께는 그리 탐탁치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수고했다거나 환영한다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당신을 찾는 이유가 빵이나 얻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찾아오는데 부모를 보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뭐 가져갈 것 없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다면
부모 마음이 얼마나 서글프고 속상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돈 남 말 하듯 할 수 없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갈 때의 저를 보면 저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머무는 것이 좋아서 그저 오래 머문다든지,
주님 말씀 다소곳이 듣고 그 말씀에 한참 머문다든지 하지는 않고
성당에 가면 대뜸 달라는 기도부터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고 싶어 안달인 부모는 달라지 않아도 바리바리 싸주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그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면 그러하실 거고,
사랑을 달라면 사랑도 주시고 덤으로 재물도 주실 텐데,
달라고만 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그저 내 요구를 채워주시는 분, 곧 나의 물주物主로만 만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만 서글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나 자신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나라는 존재가 사랑이 아니라 돈이나 찾는 존재가 되고,
진짜 귀한 것은 놔두고 값싼 것이나 찾는 싸구려 인생이 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찾지 않고
순간적인 만족을 주는 이 세상 것들을 찾는 나는 진정 싸구려 인생입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싸구려 인생이 되어도 좋단 말인가?
하느님을 싸구려나 파는 그런 분으로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이걸 생각게 하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빈 마음에
- 전진 신부-
언젠가 아는 수녀님을 만났는데, 그 동안 내적으로 겪은 어려움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제야 외로움과는 다른 고독의 의미를 알겠고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알겠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너무 아프고 절망스러웠는데, 3년 정도 어둔 밤을 보내고 나니 그것이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통의 한자 ‘苦’?를 풀이해 보면, 집 위에 풀이 덮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 다시 내 자신이 내적으로 더 깊어지고 가리움 없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 체험을 통해 우리의 신앙은 나를 아프게 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딛고 일어서게 합니다. 진정한 믿음 안에서 신앙의 힘은 발휘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생명과 삶을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듯하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허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쁘고 좋은 것이든 아프고 힘든 고통의 시간이든 또 부끄러운 허물이든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릴 수 있다면, 그 빈 마음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생명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어제는 혼배미사를 위해 서강대에 다녀왔습니다. 특별히 주일에는 바쁜 본당의 일정으로 잘 나가지 않는데, 몇 달 전 신랑신부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서 어제의 혼배미사 주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혼배 주례를 부탁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본당이 아니더라도 인천 내의 성당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인 서울, 그것도 성당이 아닌 대학에서 하는 혼배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거리상으로도 멀다고 생각되었고, 여기에 교통 체증까지 더해질 수 있다는 점이 저를 매우 망설이게 했습니다. 하지만 약속했으니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든 가야했지요.
저는 혼배미사가 12시였지만 교통 체증을 염려해서 2시간 전인 10시에 본당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요? 단 한 번의 막힘없이 30분 만에 서강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성당에서 서강대까지가 이렇게 가까운지 처음 알았습니다. 늘 서강대까지 먼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가까웠던 것이지요. 단지 교통 체증으로 인해 멀게만 느꼈던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다보니 하느님 나라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멀게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차가 막혀서 서울이 먼 것처럼 느끼는 것처럼, 욕심과 이기심 등으로 우리의 마음이 꽉 막혀서 하느님께 가는 길이 멀게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가깝게 만들 수 있을까요? 성당이 많아지고, 좋은 교육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질까요? 즉, 하느님 나라로 가는 도로가 넓어지면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질까요?
도로를 넓힌다고 해서 교통체증이 없어지지는 않지요. 어제 아침처럼 차가 없을 때 교통체증이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꽉 막고 있는 이기심, 욕심, 미움과 다툼 등의 부정적 마음들이 사라질 때 하느님 나라가 바로 코앞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바로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 설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손병희).
찾다. 무엇을? 누구를?
-오민환-
예수님과 군중이 만날 수 있는 곳은 호수였습니다. 그만큼 군중들이 주로
갈릴래아 호수를 끼고 생활하였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던 그 표징은 너무나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이 ‘찾은 것’은 아직도 그 황홀한 기적의
추억이었습니다. 그렇게도 힘주어 말했던 예수님의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과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청중과의 대화 역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그들은 “수군거리기”도(요한 6,41 이하) 하고 듣기에
“거북하”기도 합니다(요한 6,60). ‘영과 육’에 대한 이해의 차원으로부터
이미 예수님에 대한 유다인들의 근본적인 몰이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청중의 몰이해는 그들의 물음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적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지만, 그 기적이 뜻하는 깊은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
-김찬선신부-
우리의 전례 독서는 오늘의 얘기를 꺼내면서
먼저 앞서 있었던 일들을 짧게 요약합니다.“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이어서 오늘의 전례 독서는
예수님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얘기를 들려줍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이에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말을 읽으면서 참으로 가당치도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기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물으니 말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이 한 일은 양식을 찾는 일,
심하게 얘기하면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한 자식이 있습니다.
욕심이 많아서 이일 저일 건드리며 천방지축 뛰어다니는데
하는 일마다 실패일 뿐 아니라 몸마저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늘 근심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을 찾아옵니다.
남아있는 부모의 논을 팔아
사업자금으로 도와 달라는 얘기를 하러 와서는
사업만 잘 되면 부모님을 좋은 데에 잘 모시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당신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엉뚱한 짓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하느님의 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를 보면서 정말 무서울 때는
하느님의 일을 내 걸고 제 일을 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움켜쥐고,
하느님의 일로 시작해서는 자기 일로 만들어버리곤 합니다.
하느님 뜻대로 한다면서 내 뜻대로 하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한다면서 내 힘으로 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한다면서
사실은 나를 과시하고 내가 칭찬받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뜻대로 잘 안 되면 그때서야 하느님께 찾아와
이 일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당신께서 이루어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경우,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음악회가 그런 것이 아닌지,
그것을 진지하고 냉철하게 되짚어 볼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니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것입니다.
이 떡이 오늘 복음 말씀으로 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 아니겠습니까?
Not doing but being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는 것)
-전삼용신부-
전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을 지닌 무서운 존재가 자신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척박한 사막이 아닌 곳에서 평범한 동물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짐을 싸서 습지로 내려왔습니다.
습지에 사는 동물들은 전갈이 자신들을 공격하러 온줄 알고 겁을 먹었습니다. 전갈은 “나는 너희들과 함께 살고 싶어. 난 다른 전갈들과는 달리 공격적이지 않아.”라고 하며 그들을 설득했고 개구리들이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이 개구리인양 그들과 잘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구리들이 소풍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풍을 가던 중 개울을 건너야 할 때가 왔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며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전갈과 그의 절친 친구 개구리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전갈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등에 태우고 좀 이 개울을 건네줘.”
그러자 친구 개구리는 그가 개구리처럼 살기는 하지만 개울을 건널 수 없는 자신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독침으로 나를 찔러서 죽일 거잖아.”
전갈은 말했습니다.
“바보야. 네가 죽으면 나도 물속에 빠져서 죽잖아.”
그렇게 하여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갈은 개구리 등 뒤에서 깨달았습니다.
‘결국 나는 개구리가 될 수 없구나!’
그는 자신의 본질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여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본질이 전갈이었습니다. 사람의 본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변하게 마련이지만 유다는 그렇게 행동으로 보이려고만 했을 뿐 진정 자신의 본질은 변화하려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아니 위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속여가면서 더욱 사탄의 본질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개구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독침으로 자신을 가장 사랑해준 그리스도를 찔렀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제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묻지만 “제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라고는 잘 묻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본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육체적인 만족을 얻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지 그 본질적인 뜻을 깨달아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리고는 육체를 만족시키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적인 양식을 구하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계속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물어보지 어떤 본질의 인간이 되어야하는지는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행위보다는 믿음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은 거창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나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행위는 존재를 따릅니다. 그러나 본질이 나쁜 사람도 어느 정도는 위선적으로 착하게 보일 수는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안 하는 것보다도 자신의 본질을 전갈에서 정말 개구리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 흉내를 낸다고 해도 그는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아무리 원숭이 흉내를 내도 그는 원숭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본질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영적인 양식이 바로 우리 믿음을 키우고 우리 본질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매일의 양식을 청하는 것인 바로 이 생명의 양식을 청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당신의 몸입니다. 바로 성체가 될 수 있고 또한 당신의 말씀, 즉 성경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신앙인은 성경과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성체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먼저 믿음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성체를 합당하게 모시고 은총도 그만큼 크게 받습니다.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더 믿기 위해서, 즉 더 사랑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면 영적으로는 매일매일 밥을 굶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매일 양식을 먹고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해 나갑시다.
<<짧은 묵상>>
어떤 사업가가 수도회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신자임에도 종교의 구분 없이 가톨릭 수도회를 도와주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은 이윤이 나면 수도회를 돕고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조금은 자선을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광고에서는 자신들의 자선을 보여주면서 기업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도 합니다. 사실 자신을 위한 자선은 육체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보면서 어떤 유명한 목사님의 십일조 설교가 연상되었습니다.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몇 배로 갚아주시지만 하지 않으면 집 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서 반드시 몇 배로 빼앗아 가신다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의 본래 의미보다는 이 세상에서 복을 더 받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당신을 열렬히 찾아온 것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영적인 양식이 아니라 육적인 양식을 찾습니다. 세상에서 배부르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그만큼 돈을 불어나게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 성체에 대한 상징적 기적이었습니다. 그 표징을 보지 못하고 배만 불리는 사람이라면 성체의 가치가 돈보다 작아질 수 있습니다. 즉 돈을 벌기 위해서 성체를 모시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주일날 돈 벌기 위해 미사를 궐하는 경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진 보물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나머지 것을 모두 빼앗아 가시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바쳐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용당하시는 것을 가슴아파하십니다.
한 과자 회사로 찾아온 고객이 거칠게 항의를 했습니다.
“과자 봉지 안에 이물질이 들어 있었소. 그것도 모르고 몇 개나 먹었단 말이오. 어떻게 할 거요?”
담당자가 바로 고객에게 가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배상해 드릴까요?” 하고 사과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동료 직원들도 같이 나서서 고개를 숙였지만 소용이 없었지요. 바로 그때 그 회사의 사장이 나섰답니다. 사장은 그 고객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 말을 들은 고객은 그제야 얼굴을 폈습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지요.
“그 한마디가 듣고 싶었습니다. 아까 왔던 사람들은 그저 변명만 늘어놓았거든요. 이제 마음이 풀리는군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긍정적인 말, 사랑이 가득한 말, 힘이 되어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말보다는 부정적이고 미움이 가득한 말 그래서 힘이 쏙 빼어놓는 말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말 때문에 인간관계가 바뀌고, 이 말 때문에 역사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어제 말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가 또한 말 때문에 기분이 좋았답니다. 어제 강의를 하러 서울을 가다가 시간이 남아서 용산전자상가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직원이 너무나도 불친절한 것입니다. 설명도 제대로 해주지도 않고, 마치 ‘네가 이 설명을 해줘봐야 알겠냐?’는 식으로 무시 받는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제가 물건을 구입했을까요? 당연히 그 집을 그냥 나왔지요. 그리고 바로 옆집에 들렀는데, 그 집은 너무나도 친절한 것입니다. 저는 설명도 듣지 않고 그 집의 물건을 구입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뱉는 말, 그 말은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말과 힘을 빼는 말을 즐겨 사용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다 힘이 되어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힘이 되어주는 구원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이 예수님을 말씀을 들은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힘을 얻었을까요? 세상의 것들이 중요한 것 같았고 세상의 것들로 인해서 아등바등 살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임을 강조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믿기만 한다면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힘이 되어주는 말, 긍정적인 말, 사랑 가득한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스크라테스)
빨리빨리! 더 높이!
-정명숙 수녀-
채워지지 않는 욕구의 충족을 향한 길은 끝이 없습니다. 나라도 사회도 개인도 ‘무한
욕구의 경쟁’에서 최고의 것을 추구하느라 제자리를 잃어버린 채
표류합니다. 최고가 되지 않으면,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바쁘지 않으면
생산지향적인 이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계획들 속에서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은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멈춤이 없습니다. 높아만 가는 건물처럼
사람들도 점점 높아지는 것 같지만 마음속 공허와 고독은
깊어만 갑니다. 오늘 예수님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참된 양식을
얻으려고 애쓰라’ 하십니다.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보라고 하십니다. 내 관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내 삶의 무게 중심이
누구에게 뿌리 박혀 있는지 다시 한 번 인식하라 하십니다.
모든 걱정 가운데에서, 해야 할 많은 것들에 앞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일편단심 하느님의 뜻만을 찾고 행하며 사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꼭 필요한 한 가지’인 영적 양식을 위한 은총을 구합시다.
나는 왜 주님을 찾을까?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헤매다
마침내 당신을 찾아 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어제, 그제는 제가 영적 보조자로 있는 형제회의 피정 지도를 위해
성거산을 다녀왔습니다.
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지만
오가는 길에 형제, 자매들의 얘기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한 얘기는,
사람들이 행복의 상징인 세 잎 클로바는 찾지 않고
행운의 상징인 네 잎 클로바를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과 행운의 차이를 당신들끼리 얘기 나누셨습니다.
또 다른 얘기는,
우리 신앙은 샤머니즘적인 것이 많아서
요즘 어디를 가든지 복을 빌어주는 곳만을 찾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을 합치면 요즘 사람들은 크게 잘 못 되었는데
자기 안에서 그리고 스스로 행복을 찾지 않고
부적과 같이 행운이나 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밖에서 또는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찾은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찾았을 때
주님은 얼마나 씁쓸하셨을까?
하느님 나라를 얻으려고 당신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복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당신을 찾았을 때
주님은 얼마나 그들이 한심하셨을까?
행복의 비결을 당신에게서 찾기보다
당신을 그저 행운을 빌어주는 점쟁이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은 얼마나 한탄하셨을까?
나는 왜 주님을 찾을까?
나는 도우미
- 오정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내 나이 55세에 중도 장애인을 대상으로 글을 쓰며 삶을 치료하라는 권면을 받았다. 중도에 장애를 입은 분들은 여러 해 동안 재활치료에 힘쓰면서도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그들은 자신과 싸우느라고 그동안 가족이 얼마나 고생했는지조차 헤아릴 여유가 없다. 이미 망가진 기능은 포기하게 하고 아직 남은 기능을 강화해 삶에 희망의 불을 놓는 역할을 내가 맡는다. 그들 가슴을 파고드는 방법은 오직 사랑밖에 없다.
무조건 수용하고 사랑하면서 자신을 내놓고 바라보도록 돕기, 가족과 화해하기, 인격적인 매너 갖추기, 글로 좀 더 정확하게 자신을 표현하기, 자신에게 상 주기 등으로 해마다 다른 과정을 거쳐 오늘까지 왔다. 매주 목요일이면 하느님이 주시는 처방전을 들고 생명의 주사를 놓으러 가는 간호사처럼 존재감을 높이고 긍정의 힘을 불어넣는데 가장 경계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받으실 공로를 내가 가로채지 않는 일이다.
내가 그곳을 떠나더라도 그들 가슴에 예수님이 남기를 바란다. 중도 장애인들과 함께 지난 5년 동안 지독하게 연애를 했는데도 아직 지루한 줄 모른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많은 일을 하신다. 빈손으로 드나들었는데도 늘 넘치고, 변화는 남이 먼저 알고 고백한다. 때로는 도우미 인연으로 채워주시고 외부의 도움으로 책도 세 권이나 엮게 하셨다. 그들의 글은 진솔해서 눈물 없이 읽기가 어렵다. 나는 그들이 복음을 믿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데 쓰이는 도우미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안에서 분명히 쉽게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하느님 나라가 엉뚱한 곳에만 있다고 생각하기에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원하는 곳은 책이 잔뜩 쌓이고 잉크가 가득 놓인 방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반이 가득 쌓이고 질 좋은 오디오가 놓인 방을 원할 것입니다. 또 새 옷 입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화려한 새 옷이 줄줄이 걸린 옷 방을 원하겠지요. 이밖에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각종 술로 가득한 방을,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으로 가득 찬 방을 원할 것입니다.
이렇게 원하는 그곳이 바로 각자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걱정거리가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미움과 불편한 마음이 가득할 수가 있을까요? 아니지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걱정거리가 없으며, 사랑과 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가득 찬 곳이 반드시 하느님 나라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없는 곳 그리고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곳이 오히려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향긋한 아기 냄새가 있는 곳,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좋아하는 일이 있는 곳, 행복한 취미가 있는 곳, 소박한 행동이 있는 곳…….
이러한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쫓고 바라보는 욕심으로 인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인 것이지요.
이 문제는 과거에도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셨던 이천년 전, 사람들은 주님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요.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눔의 중요성을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을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속의 굶주림 해결만을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저분을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찾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는 사람들을 향해 과거에 하신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그 완성의 몫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을 하지 말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하도록 합시다.
인간의 양식
-임준기 신부-
“배고파 죽겠다!” 우리의 위장이 비어 있을 때, 우리는 배고파 죽겠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위장이 비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또한 본능적으로
우리의 머리는 위장을 채워야 한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표현하게 됩니다.
위장이 든든히 채워지면 인간의 육신은 비로소 만족하게 되고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과연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만으로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분명히 육신의 배고픔을 넘어서는
영혼의 배고픔이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음식을 가득 섭취했다 하더라도
자유와 진리, 사랑이라는 영혼의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은
결코 만족하거나 평화를 누릴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과 함께 영혼의 양식은 인간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한 기본적인 두 가지의 음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의 배고픔에
본능적이며 즉각적으로 반응하듯이, 영혼의 배고픔에도 즉각적이며
열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함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닐까요?
우리의 변모
-김우정 신부-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할 때의 일입니다. 새로 영입된 거스 히딩크 국가 대표팀 감독이 선수들의 체력이 부족함을 지적했을 때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체력과 정신적인 면에서는 우수하나 기술이 부족해 제대로 성적을 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이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대표팀에게 기초 훈련을 반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월드컵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대표팀의 지칠 줄 모르는 경이적인 체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 체력을 기반으로 한국 대표팀은 그전에는 넘보지 못한 월드컵 4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우리의 기초는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나 기초라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갈고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깊이에 따라 신앙생활의 실천도 깊이를 달리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과 믿음 없이 인정받기 위해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처음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분명한 차이가 납니다. 이 믿음을 다지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고 애덕의 실천에 힘써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한층 기초를 굳건하게 다지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닮은 신앙인으로 변모해 갈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오상선신부-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추구할 게 없다면
그 인생은 생동감이 없고
재미가 없게 마련이다.
그런데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우리네 삶은
목표가 현세적이다.
따라서 우리의 추구는 현세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먹고 살기에 급급하기에
돈을 추구하고 재산을 추구한다.
꼭 나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하늘처럼 불어만 가는 자식들의 교육비와
장래의 노후생활을 생각하면
이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명예도 추구한다.
남에게 지고 싶지 않고
아니, 적어도 남이 보기에
우러러 볼 만한 사람이 되고자 추구한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속상해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것이 어느 정도 충족된다고 생각하면
그다음으론 쾌락을 추구한다.
좀 즐기자는 것이다.
어디 놀러갈 데가 없나,
잘 먹을 데가 없나,
남보다 더 즐김으로써 자신이 행복함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추구는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허상인데
우리는 현세의 바람몰이에 휘말려
이러한 것을 추구하느라고 허리가 휜다.
나도 모르게 이러한 추구에 빠져 허덕인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우리가 추구하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의 죽음과 더불어 썩어 없어질 양식이다.
그렇담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이란 무엇이고
또 그것을 어떻게 얻어야 한다는 말인가?
<영적인 것>은 영원하고 썩지 않는다.
한마디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란 말이다.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느라 모든 힘을 소비하지 말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힘써라.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얻도록 힘써라.
내 마음 속에 깊이 보람과 솟아나오는
영적 기쁨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하루에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러한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소비하고 있는가?
하루 24시간 중에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투자하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오늘 하루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헤매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올바른 추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그 선물을 찾아 얻도록 하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 영적인 선물을 주시고자 기다리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딴 데서 엉뚱한 것만 받으려 하고 있으니....
오호통재라!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김찬선신부-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다른 것은 없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
즉 당신을 믿는 것뿐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답하십니다.
이 대답에는 다음과 같은 묘한 여운이 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말이냐?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네가 하겠다고 나설 일도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우리 인간이 하겠다고 하는 것이
주제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실상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지
우리 인간이 할 일도,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제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또는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나병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자기가 무엇을 단단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저 요르단 강에 몸을 씻으라고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는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부족함이 있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업적을 우리 안에서 이루시면서
우리에게 보상으로 뭔가를 요구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은 그분께 개방하고 맡기는 것이니
믿는 그 안에 그분께서 들어오시어
그분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분께서 무엇을 하시는 것이고
그분께서 하실 때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내가 할 때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자기의 일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
무엇을 하지 않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무엇을 할 수 없어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과 창조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 사랑의 그 충만에 우리도 참여하도록
우리를 협조자로 삼으시는데,
이 때 우리는 그분 사랑의 도구들일 뿐이고,
그분 사랑의 손과 발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독서> :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거스르는 유다인들
- 경규봉 신부-
스테파노는 자선사업을 위해 뽑힌 일곱 명의 봉사자 중 한 사람으로 그리스 계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였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공동체 내에서 자선을 베푸는 데에도 앞장섰지만 복음을 충실히 전하였다. 그가 백성들 앞에서 기적과 이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파하자, ‘자유인의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이 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와 성령을 받아 말하는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적대자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테파노가 하느님과 모세를 모독하며 성전을 더럽혔다고 모함하여 그를 붙잡아 의회에 세웠다. 사실 유대교 신자들이나 예루살렘 거주민들은 성전에 관한 문제를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많은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성전으로 인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각처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해서 막대한 헌금을 봉헌하고 있었다. 또한 매 절기 때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 많은 헌금을 했고, 많이 지출했기 때문에 성전은 도시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전에 대한 공격은 곧 그들의 생활권의 침해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스테파노를 끌어오도록 했다.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던 유대인들은 기원전 63년 전쟁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들로서 귀국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외국에서 오랫동안 멸시받고 고통당하는 생활을 하였기에 조국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 국수주의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성전과 율법에 대한 애착심이 남달리 강한 광신도이기도 했다.
때문에 예수님처럼 성전의 부패된 제사와 전통만을 고집하고 사랑을 거스르는 율법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는 스테파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적대자들은 스테파노가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다고 모함하여 그를 붙잡아 의회에 세웠다. 더욱이 예수님 당시에는 민수기(15,30)의 “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일부러 죄를 짓는 자는 야훼를 모욕하는 자이므로 제 겨레로부터 추방당해야 한다.”는 말씀에 따라 신성모독죄를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고발했던 것처럼(마태 26,61; 마르 14,58; 요한 2,19-22)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무고한 자를 사형에 처하게 하려고 법정에서 거짓 증언하는 것은 극악한 범죄이다(잠언 6,16-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수주의와 광신에 빠져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그를 고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은 오늘날에도 많은 종교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 하느님을 선포하는 그리스도교에서조차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경우가 역사 안에 수없이 있어왔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사랑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의 중심에는 항상 ‘자기’가 있다. 결국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내세우기 위하여 하느님을 거스르고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 자기 나라, 자기가 속한 단체 등등 자기를 위하여 하느님과 그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하는 참된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이것이 곧 광신이다. 광신이란 그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없고,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광신이 불신보다 더 무섭다. 불신은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광신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로 인하여 참 하느님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박해를 당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16)라고 말했다. 모든 행위의 기준은 언제나 사랑이며, 사랑을 거스르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신앙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아버지의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행동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고린 13,2)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한다.................◆
금의환향
-노성호 신부-
제 고향은 전통적으로 불교 집안이 많은 곳으로 저희 집을 포함한 몇몇
집들만이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면서 그들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제가 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이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의젓한 사제의 모습을 갖추고 등장했으니
그들의 반응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으니까요. 제 어린 시절 모습을
알고 계신 동네 어르신들, 아무런 허물없이 뛰어놀았던 개구쟁이 친구들,
그리고 저희 식구들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던 이웃들이건만 그들의 시선은
마치 낯선 이를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저는 농부의 아들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마리아고, 할머니도 마리아며, 동생은 프란치스코입니다. 사람들은 저희
식구들 모두를 알고 있고, 지금도 저희 식구들은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저희 식구들이 그동안 걸어왔던 기쁨과 감동의 나날들, 때로는
고통과 슬픔으로 다가왔던 위기의 순간들은 진정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가 되어 돌아온 저와 제 식구들을 신비롭고 경이롭게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예수님보다 나은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셨지만,
적어도 저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말씀지기 2006 4/5월호 5월 1일-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한 6,24-27)
예수님께서는 5천명을 먹이신 뒤 자리를 뜨셨습니다.
다음 날, 그곳에 남아 있던 군중들이 열심히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필사적이었을지 쉽게 상상이 갑니다.
주님께서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그 많은 군중을 먹이셨으니 말입니다!(요한 6,4-13)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기적 놀이?
공짜 음식?
아마도 그들도 흥분에 싸여 자신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게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6,26)
예수님께서는 빵으로 그들의 굶주림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빵에 마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진정으로 만족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육체적 굶주림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 이 두 가지를 모두 돌보고 계심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처럼 순수하고 너그러운 주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영혼을 불타오르게 하고 주님을 찾아 나서게 했던 것입니다.
군중은 자신들이 한 번 체험한 것에 이끌려, 주님을 다시 만나 뵙고 그분 사랑을 또다시 맛보고 싶어 바다를 건너려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바치거나 성경을 읽을 때, 미사나 전례에 참례할 때,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갈망이 꿈틀거리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감동케하고 채워 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감동시키고 채워 주고자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관심과 열망을 알아보시며 돌보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응답해 주십니다.
더없이 완벽하고 완전하게.......
빵의 기적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쏟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영원한 행복을 안겨 줍니다.
우리의 문제는, 기적적으로 군중을 먹이신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설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최선의 해결책은 예수님을 쫓아가서 그분이 당신을 먹이도록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말씀드리세요.
"저는 주님의 사랑을 알기를 열망합니다!"
이미 알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더 많은 것을 청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은 바닥 나는 일이 없으니까요.
오늘, 기도 중이나 미사에서, 아니면 어디서든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릴 때 마음을 여십시오. 그러면 사랑으로 당신을 가득 채워 주시고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주님의 사랑을 알기를 열망합니다.
청하오니, 오늘 저에게 먹을 양식을 주십시오.
주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주님께로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문병찬 신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늘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이 질문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한가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간단하고 명확하게 답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의 근원이
바로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를 믿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럴 때 십계명은 우리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요한 기준이 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을 위해서 봉사할 줄 알고,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들,
곧 시간과 능력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놓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척도로 삼는 것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훌륭한 방법이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아멘.
세상에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 김경욱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즈음 봄꽃들로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마치 주님 부활의 생명력이 약동하는 듯합니다.
생명을 주시러 오시는 예수님은 당신의 몸과 피를 생명의 양식과 음료로 주셨습니다. 하늘이 주는 생명의 물과 빛으로 땅에 생명이 넘쳐나듯 우리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하면서 억지로라도 왕으로 세우려 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애타게 찾고 있었고 마침내 주님을 찾았습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하며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애타게 주님을 찾았던 근본이유에 대해서 복음서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먹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위한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음식을 먹어서 에너지를 만들어 몸의 기관에서 사용함으로써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배가 고팠을 때에는 먹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은 배불리 먹었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배를 채워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배불려주신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하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끔 우리들도 일을 하면서 이렇게 푸념하곤 합니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다’ 즉 일하는 목적이 먹는 것인지, 먹는 목적이 일하기 위함인지 잘 분간은 되지 않지만, 먹는 것이 우리 삶의 중심으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세상에는 먹을거리가 참 많습니다.
밥도 있고, 빵도 있고, 푸른 야채와 해초, 그리고 바다속 물고기며 들판의 육고기며 참으로 우리의 배를 불리게 하는 것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독입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입니다. 좋은 것이라도 과하게 먹으면 탈이 나기도 합니다. 먹는 행위도 중요하고 먹는 내용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없어지지 않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입 안으로 들어와서 소화되어 에너지로 변화고 소멸하고 마는 육신의 양식이 아닌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먹으라고 주님은 재촉하고 계십니다.
없어지지 않는 영생의 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군중들이 “저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아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을 얻는 첫 단추라는 것입니다.
밥이 육신의 생명을 주는 것처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밥이 되고 먹히기 위해서 세상에 가장 낮추인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성체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빵을 배불리 먹고서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 즉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발걸음부터 다를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추구합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합니다. 좋은 말을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합니다. 희망을 이야기하며 실패를 생각지 않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사랑합니다. 또 웃을 수 있는 곳으로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으로 내 이웃을 한번 더 웃게 해서 생명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갑시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
-김유철 신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 군중들은 예수님을 더욱더 찾아다닙니다.
오시기로 된 예언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별로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26)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보여주려는 표징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표징을 보았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오신 예수님을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보다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분으로만
예수님을 본다면 그는 언제든지 필요가 사라지면 등을 돌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해줄 예언자, 즉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구약의 예언서에도 구원자를 하느님이 꼭 보내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구원자 메시아는 힘으로 원수 세력을 이기고 복수해주는 분이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이길 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6,27). 대학 입시나 명절 등 사회적으로 큰 일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모여와 간절한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썰물처럼 자리가 비어버립니다. 영원한 양식을
꿈꾸는 신앙인이라면 꾸준히 주님을 찾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영혼의 건강법
-이세영 수녀-
피정 지도 중에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것이 웰빙 시대에 맞는 건강법에 대한 것입니다. 침·뜸·바이오·식이요법·미용 등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며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건강법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 가지고 있는 특기를 내세우면서 열성적으로 이야기할 때 때로는 살짝 끼어들어 사부 성 베네딕토의 말씀이나 오늘 복음 이야기를 건네보기도 하지만 잠시 듣는 듯하다가 어느새 다시 건강 이야기로 되돌아가곤 합니다.
그래서 이제 저도 그분들의 대화에 새로운 건강법을 들고 끼어볼까 합니다. ‘영성을 살찌우는 특급 영양제!’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그토록 열심히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작 박학해져야 할 지식은 오늘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있음을, 또한 건강법을 전파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써야 함을 간혹 잊고 있는 듯한 분들을 볼 때면 안타깝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보며 이제 더 많은 현대인들이 참된 영혼의 건강법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인 예수님의 말씀에 나의 마음과 영혼을 활짝 열어놓을 때 진정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봅니다.
<죽은 사람이 입던 옷을>
-양승국신부-
오늘 오후 저는 아르테미테 자티 수사님(1880-1951, 아르헨티나 태생, 평생을 병원 사도직에 종사)의 전기를 읽었습니다("자티" 피터 라핀 저, 이선비 역, 돈보스코미디어).
책장을 넘길수록 자티 수사님의 감동적인 생애는 저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 죽은 사람이 입던 옷을 -
쉰 살이 된 자티 수사는 옷에는 도통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양복은 몇 십 년을 입었던지 색을 분간하기 힘들었고 자켓은 다리지 않았으며, 바지는 무릎이 불룩 나왔습니다. 그는 늘 헌옷을 입고 있었는데, 차림새로 보아 그 옷들은 대개 남이 입다 버린 것들이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죽은 사람의 옷을 입은 적이 있었는데, 너무 낡은데다 냄새까지 나서 사람들이 불평하자 자티 수사는 "이 냄새야말로 덕행의 향기입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 우리 구세주께 드릴 바지 -
병세가 너무 깊어 다른 병원으로부터 거절당한 중환자나 병원비가 없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환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자티수사는 병원 직원에게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우리 병원을 축복해 주러 오신 착한 목자께 내드릴 방이 있나요?" 자티 수사는 또 자주 "우리 구세주께 드릴 코트나 바지가 있습니까?" 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 구세주"란 한 평생 말쑥한 코트나 바지를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자신의 침대까지도 양보를 -
한번은 병세가 위급한 인디언이 병원에 왔는데 병상은 물론 간이 침대 마저 없었습니다. 자티 수사는 그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 침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미안했던 그 인디언은 담요를 하나 가져오더니 바닥에 펴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작은 실랑이가 오가던 중 자티 수사는 바닥에 누운 인디언을 안아다가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은 자티 수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권고하십니다.
자티 수사님의 전기를 다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영원한 생명의 향기"가 한동안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향기로운 삶이 자티 수사님의 삶이었습니다.
사심 없는 봉사와 철저한 헌신, 겸손한 미소를 통해 오늘 시복 되신 자티 수사님의 삶이 모든 의료인들의 귀감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초대장
-강영구신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눈발처럼 흩날리는 저 벚꽃들은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곧 연록(軟綠)색 잎들이 피어날 것이고 녹음이 짙어지면 달콤한 버찌도 열릴 것입니다.
스러지듯 꽃들이 떨어진다고 아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흩어지는 구름처럼 떨어지고 있는 저 꽃들은 초록의 풍요로움과 풍성한 결실로의 초대입니다. 어차피 떨어지고 말 꽃들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에 취해서 낙화(洛花)를 아쉬워한다면 초록의 풍요로움과 결실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예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초대장을 내밉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요한4,15)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대장입니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요한6,1-15).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신 빵과 물고기는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대장입니다.
야곱의 우물물과 빵 다섯 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을 하늘나라에로의 초대장입니다.
초대장을 받은 것은 큰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나 초대장을 손에 들고 좋아하며 정작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면 잔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초대장보다 잔치가 더 중요합니다. 만사를 제켜놓고 초대에 응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오늘 찬란한 아침을 여시면서 하늘나라에로의 초대장을 건네십니다.
초대장을 받은 당신은 행운아입니다.(一明)
사람들이 예수를 찾는 이유
-박상대 신부-
지난 금요일부터 오는 토요일까지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이 미사전례복음으로 봉독된다고 하였다. 지난 토요일에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신 내용(6,16-21)을 복음으로 들었다. 오늘 복음은 군중들이 갈릴래아 호수 동편에서 예수님을 찾아 가파르나움으로 이동했다(22-24절)는 보도와 여기서 내리시는 빵의 기적에 대한 가르침(25-59절) 중 그 도입부에 해당하는 첫 부분(25-2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 지방의 가파르나움은 유다 지방의 예루살렘만큼 중요한 장소로 부각된다. 여기서 예수님의 놀라운 빵의 기적이 베풀어졌고 그 기적에 대한 진정한 해석과 가르침이 주어지기 때문이며, 그 외에도 가파르나움은 예수께서 거주하셨던 곳이며(마태 4,13), 이곳에서 많은 가르침과 행적(루가 4,23)이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이 가파르나움에서 예수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였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찾았을까?(24절)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찾는 것일까? 그들은 분명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 천명을 먹인 '예언자'를 찾고 있으며, 그들을 다시금 배불리 먹일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왕'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얻고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빵의 기적을 행하신 호숫가에서 이곳 가파르나움으로 장소를 옮기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위하여 수고스럽게 장소를 옮기셨다. 그렇다고 가파르나움에까지 와서 예수를 찾아낸 군중이 새로운 가르침을 받기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은 빵의 기적에 대한 감동과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곧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육적인 세계에 대한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빵을 배불리 먹었던 기억을 군중의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하신 것이다. 한꺼번에 둘 다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적인 세계를 갈망하면 영적인 세계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고,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비로소 갖추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썩지 않는 양식이다. 이 양식을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권능과 함께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육신만을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기'보다는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신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 첫걸음이자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이 양식이 어떤 것'인지를 묻기보다는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결론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인간의 업적이나 성덕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신 사람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인간 자체의 참 생명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구하자 †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는 자세에 대해서 명확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즉,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을 묵상하기 전에 좋은 글이 있기에 여러분과 함께 나눠 보기로 하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한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이 나무에 봄이 왔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보고 기대하는 그것이 같이(함께) 되지 않으면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즉 함께하지 않으면서 이렇다 저렇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양치식물의 꼬불거리는 잎사귀와 검은 줄기가 되어야 하고, 잎사귀들 사이 작은 침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잎사귀들이 꺼내 보이는 평화로움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어떤 것을 알려면 그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래 바라봄 안에, 그 대상과 더불어 오래 머묾 안에서 비로소 그 대상이 지닌 외면의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수도자이기에 관상생활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산도 바다로 종종 나갑니다. 지난 어느날 관상(묵상)을 목적으로 동해안 바닷가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의 색깔이 푸르다고 합니다. 일견 볼 때는 분명 푸른색입니다. 그러나 한 시간 쯤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저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다는 온갖 색을 다 지니고 있는 ‘현란한 색깔들의 무도회장’이었습니다. 그 때의 감동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사물은 처음 본 것과 자주 본 것, 그리고 오래본 것 등에 따라 사물에 대한 실상과 느낌에 차이가 있습니다. 또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저 친구 처음 볼 때는 별로였는데 오래 사귀고 보니까 진국이야......"
양치식물의 잎사귀들이 지닌 침묵과 평화를 알고 느끼는 것이나 바다가 지닌 아름다운 색깔들의 현무를 바라보기 위해, 그 침묵과 춤 안으로 들어가서 머물러야 한다면, 소우주라고 불리는 인간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머물러야 하는지요? 참으로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교리 몇개월 학습하고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각각의 천주교회와 단체들이 신자들의 지속적인 영성향상을 위해서 다양한 자료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본 묵상공간에서도 '하느님의 공간'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고 하는 감사의 덧글도 자주 봅니다. 한편으로는 쥐꼬리만한 성서 지식을 가지고 하느님을 다 아는 목자인척 하면서 신자들을 이끌려고 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복음에서 신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우리에게 전해주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영혼까지도 팔려고 하는 세상인데,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배부르지도, 맛있어 보이지도 않는 성체가 뭐가 그리 우리 삶에 중요하다고 그러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강조한 영혼의 양식, 즉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당시 유다인들에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듯이 오늘날 일반인은 물론이요, 신앙인들에게까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래의 천국행이라는 약속어음보다는 오늘 배부르게 하는 현금을 중시할 수 밖에 없는가 봅니다. 다시말하면 어떤 노랫말에 보듯이 '뭐니 뭐니해도 Money가 최고다!!!...라는 말이 대중적 심리인가 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눈뜨고 잠들 때까지 한시도 쉼 없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즉 돈에 관심을 집중할 수 밖에 없는 물질경제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먹고 사는 일에 신경을 쓰는 생활을 하다 보면 영육이 지쳐버려서, 하느님 일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어진다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먹고 사는 일 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빡빡한 시간 가운데에서도 가끔은 우리의 눈을 하느님께 돌려 영혼의 목마름과 갈증을 풀는 시테크의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목마름과 갈증은 세상의 음식이나 욕망으로 풀 수는 없다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찾는 굶주림을 두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굶주림은 세상의 음식이나 현세의 욕망으로는 먹어도, 먹어도 만족을 느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아멘).......◆
-두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