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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산에 들에
이선규
등받이를 젖히니 자세가 한결 편안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다섯 시경에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부족한 잠 때문에 피곤을 염려할 일은 없다. 그러나 짧지 않은 버스운행시간을 고려한다면 편안한 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삼 년 가까운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장거리여행에 대한 요령이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버스에서 내릴 때 다리가 후들거렸던 경험을 한 이후에는 각별히 자세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네 시간에 걸친 운행시간이지만 이제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 달에 두 차례씩, 반복된 경험에 의한 내력이 어지간히 생긴 모양이다. 잠이 오면 물리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눈을 감았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아들 영휘다. 덜컥 겁부터 났다. 영휘는 나와 전화통화하는 것을 꺼렸다. 저는 특별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아니었다. 그런 영휘가 이른 아침에 전화하다니. 혹시 나쁜 일은 아닐까? 어제도 귀가를 기다렸지만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전화도 없었다.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잘하고 돌아다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다음부터는 늦어도 기다릴 뿐 전화하지 못했다. 서른이 되었으니 저도 아버지의 잔소리가 불편하고 귀찮기도 하리라.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선언하고는 그게 마치 면죄부라도 되는 양 걸핏하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지 선을 뵌다고 말만 되풀이했을 뿐 그럴 기미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쪽 집에서도 여식이 집을 비우면 나처럼 걱정을 할 텐데. 어쩌면 녀석은 사귀는 여자도 없이 핑계거리만 만들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누나가 애를 낳았대요. 딸이래요.”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거두절미, 동전교환기에서 동전 떨어지듯 용건부터 쏟아낸다. 뜻밖에도 반가운 소식이라 나도 모르게 음성이 높아졌다.
“그래, 영주랑 아기는 건강하대?”
예정일보다 훨씬 이른 해산이었다.
“괜찮겠지요, 뭐. 무슨 일이 있으면 다시 전화드릴게요.”
영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길어질까 지레 막음하는 눈치다. 첫째가 아들이어서 둘째는 딸이었으면 좋겠다던 바람이 통했나 보다. 게다가 영주 시댁에서도 반길 것을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다만 사위가 외국에 출장 중이어서 영주가 다소 섭섭하겠지만, 자식이 서두른 걸 어찌하겠는가 싶다. 예정일보다 이른 해산인데 아무쪼록 딸과 손녀가 건강했으면 좋으련만. 내일은 일찌감치 병원엘 가보리라.
사흘 전에도 영주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전화해서는 또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였다.
“아버지! 고집 그만 부리시고 이제 연세도 생각하셔야지요. 더구나 할머니께서도 안 계시니 정말 더 외로우실 텐데. 요새는 노후에 서로 의지하면서 다 잘들 사시잖아요.”
딸애는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전화했다. 자주라기보다 틈만 나면 전화하는 것 같았다. 제 아는 선배의 어머니가 혼자된 지 꽤 오래되었는데 마음을 정하고 한번 만나보라고 졸라대었다. 저희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십 년이 되니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 사그라졌는지 엄마가 들으면 섭섭해할 말을 골라서 했다.
“엄마도 이해하실 거예요. 혼자 외롭게 사시는 거 마음 아파하실 거라고요. 고집 좀 그만 부리세요.”
어떤 때는 달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윽박지르기까지 하면서 채근했다. 딸애는 엄마가 하던 잔소리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 같았다. 토씨조차도 똑같아지고 있다.
“그렇게 혼자 계시면 병만 생기고 주변에서 보기도 나쁘잖아요.”
내가 저한테 의지한 것도 없는데 오지랖도 넓었다. 차일피일하다가 하도 졸라대니 몸 풀고 나면 시간 맞추자고 미루었는데, 이제껏 얼버무리고 미루었던 일이 그만 코앞에 닥치고 만 셈이 되었다. 은근히 귀찮고 성가셨다. 하지만 그때 되면 또 무슨 모면할 방법이 생기겠지 싶다.
첫 손자를 보았을 때 느낌은 영주와 영휘를 보았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결혼 후 몇 해가 지나고서야 어렵게 얻은 자식들이니 기다림만큼이나 반가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왠지 낯설고 생소했다. 내 아이라는 느낌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아이들이 백 일 정도를 지나니까 그제야 조것들이 내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었다. 그러나 손자는 달랐다. 태어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것을 안아보니, ‘아, 이 아이가 내 핏줄이란 말인가!’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고 콧등이 시큰했었다. 생김생김이며 눈도 뜨지 못하고 하는 짓이나, 잠자는 얼굴이나 모든 게 다 신기하고 예쁘기만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손자를 화제에 올렸다. 처음에는 그저 관심 있는 척 들어주던 친구들도 차츰 시간이 지나자 시들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새로운 사건을 들춰내어 그들의 관심을 끌고자 애썼다. 아이가 방긋방긋 웃는다는 둥 제 할아비를 잘도 알아본다는 둥. 마침내 친구들은 세상에서 혼자만 손자 본 사람처럼 군다고 빈정댔지만 내 자랑은 성이 차지 않았다. 영주가 보내준 손자의 사진들을 모아서 컴퓨터에 앨범을 꾸며 저장하고 그것을 펼쳐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극성맞은 할아비 정도로 치부하던 친구들에게도 하나 둘씩 손자가 생겼다. 생전 손자 자랑은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것 같던 친구들이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았다. 어떤 친구는 여러 장의 사진을 자그마한 액자들에 담아 몸에 지니고 다녔다. 남들이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법했다. 또 다른 친구는 아예 딸네의 아파트 같은 동으로 이사를 했다. 모두들 나를 능가하는 극성들이었다. 손자가 유난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유는 자식을 키워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더니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식의 자식이니 두 곱인 건가? 문득 품 안에서 꼬무락대는 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태어난 손녀가 두 팔과 두 다리를 벋대는 것 같았다. 벌써 영주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불현듯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는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모든 이별은 작거나 크거나 재회에 대한 가능성을 남긴다. 따라서 어떤 희망적인 의지가 작동하면 이별의 슬픔이 재회의 기쁨으로 되돌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재회의 가능성을 영원히 차단하기 때문에 다른 이별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어떠한 종류의 이별과도 견줄 수 없는 깊고 아픈 슬픔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빈자리를 현실로 느끼기도 전에 깊은 슬픔에 젖었다. 거기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한 몫 하였다. 고교졸업반인 쌍둥이 아이들은 어찌 건사할 것인가? 무엇 하나 혼자 할 수 없는데 아내마저 없다니. 사업인들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편안히 여생을 즐기지도 못하고 서둘러 떠난 아내의 가여움보다 내가 살아야 할 걱정이 먼저 앞섰으니 참으로 이기적이었다. 청상과부가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남편 무덤 앞에 줄 세워놓고 통곡하는 이유는 남편의 죽음이 슬퍼서라기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서 우는 것이라는 말이 내게도 다르지 않았다.
좀 더 살았으면 좋았을 걸. 세월을 이만큼 훌쩍 건너오니 매사에 아내의 부재가 더욱 절실했다. 이렇게 길을 나설 때 아내와 동행한다면 이 길이 얼마나 색다르고 편안할까? 외로움이 뼈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손자도 보지 못하고 떠난 아내다. 영주가 둘째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하였을까? 계속되는 혼수상태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을 쉬던 아내가 믿기지 않게 두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아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길러주시고 집안 살림을 꾸리시느라 팔순을 앞둔 노구에도 불구하고 쉴 틈이 없으셨던 시어머니에게 그저 죄송할 뿐이라고. 그 죄송함을 덜자면 더 오래 살아서 갚아드렸어야지…….
나의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살림살이가 빠듯했던 아내는 장사를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조그맣게 반찬가게를 열었는데 입소문을 타고 장사가 번창했다. 동네를 벗어나 대형마트에 입점하면서 수입도 나아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애초 기대치가 높지 않았으니 부러운 것도 없었고 아이들도 마음껏 기를 폈다. 몇 년의 세월은 참으로 달고 저절로 신이 났다. 이토록 기쁘고 즐거운 것이 인생인 줄 미처 몰랐다니. 앞으로 다가올 나날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시절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오던 아내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중환자실에서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내가 돈을 펑펑 잘 벌어다 주었다면 아내는 편안히 살림만하며 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온몸이 해체되는 것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아내를 대신했다. 아이 둘과 나를 바라지하느라 분주해졌다. 사 남매를 키우신 어머니이니 어려울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당신도 팔순을 바라보는 세월을 다스리기에는 힘이 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삼 년 전 겨울이 밀려나고 구석구석에서 봄이 뾰족하게 솟아오르던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추위 때문에 중단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운동이라야 아파트 단지를 쉬엄쉬엄 몇 바퀴 걷는 것이 고작이지만 기력에 적잖이 보탬이 된다며 꾸준히 지속하던 터였다. 그날도 운동 채비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오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방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우측 고관절과 늑골 세 개, 그리고 척추 두 군데가 골절되는 중상이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의사의 진단이 아니어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근처 병원에서 한 달간 치료를 마치고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홀아비 아들보다는 딸의 손길이 가깝게 닿는 곳이 나을 거라는 판단에 따라 동생이 사는 도시의 요양병원을 선택하였다. 나는 여태껏 함께 살아왔던 어머니와 이별해야만 했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창졸간에 빚어진 일이었지만 아내의 사고도 그랬고, 어머니의 부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무 일도 예측할 수 없었다.
직원 예닐곱 명과 제조업을 하던 나는 공장을 처분했다.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몇 달 뒤였다. 환갑 지난 지 엊그제면 한창 일할 나이라고 주변에서 말렸지만 갑자기 밀려드는 피로감과 의욕상실이 공장운영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렸다. 그저 쉬고 싶었다. 어찌어찌해서 영주는 시집을 보냈으니 큰 걱정은 던 셈이었다. 다행히 영주의 시집이 고만고만한 살림 사는 사람들이어서 부담이 덜했고, 아내가 꾸리던 가게와 남겨놓은 것을 더하니 꿰어 맞춰졌다. 영휘는 대기업에 일자리를 얻어 한 해 다니더니만 제 사업을 하겠다고 뛰쳐나왔다.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컴퓨터 몇 대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니 뜻은 가상하지만 불안하기는 우물가에서 걸음마 배우는 아이 못지않았다. 저 하는 일에 간섭하는 거 달가워하지도 않았고 아버지와는 세대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세세한 것을 상의해서 할 아이는 아닌 줄 알았다. 그래도 걱정과 근심을 이기지 못해 몇 마디 붙이면 대번에 닫아버리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무언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니 걱정 반 근심 반 지켜보는 처지였다.
반찬가게가 그나마 성시를 이루어서 돈이 좀 모이자 아내는 너른 아파트로 옮겼다. 마침내 온 가족이 활개를 펴고 살게 된 것이다. 그때 장만한 아파트에서 여태껏 살고 있는데 영휘는 툭하면 집을 비웠으니 결국 나 혼자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어머니도 있고, 아내도 있고, 영주도 출가하지 않았을 때는 넓은 줄 모르고 살던 집이었다. 그러나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고 빈자리가 많았다. 마치 짝이 맞지 않는 가구들이 널려진 창고처럼 어수선하고 휑하기만 하였다.
언제까지 살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약간의 저축과 이자수입이 있으니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는 있을 터였다. 영휘가 장가를 가든가 독립한다고 하면 아내가 장만한 아파트를 처분해서 내 살림살이 옮길 작은 곳 하나 마련하고 나머지는 영주와 영휘에게 다 나누어 줄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가 입원한 다음 그동안 막연하게 머릿속을 뱅뱅 돌던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한 계획들을 세우고 결론을 얻고 나니 참으로 의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0년을 넘겨 살아온 삶이 이토록 수수깡 부러지듯 간단하게 정리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동안의 삶이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같아서 풀어헤쳐 정리하는 데에도 어지간한 수고가 뒤따르리라 짐작하였는데, 막상 펼쳐보니 노트 한 장 채울 정도도 되지 않다니.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그렇게 허를 찔리고 나니 인생 참 가볍고 별 볼 일 없다는 실망과 자조가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마치 누군가에게 배반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분하기도 하였고, 보물이라고 애지중지 보관했던 것이 돌덩이보다 못한 물건인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소주잔에 타서 마신다면 그저 석 잔도 채 안 될 것 같은 하잘것없는 인생이었다.
휴게소에서 15분간 정차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럭저럭 목적지의 절반 즈음을 통과한 셈이다. 요깃거리는 생각 없었지만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전립선에 문제가 생기는지 어디를 가려면 화장실부터 찾게 되고 중간에 화장실을 가기 편한 길만 가게 되었다. 일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나이 탓이려니 하고 귀찮아도 참을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다. 휴게소를 벗어난 버스는 다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영주와 손녀가 궁금했다. 사위가 옆에 있다면 전화해보련만, 사돈은 어려웠다. 그들도 사돈이 어려우니 내게 직접 전화하지 않고 영휘를 통했으리라.
고속도로는 계곡에 다리를 놓고 높은 산엔 굴을 뚫어 이어졌다. 지상에서 상당히 높은 지대였으니 버스에 앉았지만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처럼 도로변에 아기자기 모여있는 농촌의 마을이나 오소소한 풍광을 차창을 통해 본다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세상이 곧게 뻗고 빠른 것만 추구하니 도로도 예외는 아닐 테다.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깊고 깊은 산속엔 아직 봄이 멀었다. 잔설이 드문드문하고 새순의 기미도 없었다. 띄엄띄엄 과수원이 보였지만 그저 정적에 감싸인 채 여전히 겨울이었다. 요즈음 아파트 단지 화단에는 목련이 꽃망울을 잔뜩 머금고 있는데 산속은 매우 늦다. 그래도 다음 번 이 길을 지나갈 때면 산에 들에 새순이 돋고 봄이 한창일 것이다. 여동생이 전화했다. 터미널로 마중하겠다고 한다. 내가 병원에 오는 날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내가 함께 식사를 했다. 내가 음식 장만할 처지가 못 되니 음식준비는 고스란히 동생의 몫이다.
병원은 고즈넉한 산사처럼 아주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다. 동네병원을 퇴원하고 구급차로 어머니와 함께 도착했을 때, 노인들의 요양병원이라서 하얀색 일색이려니 했던 예상은 빗나갔다. 병원 외관은 현대식 건축재료들이 사용되어 마치 오피스 건물같이 세련되고 날렵한 느낌을 주었다. 주변 숲과도 조화를 이루어 병원이라는 느낌이 들지도 않았고, 시설도 기대 이상으로 잘 갖춰져 있어서 적잖이 마음이 놓였었다. 산이 깊어서인지 병원에도 아직 봄기운은 내려오지 않았다. 군데군데 잔설이 여전히 남아있고 음지에는 두툼한 얼음이 아직도 그대로다. 굵은 등나무들이 엉켜있는 쉼터 자리도 앙상한 가지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벤치마저 을씨년스러웠다.
어머니는 잔잔히 웃었다.
“네가 병원에 오면 그 사이 보름이 지난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는 시간을 멈추게 할 재주는 있어도 돌려세울 기력은 없어 보인다.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분이니 잘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반가움에도 서글픔이 녹아서 그 기쁨을 상쇄하는 듯하다. 어머니를 휠체어로 옮기려고 상체를 들어 올리는데 단박에 들어 올려졌다. 그 때문에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내가 가늠했던 무게보다 훨씬 가벼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많이 여위었다. 평소 몸집이 있던 어머니였다.
휠체어를 밀고 휴게소로 갔다. 시집 간 이후 어머니와 함께 산 적이 없으니 동생은 어머니의 입맛을 잘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꽤나 어려워하더니 시간이 감에 따라 제법 어머니 입맛에 맞추고 있다. 된장찌개와 오곡밥을 차려왔다. 닭찜, 야채샐러드, 호박전과 겉절이 김치가 놓였다.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도록 작은 용기에 나누어 담은 명란젓도 함께였다. 우리는 후식으로 팥죽을 먹었다. 아내의 반찬가게에서 어머니가 만든 팥죽을 함께 팔았는데 찾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예약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동짓날 어머니가 지은 팥죽을 아이들은 무척 좋아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나이에 하나가 모자라게 새알심을 넣어주었다. 왜 숫자를 맞추지 않느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했다.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의 출생신고를 부러 두 해가 지난 다음에야 했는데, 출생신고가 늦으면 그만큼 더 살 수 있다는 외할아버지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 어머니는 빙긋 웃었다. 아이들에게 새알심을 넣어줄 때도 그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이들 대접에 새알심을 나이보다 하나씩 모자라게 담는 어머니 모습을 방금 본 사진처럼 아주 선명하게 기억했다. 동생은 정성껏 어머니의 식사를 거들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오랫동안 식사를 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병원 앞뜰 잔디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원은 내부와 달리 공기가 차가웠다. 동생은 준비해온 두툼한 숄을 어머니 어깨에 둘렀다. 햇살이 퍼지는 공원을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두어 바퀴 돌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말이 없다. 눈이 부신지 미간을 찡그린 채 가끔씩 허공과 잔디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영주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하려다 그만두었다. 증손녀가 보고 싶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상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휠체어 양쪽에 동생과 내가 앉았다. 햇살은 싱그럽고 바람은 상쾌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도 봄이 오고 있으리라. 어머니는 허리가 아프다며 눕기를 원했다.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 동안 동생과 나는 휴게소에 마주 앉았다. 병원에 올 때마다 반복되는 순서였다. 예순을 넘겼지만 동생은 아직도 곱다. 그만큼 세상살이에 풍파가 없었으니 고울 만도 하다. 사 남매 중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오늘 아침 영주가 둘째를 낳았단다.”
“어머! 그래요?”
“딸이란다.”
“잘됐네요. 딸이었으면 하더니.”
동생도 곧 둘째 손자를 볼 예정이다.
“엄마도 증손녀 안고 싶으실 텐데.”
동생이 한숨을 섞었다.
“지난번 나 혼자 왔을 때 엄마가 그러시데요,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여태껏 그런 말씀 입 밖에 내지도 않으셨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래?”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해를 넘기면서 점점 더 힘드신가 봐요. 병실에 누워서 희망도 없이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면서 한탄을 하셨어요. 당신이 얼른 죽어야 모두가 한시름 놓을 거라며 안타깝다고도 하시고.”
동생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들에게 하지 못하는 말은 따로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머니의 고통이 느껴졌다. 하루종일 운신도 하지 못하며 맑은 정신으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일까? 그나마 동생이 자주 찾기는 하지만 당신이 마음먹은 대로 활보를 할 수 없으니 오죽 답답할까? 나는 큰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혼자 걸으실 수도 없다는데 저렇게 병상에 누워계시느니 차라리 돌아가시는 게 편하실 지도 모르겠어요. 엄마 너무 불쌍해요.”
동생은 손수건을 얼굴에서 떼지 못했다.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아무것도 어머니를 위해서 할 일이 없었다. 편안히 돌아가시도록 도울 수도 없고, 거뜬히 병석을 털고 일어나시도록 도울 수도 없었다.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낮잠에서 깬 어머니 침상 옆에 앉아 동생이 사과를 깎았다. 어머니는 과일 중에 사과를 제일 좋아한다. 동생은 여러 개를 깎아 다른 환자들에게도 나누었다. 그들 모두가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환자들이었다. 어머니는 벌써부터 시계를 자주 올려다보았다. 내가 갈 시간이 가까워오기 때문이다. 네 시가 되면 내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으로 작별했다. 순간 어머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불안감이 검은 너울처럼 얼굴을 덮었다. 어머니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엄마! 편안히 계세요. 낼모레 또 올게요.”
어머니 귀에 대고 동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병실을 나왔다.
동생은 터미널까지 배웅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셋째와 넷째에게서 올 추석엔 한국에 올 예정이라는 기별이 왔다고 전했다. 어머니가 입원하자 놀라서 허겁지겁 뛰어나온 이후 그 애들은 아직 어머니를 찾지 못했다. 먼 곳이고 한번 다녀가는데 경비도 만만치 않을 걸 생각하면 그 애들이 왔다가는 것도 수월한 일은 아니다. 어머니는 그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림 자체가 그들에게 부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고 싶지 않아서 깎은 듯이 경우를 가리던 분이다. 당신 스스로 운명에 맞서려니 얼마나 힘이 부칠까? 동생의 눈가가 다시 젖었다.
“보름 있으면 다시 볼 텐데, 그만 들어가거라.”
동생은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줄어드는 것은 잠이고, 느는 것은 눈물이라더니. 시도때도없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의자의 등받이를 젖혔다.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기력이 쇠잔해지고 더불어 삶의 의욕도 잃어가고 있음이 역력했다. 첫 해에는 나를 보기만 하면 재활치료사들의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불평하였다. 그들의 노력이 게으르다는 핀잔도 하였다. 부지런히 재활치료를 해서 퇴원해야 하는데 기대만큼 성과가 없으니 그 탓을 모두 재활치료사들에게 돌리고 분통을 터트렸다. 살림살이 걱정에 할 일이 태산인데 병원에 팔자 좋게 누워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며 조급증도 냈다. 그러나 다리는 움직여지지 않았고, 고작 한 시간을 휠체어에 앉아있어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자리에 누워야 했다. 맘과 몸이 따로이니 답답할 지경이어서 화도 곧잘 내었다.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어머니는 모르는 게 있었다. 봉양을 받고자 원하면 집으로 가야 했겠지만 평생 봉양 받는 거 부끄럽게 여긴 어머니이니 그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집안 살림 때문에 어서 가고자 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려고 하는 집에는 어머니가 할 일이 없었다. 사
업장을 폐업하고 늙어가는 아들 혼자 사는 집에 어머니가 할 일이 있다고 믿는 어머니가 그저 안타까웠다.
입원한지 두 해를 넘겼을 때였다. 어머니가 당신 스스로 일어서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옆 침상의 환자가 어머니와 같은 경우를 당한 노인의 예를 들어 설명한 때문이었다. 의사나 간호사도 모두들 한결같이 재활치료 부지런히 하라는 말만 했지 언제쯤 완치가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진단을 내놓지 않은 것도 어머니의 추측을 뒷받침 해주었다. 상황을 파악한 어머니는 말수가 줄고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쾌활한 간호사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어렵지 않았는데 요즘은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다고 걱정하였다. 어머니의 변화는 나와 동생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어머니가 붙들고 놓지 않았던 희망의 끈이 풀리려고 한 것이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언제라도 편안히 잠자듯 영면하였으면 하는 것이 평소 나의 바람이었다. 죽음의 공포도 육체의 고통도 없이 취하는 평안한 영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축복과 같은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미 꺾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해서 건강을 되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였다. 연세에 비해 건강했던 어머니이니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었다. 모든 의사의 진단이 항상 정확한 것만은 아니고, 환자들의 상태는 그들의 신체적 조건과 의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희망적인 기대와 바람을 늘 품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상태는 그 어떤 것도 만족시킬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고통에 하릴없이 몸을 내맡긴 어머니를 바라보면 예리한 칼날로 심장을 긁어내는 것만 같은 아픔이 뒤따랐다. 가엾은 어머니.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 어머니의 모습과 눈물은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었다. 나이 먹으며 늘어나느니 눈물이라더니. 고개를 창으로 돌려야 했다. 고속버스가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이쯤에서 나는 언제나 차창으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오자 퇴근 시간과 겹쳐진 도로에 차가 넘쳤다. 친구 정호가 전화했다. ‘내일 저녁 시간 어때? 너댓 명 모일 것 같은데.’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젊어서는 시간에 쫓기느라 몇 년에 한번 볼까 말까 했던 친구들이었다.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여유가 생기자 일고여덟이 모임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로 학교 다니던 시절을 안주로 삼던 모임이었다. 그럭저럭 잘 유지되던 모임은 환갑들을 넘기자 원활하지 않았다. 해가 가면서 하나씩 둘씩 이러저러한 이유로 빠져나가 활력을 잃더니 결국은 지난 해 송년모임을 마지막으로 해산되었다.
그 즈음 나는 췌장염으로 매우 큰 고생을 겪고 있었다. 의사는 언제 암으로 전이될지 모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나뿐만은 아니었다. 병명은 각각 다르지만 나 같은 친구가 서넛은 더 되었다. 이후 부정기적으로 몇몇끼리는 가끔씩 모였고 나에게도 권유가 있었지만 선뜻 나설 마음이 없어 참석하지 않았다. 몸 한구석에 묵직한 돌덩이가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이 가끔씩 나를 진저리치게 하였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나면 반갑고, 즐겁고, 시간 가는 것이 아쉬웠던 친구들과의 떠들썩한 술자리에 흥미를 잃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서자마자 다음 모임을 기다렸던 기억이 이제는 마치 남의 이야기만 같았다. 인생은 칠십부터라며 활기차게 별난 일을 다 하는 노인네들을 TV에서 여러 차례 보았지만 그런 사람도 있으려니 하고 말았다. 아흔아홉까지 팔팔하게 살자며, ‘9988’이라는 암호를 주워 들고는 마치 유치원에 입학한 아이들처럼 수선을 피우는 부류들도 있었다. 그러더니 그것이 '9988234'로 진화하였는데 여전히 암호 같은 소리들이었다. 그들의 수선스러움이 달갑지 않아 멀찌감치 피했다. 주위 사람들이 취미를 찾고 무언가 일거리를 만들라고 충고도 했다. 스포츠댄스, 배드민턴, 크리켓동호회 활동이며 복지시설 봉사활동까지 다양한 종류의 소일거리를 추천하였지만 도통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심드렁하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매사에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역시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았다.
내일은 영주에게 다녀올 일 이외에 예정된 계획은 없다. 그러나 정호의 제의가 선뜻 내키지 않는다. 기색을 눈치챘는지 그가 바싹 다가온다. 그는 대여섯이 앉아서 떠들며 소주잔 기울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부럽다는 친구다. 혼자가 싫고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누구라도 불러내려 애썼다. ‘경수도 연락이 됐다.’ 그가 떡밥이라도 던지듯 말했다. 경수와는 고교시절 단짝으로 지냈다. 그에게도 인생의 굴곡이 없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헤쳐가면서 그만 그만 살아오던 터였다. 그랬던 그에게 혹독한 시련이 닥쳤다. 그가 사업에 실패하고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거의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가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소재를 찾아 여러 사람들에게 탐문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렇게 몇 달 지나서 제풀에 포기하고 있던 차에 그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를테면 유서라는 것이었다. 자의적으로 삶을 마감하며 친했던 친구들에게 보내는 글. 유서에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난날의 회상과 비장한 각오로 선택하려고 하는 죽음에 대한 단상, 그리고 편지를 보내는 심경, 마지막으로 덧붙인 몇 가지 당부들. 그의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것이 내 몫일 리 없었다. 은행나무가 자지러지며 이파리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울림이 되어 그의 모습을 감쌌다. 그 쓸쓸한 풍경이 그의 뒷자락에 병풍처럼 놓여졌다. 그리고는 두 해가 지날 동안 누구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차츰 그의 죽음은 사실이 되어 기억에 새겨지고 있었다. 나 역시 단념하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잊혀가던 지난해 여름, 홀연히 그가 나타났다. 그는 초췌해 보였고 매우 지쳐 있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궁금했지만 그에게 묻지 못했다. 다만 그의 모습에서 지난날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그는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를 만족시킬 방법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불가능한 방법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방법이란 것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비참한 모습으로 매달려 있기도 그렇고, 선혈이 낭자한 채로 쓰러져 있는 것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더군. 깨끗이 타버려서 재가 되어 풀풀 날아가거나, 비누거품처럼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그런 방법이 없을까 찾아봤는데…….”
이야기를 듣던 친구 하나가 바로 응수했다.
“결국은 아플까 봐 자살하지 못했다는 사람의 말과 다르지 않군.”
그가 농을 섞어 말했다. 그러나 경수의 창백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방법이 있을까? 만일 그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써질지도 몰랐다. 경수는 자신의 주검을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고 그들이 뒤처리를 하게 둔다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찾았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혹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 같은 미련.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게 만든 동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파리한 경수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우리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을 어찌 그인들 몰랐을까.
“내일 봐서 참석하게 되면 연락하지.”
정호는 꼭 참석하라고 다짐하며 전화를 끊었다. 터미널이 가까워지자 퇴근시간과 맞물려 도로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버스가 가다 서다 반복했다. 명치끝이 뻐근하며 멀미가 느껴졌다. 어디를 다녀도 멀미 한번 하지 않았는데 이것도 다 늙어서 생기는 현상인가. 늙는 것이 점차 구차해진다. 지나고 보니 사람살이가 원칙도 없고 틀도 없는 소리와 같았다. 제멋대로 터져 나오는 소리들. 평생을 죄 한번 안 짓고, 자식들 키우고, 며느리 대신해서 아들 바라지에 손자들 키우느라 옆을 볼 겨를도 없었던 어머니는 거동을 할 수 없어 누워만 있다. 원칙이 있다면 최소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점점 악화되는 도로상황 때문에 버스가 꼼짝하지 못했다.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교통순경들은 다 어딜 간 거야!
즐기고 많이 마셨던 술이 췌장에 독을 심었다.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장기라서 잘 모르고 지내다가 작년 봄 한밤중에 응급실로 실려가 날벼락을 맞았다. 급성췌장염. 자칫하면 눈도 제대로 떠보지 못하고 단숨에 가버리는 고약한 질병이라고 했다. 나흘을 굶고 퇴원하여 부랴부랴 담배부터 끊었다. 모두들 건강상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담배 끊고 수선을 피우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술을 끊어야 할 차례였다. 무엇보다 과음에서 비롯된 질병이었다. 그러나 술은 망설여졌다. 때때로 소나기처럼 내리 꽂히는 허전함을 어떻게 비켜갈지 자신이 없었다.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의 전범을 쫓아 ‘조금씩, 그리고 가끔씩’으로 혹독한 금주의 억압을 비켜났다.
오늘 같은 날은 한 잔이 간절했다. 어머니 병원을 다녀오면 늘 만나는 고민거리였다. 집에 돌아와 혹시나 하고 영휘를 찾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녀석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미상불 들어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집에 오다가 슈퍼에서 산 소주 한 병을 상에 올려놓았다. 아내가 있었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술상이 차려졌을 테지만 아내는 집에 있지 않다. 두리번두리번 냉장고를 뒤지다가 오래전에 사다 놓은 번데기 통조림을 꺼냈다. 양념을 하고 간을 맞추어 조리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몇 잔을 마시면 잠이 쉬 오리라. 한 잔을 삼켰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문득 영주가 궁금했다. 손녀는 어찌하고 있는지. 내일 병원에 가면 볼 수 있으리라. 손자 녀석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어주면 헤죽헤죽 잘도 웃었는데, 이 녀석도 그러려나? 영주와 영휘를 보듬어 안고 웃던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그 흔한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가슴에 불길이 이는 듯 더워졌다. 소주 한 잔을 더 마셨다. 이 아파트에 이사 들어오던 날 아내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기뻐했다.
“이런 날이 언제 오려나 했지. 근데 오늘이라니…….”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아내의 얼굴에서 언뜻 세월의 흔적들이 엿보였다. 문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숨고 싶어서 차마 보지 못하고 눈길을 돌려버렸다. 대강 이삿짐을 정리하고 자리를 잡자 아내는 삼겹살을 구웠다. 아이들을 실컷 먹이고 우리도 실컷 먹었다. 아내는 술기운이 도도해지자 노래를 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거실 창문 유리에 어둠이 물들었다. 봄이 파고든 대기에 만연한 따스함이 열린 창으로 밀려들어온다. 영휘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나는 습관처럼 기다린다. 이 넓은 집에 나 혼자라는 것이 싫어서 기다림이라도 놓지 않아야 외로움이 덜할 것 같다. 삼삼오오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정호는 어디서 그 부러움을 해소하고 있을까. 경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그가 다시 시도하기에는 이미 동력이 상실되고 말았으리라.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미련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쥐고 있는 미련은 그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거실을 둘러본다. 집이 너무 넓다. 어머니는 편안히 주무시는지. 원래 초저녁잠이 많고 아침잠이 없는 분이다. 하루종일 누워서 거동을 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어머니 대신 그 병상에 누워본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잘못된 것이다. 그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아들인 것처럼 부지런히 맴돌았어야 옳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말았다. 어머니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무력감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예순하고 다섯.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가기는 가야 하는지. 멀고 짧음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는 누구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일까? 뒤죽박죽 원칙도 없고 형체도 없는 소리 같은 삶이다. 지나온 시절들을 뭉뚱그려 거실 창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다. 가슴에서 휙 하고 바람이 일었다.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3년 · 상반기 제8호
이선규
서울 출생. 2012년 『시에티카』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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