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인생이 편안해지는 6가지 길
누구나 좋든 싫든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현실이란 무엇일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하며, 반드시 대학에 진학해 졸업장을 따야 한다. 휴가 중에도 상사의 문자 메시지를 받으면 어쩔 수 없이 회사로 달려가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하고,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수없이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렇게 살다가 나이가 들어 자기 인생을 돌이켜 보면 ‘현실’이라는 족쇄에 꽁꽁 묶인 채 평생을 보냈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을 직시해.”
우리가 자라면서 수없이 듣는 이 말이 아름다운 인생을 짓밟고 아름다운 것들을 망가뜨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혐오하는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한평생 현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8가지 고통, 즉 생고 (生苦), 노고 (老苦), 병고 (病苦), 사고 (死苦), 애별리고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증회고 (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고통), 구부득고 (求不得苦, 구하려고 노력해도 구할 수 없는 고통), 오온성고 (賟蘊盛苦,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너무 강한 고통)를 겪는다.
우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와서[生], 천천히 노쇠하고[老], 수시로 병마에 고통받다가[病], 조용히 죽는다[死]. 길고도 짧은 이 인생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늘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없고[愛別離],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늘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사물이다[怨憎會]. 얻고자 하는 것이 한없이 많아서 만족할 수 없고[求不得], 또 일생 동안 갖가지 형태와 색깔, 복잡한 감정과 생각 사이에 얽매여 기복을 겪는다. 교통사고, 실직, 파산 등 예상하지 못한 화를 만나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고통과 액운을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떠나는 것이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떠나 드넓은 대자연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다.
예츠의 시처럼 말이다.
나 일어나 지금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에 진흙과 욋가지를 이겨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 통 하나를 가지리라.
꿀벌 윙윙대는 숲속에서 나 혼자 살리라.
거기에서 평화를 누리리라. 평화는 서서히 내리는 것.
안개 피는 아침부터 귀뚜라미가 우는 저녁까지.
한밤중에는 온통 가물거리는 불빛, 한낮에는 타오르는 보랏빛,
저녁에는 홍방울새의 날갯짓이 가득하리라.
나 일어나 지금 가리라.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낮은 잔물결 소리가 들리나니
한길가에 또는 잿빛 신작로에 서 있노라면
영혼 속 깊은 곳에서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중국의 도연명과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모두 이런 마음으로 생활했다. 그들은 사회의 현실이 자신의 존엄과 본성을 해치는 것을 거부하며 관직을 버리고 도시를 떠나 전원에 홀로 파묻혀 자연적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부처는 이런 은거나 고행을 해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해탈은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煩惱卽菩提]”라고 했다. 이것은 불교 사상의 적극적인 면을 보여 주는 개념이다.
인생의 고통과 재앙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서서 관찰하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해탈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수행의 과정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대본 반야심경을 보면 관세음보살이 있는 장소를 영취산으로 명시하고 사리자 외에도 많은 청중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현장법사의 번역본을 좋아한다.
현장법사는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라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장소를 밝히지 않았다. 관세음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는 장소와 시간이 특정하게 정해지지 않으므로 이른 아침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켜 줄 때가 될 수도 있고, 바이어와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때가 될 수도 있다.
때와 장소가 어디든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즉시 현실을 초월하고 모든 고통과 액운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볼 수 있을까?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라는 심오한 방법을 수행할 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해탈했다는 뜻이다.
‘오온’과 ‘공’이라는 아주 중요한 개념은 일단 놓아두고, 먼저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는 것’이 어떤 신기한 방법이기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게 만드는지 살펴보겠다.
우선 ‘행하다[行]’라는 의미를 보자. ‘행하다’란 ‘수행’을 뜻한다. 인생을 수행으로 여겨야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을 수행으로 보면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현실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관자재보살을 보라. 현실 속에 똑바로 앉아서 깊은 수행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현실의 구속을 뛰어넘지 않았는가. 몸은 현실 속에 있지만 마음은 현실을 벗어났다.
‘깊다[深]’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gambbiran이라고 하는데, ‘심오하다’는 뜻도 있고 여자의 질과 탯줄 사이 부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부위는 생명을 잉태하는 곳으로 근본, 처음을 상징한다. 또 반야의 수행이 깊은 것과 얕은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떨치고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알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얕은 차원의 반야이고,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리의 본체를 발견하여 자신도 깨달음을 얻고 남도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은 깊은 차원의 반야다.
또 ‘깊다’는 말은 관자재보살이 수행한 반야바라밀다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으로 안내하는 철저한 수행임을 뜻하기도 한다. 철저한 수행을 해야만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들이 “출가가 곧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출가란 바로 우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 즉 우리의 진실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이 환상을 꿰뚫어 보려면 반야바라밀다를 이용해야 한다. 당나라 때 법장법사는 반야바라밀다를 이렇게 해석했다.
“반야는 지혜라는 뜻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정신적인 깨달음이자 사물 본연에 대한 비범한 깨달음이다. 바라밀다는 피안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기묘한 반야의 지혜로 생사를 초월해 진실한 공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반야는 체 (體)이고 바라밀다는 용 (用)이다."
초기 불교에서 반야의 수행은 계 (戒), 정 (定), 혜 (慧)였다. 계, 정, 혜 세 가지 방법을 통해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 해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보시 (布施), 지계 (持戒), 인욕 (忍辱), 정진 (精進), 선정 (禪定), 반야 (般若)의 육도로 확대되었고, 이를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고 하여 ‘육바라밀’이라고 불렀다.
반야바라밀은 육도 중 여섯 번째다. 따라서 반야심경 첫 구절에서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라고 한 것은 육도의 수행을 통해 현실의 환상에서 벗어나 오온의 공함을 비추어 볼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육도를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자.
인생의 고통과 재앙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서서 관찰하라.
그리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라.
반야심경 마음공부 중에서
페이융 저자
허유영 번역
춬판사 유노북스
첫댓글 출가는 귀가, 인상적입니다.^^
👍🏻